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어선생님, 문어 야와라카니 - 에필로그

2025-05-07T22:56:22Z

몇 해 전 방송에서 본 정호영 셰프의 일본식 문어조림 '문어 야와라카니'를 만드는 레시피를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문어를 좋아하는 신랑은 먹었던 문어 요리 중에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문어숙회보다 더 부드럽고 쫄깃한데 간장양념이 배어 있는 문어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상의 맛을 뽐내었다. 감자 샐러드와 새콤한 유자소스를 함께 곁들여 먹으면 문어의 쫄

화가 날 땐, 나물 비빔밤 - ep.14

2025-05-02T07:59:17Z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때 나뭇가지의 나뭇잎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속절없이 나부끼는 나뭇잎은 아무런 억울함도 슬픔도 속상함도 화남도 없어 보인다. 바람에 흔들려 이리저리 나부끼는 그 모습이 속상한 건 그저 나뿐이려나 보다. 강한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나뭇잎은 그 바람에 다시 몸을 싣고 흙으로 돌아가겠지. 사

그들의 꿈을 먹고, 어묵부추잡채 - ep.13

2025-04-29T03:12:36Z

내가 아는 엄마의 소녀시절은 무척이나 공부를 하고 싶어 했던 7남매의 장녀였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엄마와 이모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리고 나에게 푸념하듯 늘어놓은 그녀의 속마음 속에서 나는 선명히 그려낼 수 있었다. 한 소녀의 높고 푸른 꿈을. 그 시절 7남매의 장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부모가 된 것과 다름없는 책임

마술사의 김밥, 소풍도시락 싸기 대작전 - ep.12

2025-04-24T06:10:10Z

우리 엄마는 김밥의 달인이다. 내가 소풍 가는 날이면 엄마는 여지없이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 수십 줄을 쌌다. 분명 내 도시락에 담길 김밥은 기껏해야 한두 줄일 텐데 도대체 누구의 뱃속에 다 들어갈지 모르는 검은색 김에 쌓인 김밥들이 쟁반 위에 소복이 산처럼 쌓아져 있었다. 소풍 가는 날은 아침점심저녁 모두 다 김밥이다. 아침에는 방금 막 싸서 참기름 냄

홈 스위트 홈, 된장찌개 - ep.11

2025-04-29T08:59:54Z

집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면 나는 구수한 냄새가 참 좋다. 대만유학시절 학기를 마치고 방학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먹고 싶은 음식이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였다. 그냥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된장만 풀어서 야채만 넣고 끓여도 집에서 된장찌개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든다. 보글보글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된장의 냄새와 김이 모락모락

그게 나일수도 있잖아, 따끈하게 샤부샤부 - ep.10

2025-04-17T04:44:31Z

아침 수영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의 좁은 인도를 걷는데 앞에 가시는 아주머니가 자꾸 내가 가려는 길을 막았다. 전화 통화를 하시면서 걷는데 내가 왼쪽으로 가려고 하면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비켜가려고 하면 다시 오른쪽으로 갔다. 삐뚤 배뚤 걷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 진짜! 마음이 삐뚤빼뚤하신가 걸음을 왜

사랑받는다는 느낌, 스팸덮밥 - ep.09

2025-04-19T04:42:25Z

주말 나들이를 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이든 딸아이를 신랑이 안아서 집 침대에 살포시 눕혀준다. 아빠에게 안겨 가는 딸아이의 얼굴만 보아도 나는 알 수 있다. 잠이 든 상태인지, 잠이 깬 상태인지. 어릴 때야 달랑 안아서 눕혀도 깊은 잠에서 잘 깨지 않았지만, 이제 140센티에 30킬로인 딸내미가 잠에서 깨지 않게 살포시 안기에는 신랑도, 안겨있는 딸아이

조건 없이 행복하라, 쫄깃 보들 수제비 - ep. 08

2025-04-14T02:19:13Z

먹고 싶었던 음식을 배불리 먹었을 때. 내가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쥐었을 때. 내가 이루고 싶었던 일들을 이루어 냈을 때. 그때마다 나는 만족하며 살아간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허기짐은 끊임없이 나를 허기지게 했고, 그 허기짐은 나를 더 외롭고 공허하게 만들었다. 갖고 싶은 것들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갈구하면서, 정작 그것들이 내 손에 들어

폭싹 속았수다, 닭다리 간장조림 - ep. 07

2025-04-08T06:18:37Z

그땐 몰랐다. 내가 먹은 그 모든 음식들이 엄마의 '수고'였다는 것을.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수고스러움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그저 살아왔던 것 같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그 모든 음식들 속에 그녀의 사랑과 노력, 그리고 헌신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때는 완전히 알지 못했다. 갖가지 재료들로 딸아이의 이유식을 만들 때였다. 예전 같았으면 손질되어 있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닌 망각, 일본식 카레라이스 - ep.06

2025-04-04T12:58:15Z

딸아이가 하교한 뒤 학원에 가고 나면 나에게 정확히 1시간 50분의 시간이 생긴다. 집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누워버릴 것 같아서 키보드와 수첩을 챙겨 집 근처 스타벅스로 왔다. 벚꽃이 만개할 때 스타벅스 옆에 있는 가로수의 벚꽃들을 보며 커피 한잔 마시려고 아껴두었던 스타벅스 커피쿠폰으로 따뜻한 드립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2층으로 올라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진짜 전 같아. - ep.05

2025-04-04T22:58:52Z

매화를 시작으로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곳곳에 만개하고 있다. 유독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이제 겨우 봄이 오나 싶었는데, 3월에 눈이 오고 전국 곳곳에 난 산불로 슬픔이 재처럼 흩날리는 나날들이다. 꽃이 만개한 모습보다 너무 빨리 떨어진 꽃잎들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사람들의 발길에 짓이겨져 갈색으로 변해버린 커다란 목련잎에 자꾸만 내 시선이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지, 가지구이 덮밥 - EP.04

2025-03-28T01:31:12Z

어렸을 때 엄마가 가지로 나물을 해주면 난 코를 찡긋 찌푸리며 "윽, 가지 싫어 물컹거려서."라며 손도 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번 맛본 가지나물은 속살은 물컹이는데 보라색과 검은색 그 어디쯤인 껍질을 씹으면 뽀드득거리는 이상한 식감이 싫었다. 일단 색깔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쭈욱 가지와 거리 두기를 하던 나는 대만에서 생

손맛도 유전일까? 나는야 불고기 마스터 - ep.03

2025-03-24T21:48:25Z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부산에서 김해로 이사를 왔다. 김해에서 아빠와 엄마는 돼지갈비 식당을 시작했다. 식당이름은 "초원의 집"이었다. 빨간색 바탕의 간판에 쓰여있는 초록색 초원의 집 글자가 나는 왠지 슬퍼 보였다. 초원에서 뛰어놀아야 하는 돼지들이 어쩌다 불판 위에 올라와서 굽히는 운명이 되었을까.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불판위라니. 어쨌든 장사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지, 갈치 고등어 생선조림을 할 때 - ep.02

2025-04-29T03:07:13Z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0대 때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소설책들이 요즘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양자물리학이나 철학서들의 내용이 내 마음에 더 와닿는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책을 읽어보려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그녀의 노벨 문학상 수상소감을 듣고서 그녀의 책이 너무나 궁금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까지 읽고

귀찮을 때 원샷원킬, 족발식감 무수분 수육 - ep.01

2025-03-17T21:46:23Z

3월은 봄의 문턱에서 추위가 찾아왔다가 다시 따스함이 몰려오기를 반복하는 계절인듯하다. 따스한 봄이 찾아온 것 같아 옷차림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러나 다시 부는 강한 찬바람에 겨울옷을 꺼내 입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학기 초 적응기간의 긴장과 설렘으로 인해 감기에 걸린 아이들이 부쩍 더 많아졌다. 딸아이도 주말 동안 감기기운이 몰려오는 듯했으나 그래도 이

우리 오늘 뭐 먹지? - 프롤로그

2025-03-15T12:54:20Z

여기 이제 막 만남을 시작한 연인이 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순간들에는 항상 음식이 있다. 두 연인은 데이트를 약속하며 서로에게 묻는다. "우리 오늘 뭐 먹지?" 서로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음식메뉴들이 스쳐 지나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메뉴를 정하고 음식을 먹으며 함께 서로를 탐색한다. 그 연인은 어느덧 결혼 9년 차 부부가 되었다.

시작과 끝 - 에필로그

2025-02-21T04:15:08Z

나의 시작과 끝은 모두 사랑이다. 내 존재의 시작도 사랑이었으며 내 존재의 끝도 사랑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과 끝을 구분 짓는 것은 나에게 이제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오로지 나의 여정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그 여정 속에서 늘 사랑이 함께 할 것이다. 뭔 놈의 세상이 다 100대 1이야. 나머지 아흔아홉 명은 어떻게 하라고.- 드라마 <자체

사는 게 재미없을 때 - ep.08

2025-02-19T00:14:04Z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아무 이유도 없이 깔깔거리며 웃었던 그때가 생각났다. 함께 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동시에 멈췄을 때, 서로의 눈을 보며 그저 좋아 까르르 웃어대던 그때가 문득 그리웠다. 그때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웠을까? 아니면 내가 즐거웠던 순간들만 기억하는 것일까? 그런 것 일 수도 있겠다. 학교 시험기간을 버텨내는 것, 매일 같은

작은 희망 - ep.07

2025-02-13T08:18:50Z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되던 해, 드디어 법적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청소년기였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많이 벌어서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을 가진채 어른이 되었지만 내가 상상했던 것과 현실은 아주 달랐다. 식당 아르바이트, 일식집 아르바이트, 옷가게, 마트나 백화점 행사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 - ep.06

2025-02-11T09:41:11Z

고등학교 졸업 후 마트와 백화점 행사 아르바이트를 꽤 오래 했다. 그 당시 나에게 하루일당 8~10만 원이면 아주 큰돈이었고 보통 한 제품 행사를 하면 일주일에서 보름정도 진행되었다. 와인부터 시작해 양주, 면도기, 버섯선물세트, 삼성카메라, 듀라셀 건전지등 갖가지 제품들을 판매했다. 김해, 부산 일대의 대형마트는 거의 다 다녀본 듯하다. 처음 판매했던 제

유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