봄비 내리던 날에

2025-04-18T02:30:27Z

나는 봄비를 좋아한다. 봄이면 즐겨 듣는 노래가 배따라기의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일 정도다. 어린시절 봄비는 땅속에 잠들어 있던 새싹들을 깨우는 요정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날의 봄비는 이상했다. 전날 불어대던 강풍부터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었다. 날씨 앱을 열어 자꾸 들여다 보았다. 종일 비 예보가 있더라도 소강상태가 되면

나는 너희들로 인해

2025-04-15T02:53:20Z

인생 후반기 삶이 풍요로워졌다. 친구 부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인생이 즐거워졌다. 세상 부러운 게 없어졌다. 남들은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그동안 맺었던 관계들을 정리한다는데 나는 50년 전 친구들을 60대에 찾게 되었다. 이게 행운이 아니라면 뭐가 행운이란 말인가? 일 년에 네 번. 이번 봄 약속 시간은 11시. 잠실역 환승센터 앞 벤치에서. 시간에

엄마라는 자리의 무게

2025-03-31T06:47:42Z

이쁜이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사랑이 소식이 있는지 궁금하시다며. 사랑이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짠하다. 행여 무슨 무서운 일이나 겪지 않고 그 누군가 사람의 손에 잘 거둬졌으면 좋으련만. 종적을 알 수 없으니. 카톡 대화를 하다 손주가 나날이 잘 자라고 있어 좋으시겠다 했더니(대부분의 할머니들이 그렇듯 이쁜이 엄마도 카톡 사진첩에는 외손주의 앙증

꽃이 피려고 오늘내일한다

2025-03-14T04:39:14Z

아들을 군대에 보내 본 사람들은 남들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아는 게 있다. 함께 먹고 자고 학교를 다니던 아들 방의 텅 빈 적막감에 대해.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여울에서 퍼올려진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흐르던 경험에 대해. 자기 몸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던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빈 공간을 바라보며 수없이 많은 이 땅의 부모들은 건강하게만 돌아오라

고양이 이사

2025-03-24T09:48:59Z

나리가 제 집으로 돌아갔다. 작은 아들은 나리를 본가에서 데려가지 못한 상태로는 이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사라는 미션에서 난이도가 가장 높은 게 고양이 이사라고 보일 정도로 심란해 했다. 제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내 마음도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을 어떻게 보내지?' “나리야. 오빠가 엄마한테 가자~ 그러면 야옹야옹

우리 집에는 까미 왕자님이 산다

2025-02-28T14:25:09Z

안경이 사라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시 2분. 분명 경대에서 '툭'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까미는 배가 고프면 그런 방식으로 아무 때나 나를 깨운다. 나리가 있는 방 문을 열어두려면 까미는 안방에 두고 문은 닫아 둬야 한다. 교대로 열어주지 않으면 나리 있는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때리려(?) 들기 때문이다. 가벼운 소재의 안경이라 밟을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로 봄이 찾아온다고 - <권가네 이야기>

2025-02-18T12:06:13Z

겨울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2월. 올 2월은 눈도 자주 내리는 데다 이상할 정도로 강추위 기간이 늘어지는 기분이다. 언제 봄이 오지? 오는 게 맞긴 한 걸까? 경제와 정치의 찬 바람까지 길어져서인지 내 마음도 움추러든 것 같다. 겨울바람 탓에 몸 여기저기 통증 부위가 늘어난다. 물론 신체를 과하게 오래 쓴 탓이 더 크겠지만. 오 남매들의 신년 모임도

어느 날의 기록

2025-02-09T01:04:12Z

한주 내내 한파가 몰아닥쳤다. 눈도 내렸다. 강풍까지 불어대니 스산함이 더해지는 기분이다. 집냥이 둘은 방 안에서도 오소소 한 느낌이 드는지 누운 자리를 뜨지 않는다. 배고플 때만 움직인다. 냥냥이들 배꼽시계의 정확성을 나만큼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전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가만있어도 오른팔 전체가 쉬지 않고 쑤셔서다. 결국 일어나 진통제를 찾

<공원 냥이 아롱이> 사랑이는 어디 있을까요?

2025-02-05T18:42:59Z

사랑이가 안 보인다. "사랑아~~~". 불러보다 울컥한다. 벌써 열흘이 넘어간다. 목이 멘다. 이쁜이 엄마가 사랑이를 찾으러 오셨다 결국 울고 가셨다더니. 그 마음이 읽힌다. 은토끼님에게 이틀 동안 사랑이를 찾지 못했다는 연락이 왔을 때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는 하늘 공원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번 겨울 사랑이는 급식을 하러 가 보면 하늘공원 겨울

<공원냥이 아롱이> 사람다운 행동이란 어떤 걸까?

2025-01-23T09:07:10Z

아침에 일어나니 영하 12도였다. 전날 밤 영하 17도에서 오른 게 그 정도다. 영하가 계속된다고 했으니 영상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하 12도는 좀 심한 거 아니야? '겨울인데 뭐 그 정도야?' 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공원 냥이들을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살짝 공포감이 드는 온도다. 그 정도면 내 몸 지키기도 만만치 않아서다. 전날 토성을 내려와

<공원 냥이 아롱이> - -고양이 남매의 다툼-

2025-01-16T11:17:51Z

“엄마. 까미가 또 침 흘리는데~” "어디 흘렸어?" 까미의 다리를 가리켜 살펴보니 털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루밍한 흔적치고는 좀 지나쳐 보였다. "까미 가끔 보면 방바닥 같은데도 침 흘려." 듣고 보니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다. 까미가 혀를 내미는 이상 행동을 한 게 벌써 두 어달은 된 것 같아서였다. 특별히 입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그냥 지켜만 보

눈에 밟혀서

2025-01-03T16:32:45Z

"그 미친 여자가 고양이 겨울집마다 물을 뿌려놔 다 얼었어요. 요즘 갱년기가 심해 몸이 여기저기 아파 모포를 꺼내 교체하기도 힘들어 B여사님 오시라고 연락했어요. 그러지 않아도 불쌍한 애들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성품 못된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2~3일에 한 번씩 그런 짓을 한다는 게 나로서도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이

12월 어느 한 주

2024-12-28T14:39:33Z

월요일 남편은 종양 내과로 전원 된 뒤 한 달에 한 번 검사를 받고 있다. 약효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동안은 한 달씩의 유예를 받아왔었다. 아침 7시. 남편은 혈액 검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아침을 먹고 진료를 받기 위해 나가는 걸 보며 병원이 가깝다는 게 위안이다 싶었다. 검사 결과는 다행이었다. 매달 뼈를 튼튼히 하는 주사를 맞고 3개월

겨울도 오기 전에 눈이 내렸다

2025-01-12T07:41:05Z

첫눈이 내렸다. 그것도 이례적인 폭설로. 눈의 양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의 무게가 보통 눈보다 세 배나 무거운 습설이라고 했다. 습설이란 낯선 단어에 '뭐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공원에 나가자 금방 깨닫게 되었다. 토성 비탈길을 든든히 지키던 장송들이 꺾이고 찢긴 채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쓰러진 나무들을 피해 토성길을 도시던 분들이 "아

누군가에게 광화문 길은 추억이다 - <미망> 시사회를 다녀와서

2024-11-14T10:41:26Z

평생진행형인 기억이 있다. 살다 보면 잊을 수 없는 아쉬운 순간들. 엇갈린 운명이라고 하던가? 그래서 더 아쉬운? 영화 시사회를 보러 용산으로 갔다. 9호선 노량진역에 내려 1호선을 갈아탔다. 1과 9의 차이는 한강 철교를 지나며 훅 다가왔다. 동행한 전직 교장님과 수석교사님은 시드니에 온 기분이 든다며 지하철로 가는 용산 나들이를 즐거운 목소리로 지저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 고양이 합사

2024-11-05T13:13:30Z

"까미야~. 작은 형아가 이사 가야 한대. 나리 이번에 오면 오래 있을 거야. 나리, 까미 동생이잖아. 자꾸 하악질 하지 말고~. 알았지?" 나도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반복해야 했다. 고양이들의 속마음을 알기 힘드니 결국 행동으로 유추해야 하는 데 그게 쉬운 일인가? 작년 10월. 나리는 2주 정도 본가에서 지내다 제 집으로 돌아갔다. 까미가 거의 맞

미아리가 소환한 추억

2024-11-05T12:37:35Z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들 어려웠던 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기억이 오래 남는 이유는 뭘까? 1970년대 언저리.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2학년인 남동생 그리고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막내까지. 우리는 화성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역 근처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거기서 제법 걸어야

살아가야 하는 일의 무게

2024-10-23T00:37:45Z

"어!~ 어! 뭐야? 이거???" 눈앞에서 보고 있는 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까마귀가 고양이 밥그릇을 입에 물고 나무 꼭대기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고양이 고등어에게 밥을 주고 돌아서 근처에 있는 다롱이에게 다가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겨우 1,2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까마귀가 유독 시끄럽게 떠들더니~. 내가 자리에서 비켜나기를 기다린

엄마의 가르침 - - 누구에게도 모질게 하면 안 된다 -

2024-10-11T12:07:41Z

살다 보면 결정이 어려운 일이나 참기 힘든 순간이 수도 없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들은 과거의 경험치들을 적극 활용한다. 나는 엄마의 조언이나 삶의 모습을 떠올렸다. -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엄마가 헤쳐 온 어려움만 할까?- 70년대 오 남매를 대학에 보낸 엄마의 억척스러움은 불굴의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터. 이미 5년 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지금도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해! - - 나의 조카딸 정후에게-

2024-10-02T13:11:26Z

폭염이 한풀 꺾인 9월 28일 토요일 오후 3시. 용산구청 주변에 있는 B. 하우스에서 조카딸 정후의 결혼식이 있었다. '스드메'라 양가 친척이 모일 장소로 너무 좁지 않을까 살짝 걱정을 했다. 기우였다. 꼭 축하해 줄 사람들로만 모인 느낌! 부산스럽고 어지럽지 않아 결혼식의 신성한 장소로 부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부는 사랑스럽게 어여쁘고 신랑은 훤칠하

권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