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 - 시간은 다르게 익어간다.

2025-05-11T09:21:18Z

휴일 아침, 고소한 냄새에 눈을 떴다. 하늘로 뻗친 머리를 긁적이면서 홀린 듯 부엌으로 다가갔다. 싱크대 위에 노릇노릇 잘 익은 부침개가 놓여있었다. 오호라, 너였구나, 나를 깨운 고소미의 정체가. 가지런하게 놓인 담음새가 정갈하기도 하지. 일단 눈으로 먼저 먹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대파와 양파, 각종 채소와 햄이 섞여있다. 그것도 한 입에 쏙쏙 들어

인생의 BGM -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2025-04-30T18:37:24Z

그런 노래가 있다. 드라마에서 중요한 장면에 배경음악이 깔리듯 인생의 어떤 순간을 채워준 노래. 어디선가 문득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나는 서슴없이 그 시절로 돌아간다. 중학교 1학년 과학시간. 실험수업을 하기로 돼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날 장비가 고장 났다. 과학시간이 오락시간으로 바뀌었다. 한 사람씩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던 중 내 차례가 되었다. 앞

단추를 풀지 않는 이유 - 당신의 불안을 잠가줄게

2025-04-23T23:17:12Z

돈오점수. 거울 앞에서 왜 이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누가 보면 신실한 불교신자인 줄 알겠지만 평소 나는 절에도 교회에도 성당에도 다니지 않는다. 급할 때만 '신'을 부르짖는 얇실한 무신론자 주제에 돈오점수를 들먹이다니. 그래도 뜻은 알아야지. 국어사전에 '돈오점수(頓悟漸修)'는 '문득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점진적인 수행단계가 따름을

지지대를 세우다 - 우리 삶이 휘청일 때

2025-04-22T10:32:47Z

"언제 이리 컸지?" 그러고 보니 웃자란 머리가 산발이었다. 생기 잃은 피부는 누르스름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길어난 발이 화분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우리 집 베란다 식물들 얘기다. 한동안 신경을 못썼더니 줄기가 축축 늘어져 있었다. 살려야지. 남편이 팔을 걷어붙였다. 베란다 바닥에 신문을 깔고, 창고 어딘가에 처박아놨던 흙과 자갈도 꺼내왔다. 여

어쩌면 오디세이가 될 이야기 - 에필로그

2025-04-20T06:06:55Z

도서관 올라가는 길목에 꽃사태가 났다.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한꺼번에 피어서는, 서로 봐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사찰의 일주문이나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듯이 이 도서관은 꽃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길이 열리는가 싶을 정도였다. 곳곳에서 탄성과 함께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대열에 합류했다. 꽃이 잘 보이는 각도를 찾다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보기도 했

존윅의 눈물 - 물방울 개똥철학의 탄생

2025-04-10T12:59:33Z

"나 엊그제 존윅4 보면서 울었어." 남편이 이 말을 했을 때 사실 당황스러웠다. 아니, 황당했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마음이 좀 복잡했다. 그때 우린 수산시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가판에 놓인 새우나 문어, 낙지 등을 눈으로 찔러보면서 살까말까 하던 중에 갑자기 이 말이 나왔다. 내 표정이 꼴뚜기가 됐다. 놀라서 눈이 튀어나왔다. '존윅'이 어떤

필 받아서 하는 꽃타령 - 연재일 아님 주의

2025-04-18T00:02:16Z

날씨가 아까운 일요일 오후, 뭐라도 해야될 것 같아 어슬렁 거리던 참이었다. 남편이 차키를 들면서 말했다. "벚꽃 보러 가자." 아는 코스가 있다고 했다. 집에서 멀지 않다고. 얼결에 따라나선 드라이브 길, 20여분 쯤 지났을까? 가는동안 나는 차안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물건이 어디쯤 왔는지 배송 확인을 누르고 있는데

겁나서 혼이 나가버린 것 같아 - 다큐 '목소리들' 관람기

2025-04-05T05:35:24Z

어제저녁 전국 130여 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목소리들'이 동시개봉 했다. 제주 4.3 사건 77주년에 맞춘 동시개봉 '이벤트'에 나는 관객으로 참여했다. 학원을 마친 딸아이도 함께였다. "엄마, 4.3 사건이 뭐야?"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물었다. 부끄럽지만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무식쟁이 엄마는 재빨리 인터넷을 뒤졌다. 4.3 사건이란?

타는 마음 - 쎄한 느낌이 뒤통수를 칠 때

2025-04-02T06:52:31Z

평화로운 오후였다. 가족들은 등교나 출근 등으로 모두 외출, 나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딸의 보물창고에서 마가레뜨 과자를 하나 꺼내 먹었다. 맛있어서 2개를 더 뜯었다. 달달한 디저트와 고요한 휴식이 있는 집은 최적의 사무 공간이었다. 30분쯤 쉬면서 책을 읽기로 했다. 예전에 봤던 책을 다시 읽는 데 재미가 들린 참이었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 그녀가 떠났다 - 그리움 주의

2025-04-24T06:22:28Z

4년 전 오늘 아침, 전화기에 폭탄이 떨어졌다. 발신자는 엄마였다. "나야, 할머니가 위독하셔!" (여기서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를 칭한다.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굳이 구분하고 싶지 않아 '할머니'로 쓴다.) 전화를 끊고 병원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도착해 보니 할머니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감은 눈

집으로 가는 길 - 곧 신호가 바뀔 거야

2025-04-01T23:43:49Z

"우리 걸을까?" 퇴근길에 남편이 말했다. 운동 삼아 매일 30분씩은 걷기로 해놓고 지난주엔 거의 나가질 못했다. 꽃샘추위와 바쁜 일정이 발목을 잡았다. 숙제를 미룬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 쌓여갔다. 다행히 며칠 사이 날이 풀리고 여유도 생겼다. 서둘러야 했다. 미적거리다 보면 또 주저앉고 싶어질 게 뻔했다. 나란히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산책

청춘을 돌려주는 곳 - 막내취급 주의

2025-04-24T06:23:41Z

예약한 시간보다 10분 일찍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손님의 파마를 말고 있던 원장님이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어떡하지, 지금 손님이 많은데... 저 예약하고 왔는데요? 11시 30분? 아, 11시 반이었어? 1시 반 아니고? 내가 이렇다니까.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이며 턱으로 대기실을 가리켰다. 그래봤자 소박한 평상 하나가 전부였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암 수술 이후 달라진 것들

2025-04-02T07:58:14Z

이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둘러보니 암투병 중에도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고통의 순간마저도 기록으로 남기려 집중한, 그 애쓴 흔적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힘든 항암치료 과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 대목에선 사방이 고요해졌다. 상세한 의학지식과 암관리, 식단 등에 관한 고급정보도 얻게 되었다. 우리도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와 위안은 덤이었

고양이와 까치와 나 - 과유불급 주의

2025-04-02T00:14:57Z

주말 오후, 남편과 산책에 나섰다.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중학생 딸아이도 끌고 나왔다. 그나마 미적미적 못 이기는 척 끌려와 줘서 다행이었지, 대학생 아들은 미동도 없었다, 아무튼. 올해도 봄은 다산이었다. 나뭇가지의 새순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콩알만 한 주먹을 움켜쥔 것이, 생후 일주일쯤 됐을까. 영락없는 신생아 이미지였다. 그 사이를 바람이 살랑

빈 속에 초를 켜다 - feat. 당근의 유혹

2025-04-02T00:19:51Z

밤 9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식구들은 각자 방에 들어가 있고 나는 식탁에서 일기를 쓰는 중.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가 눈 쌓이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얼핏 생각했다. 그리다 당근과 눈이 마주쳤다. 어헛, 어림도 없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일기 쓰기에 집중했다. 3시간 전, 다툼이 있었다. 홍코너, 동남아 순회공연보다 피곤

새학기증후군이 내게 남긴 것 - 낯가림 주의

2025-04-01T00:10:39Z

새학기증후군 : 새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을 느끼거나 힘들어하는 증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이번 주말 전국의 학생들은 당당하게 늦잠 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교실에서 신경이 곤두선 채로 한 주를 보냈을 테니. "엄만 좋겠다, 반 배정 안 받아서."

브로콜리 소동 - 너무 아프면 말이 안 나와

2025-04-02T11:58:57Z

※ 심신이 미약하신 분은 읽지 마시길 당부드림 '일요일 단 하루, 브로콜리 1개 900원 특가세일!' 자주 가는 마트에서 알림 메시지가 왔다. 이밖에도 여러 세일품목들이 열거돼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브로콜리에 관한 소식이었다. 십자화과 채소들 중에서도 브로콜리는 특히 항암효과가 뛰어나기로 손꼽히는 건강식품. 남편도 예전엔 본 둥 만 둥

엄마의 엄마 - 잔소리 주의

2025-04-02T07:06:02Z

딸아이가 5살 무렵, 소위 말하는 ‘땡깡’을 부리는 중이었다.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빽빽 울어대기만 했다. 우느라 얼마나 용을 썼는지 머리카락이 축축해졌다. 나 역시 달래느라 진땀이 났다. 심장이 거칠게 뛰면서 겁이 났다.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여리고 작은 몸을 때릴까봐. 나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하지만 머릿 속이 뒤죽박

밥솥은 죄가 없다 - 인생이 뒤통수를 친다 해도

2025-04-01T10:09:45Z

냄비 안에서 손등까지 차올랐던 물이 밤새 졸아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콩들이 불룩하게 배를 내밀고 있었다. - 불어난 거 보이시나요? 어제보다 말랑해졌죠? 유튜브 영상 속의 남자가 콩 한 알을 들어 깨무는 시늉을 했다. 처음보다 딱딱한 정도가 덜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삼키지 못하고 입 안에 머금고 있었다. 카메라가 얼른

그러게, 누가 결혼식 가랬나 - 목마름 주의

2025-04-02T03:16:13Z

청첩장을 받았을 때 결혼식 참석 여부를 결정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단순하게 ‘뭐 입고 가지?’라는 고민이 먼저 들면 천재지변이 없는 한 참석한다. 그런데 청첩장을 여는 순간, 계산기가 제깍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과 주고받은 손익을 따져보거나 결혼식에서 마주치게 될 면면들과 나와의 관계도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그럴 땐 대개 봉투만 보낸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