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형 터널 #6

2025-05-01T12:20:18Z

11. 의사는 여자에게 부분 기억상실이라고 전했다. 복합성 부분 기억상실이라 장기 기억의 일부와 단기 기억의 일부가 상실됐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병실에 누워있는 여자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고요한 병실에서 멍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병원에서는 이중추돌사고가 있었다고 했지만 여자는 기억해 낼 수

나선형 터널 #5

2025-04-28T00:30:05Z

9. 여자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가 자신의 옆자리를 오랜 시간 지키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잘 잤어요 언니? 여자는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사람처럼 개운함을 느꼈다. 동시에 일말의 해방감 같은 것도. 얼마나 잤니? 다섯 시간 정도요. 어때요. 몸이 한결 가볍죠? 그녀의 물음에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하얀 종이가

나선형 터널 #4

2025-04-27T21:40:36Z

7. 동년배의 그녀는 여자가 가진 불면의 원인이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부터 동년배의 그녀는 여자에게 언니라는 칭호를 붙였다. 동년배에게 언니라고 불리는 게 좀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서로를 칭하는 호칭이 마땅치가 않아서 여자는 끝내 침묵으로 승인했다. 언니 잠을 잘 못 자죠? 언제부터에요? 으응. 잠이 들면 이상한 꿈을 꿔서. 머릿속에서 알

나선형 터널 #3

2025-04-27T21:40:02Z

5. 병실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옆자리의 모녀가 입실했을 때부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4인 병실에는 얼마 전 뇌출혈 수술을 받은 60대 여성과 그녀를 간호하는 딸이 입실했다. 60대 여성은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거동할 수 조차 없었고 왼쪽 얼굴이 마비되어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딸은 여자와 동년배처럼

나선형 터널 #2

2025-04-27T21:39:26Z

3. 먹장구름에서는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여자는 우산을 챙겨서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었다. 비 오는 날 초행길을 헤맨다는 것이 여자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여자는 택시를 잡아 황급히 타고는 남자가 알려준 주소를 기사에게 알려주었다. 기사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는 여자에게 약간은 곤란하다는 어조

나선형 터널 #1

2025-04-27T21:38:43Z

1. 사각사각. 참외 껍데기를 깎는 소리가 병실의 적요를 갈라놓았다. 참외는 누군가 주삿바늘을 꽂았던 것처럼 군데군데 검은 점이 박혀있었다. 그것이 과일의 당도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여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암담한 바다의 밑바닥에 서식하는 석화처럼 굳게 다문 여자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호흡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여자가 아버지에게 참외를 먹여야겠다고 마음

눈동자를 잃어버린 여인 #3

2025-03-31T01:32:22Z

7. 이제 그날을 이야기해야지. 그날도 어김없이 너의 집에서는 너의 비명과 소음들이 들려왔어. 그러다 갑자기 흐르는 시간 위로 고요가 묵직하게 내려앉았지.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중력을 거슬러 무거운 적요를 깨트린 건 다름 아닌 우리 집 초인종 소리였어. 그 소리는 어두운 허공에 발길질을 하는 것처럼 폭력적으로 울렸어. 나는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현관

눈동자를 잃어버린 여인 #2

2025-03-30T20:56:14Z

4. 기억나니? 그날 이후로 너와 나는 종종 아파트 복도나 엘리베이터, 단지 안 놀이터에서 마주치고는 했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나를 향한 너의 마음을 볕이 잘 드는 양지로 이끌었는지도 몰라. 그것은 신의 계시였겠지. 아마 우리는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평생 서로를 찾아다니는 반쪽짜리 인간이었을 거야. 딱한 사정을 유심히 지켜보던 신이 자비를

눈동자를 잃어버린 여인 #1

2025-03-30T20:54:33Z

1.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그래. 내가 선우의 결혼식장에 간 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 나를 그렇게 버려놓고 결혼을 하다니. 그 자식의 주먹과 발길질로 길들여진 난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어. 아니 벗어날 수 없었다기보다 일부러 벗어나지 않았어. 그가 나를 건드리지 않는 날에는 오히려 내가 더 불안에 떨었으니까. 난 선우의 결혼식에 가서 주례

악취 #4

2025-03-24T01:41:38Z

16. 연재 중인 소설이 결말로 치닫고 있을 때 또 그 사람의 댓글이 달렸다. 조회수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더 이상 구독료를 내는 독자는 없었다. 이번 회차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잘 포착한 것 같습니다. 독자로서 아주 흡족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혹시 이 소설이 선생님 본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질은

악취 #3

2025-03-24T01:43:19Z

11. P와 함께 몇 병의 와인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얼마나 많은 양의 술을 마셨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지난밤의 내 기억은 경매에 부쳐진 싸구려 물품처럼 누군가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입찰가가 확정된 순간 경매사가 낙찰봉을 쾅쾅 두드리듯이 기억은 사라지고 두통으로 인한 둔탁한 진통만 남게 되었다. 물을 마시기 위

악취 #2

2025-03-24T09:46:52Z

6. 내가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만 없었으면 이었다. 그 문장은 태어나기 전부터 씌워진 저주처럼. 바다 건너 푸른 눈을 가진 죄인들에게 찍힌 씻을 수 없는 낙인처럼 내 영혼에 진하게 각인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임신한 뒤에 자취를 감추고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머니는 홀로 나를 출산해야만 했다. 내가 8살 때 어머니

악취 #1

2025-03-24T01:44:36Z

1. 내가 아내의 가슴을 좋아한 정확한 이유는 그 모양과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푸른 번개를 맞아서 생긴 전문電紋처럼 창백한 피부에 도드라진 파란 정맥이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에 새겨져 있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지방질 덩어리를 더욱 강조하는 여러 갈래의 파란 핏줄에 나는 매료되었다. 나는 아내의 가슴을 보고 제우스에게 간택당한 인간을 빼앗은 용맹한 전사처럼

너라는 존재 #3

2025-02-01T05:58:42Z

11. 그녀와 나는 정류장을 벗어나 조용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구석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선글라스를 낀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보이지는 않지만 내 얼굴을 포함해서 내 신체 구석구석 심지어 안에 있는 장기들과 신경 세포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관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

너라는 존재 #2

2025-01-29T07:20:19Z

6. 꿈을 꾼다. 시골집 앞에 홀로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는 불에 타서 거대한 숯덩이처럼 보인다. 생명력을 빼앗긴 그 검은 나무 가지들은 마른바람에 흔들려 곧 부러지기라도 할 듯 휘청대며 볼품없는 실루엣을 드러낸다. 나무 밑에는 누군가 땅을 파놓았다. 사람 한 명이 눕기 좋은 크기의 구덩이다. 나는 그 구덩이 쪽으로 다가가서 쪼그려 앉아 그 구덩이를 유심히

너라는 존재 #1

2025-01-29T07:03:49Z

1. 가끔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 속해서는 안된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뒤틀리고 굴곡된 이 세계에 어떻게든 안착하기 위해서 유동적으로 자신의 틀을 변화시켜서 끼워 맞추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의 지면이 그려놓은 테두리에서 외면당한다고 느낄 때에는 더 이상 이 세계에 발 붙이고 살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죽어버릴 수는 없

구토 2024 #7

2024-12-24T21:59:54Z

전화를 끊자마자 구토를 했다. 갑자기 밀려오는 구토 때문에 억지로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뛰어갔다. 다행히 객실 바닥은 더러워지지 않았지만 내 손과 입고 있던 상의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전화를 받으면 늘 구토를 한다. 전화기 속 남자가 심령처럼 내가 있는 쪽으로 넘어와 내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구토를 유발하게 하는 것 같았다. 구토와 불길한 사내가 어떤 연관

구토 2024 #6

2024-12-01T08:33:07Z

전화는 하루에 두 번씩 걸려 왔다. 정확한 시간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오전과 밤에 전화가 걸려 왔다. 늘 처음 보는 번호였고 사내는 항상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만 부르고 전화를 끊었다. 신기한 건 내가 사람들과 있거나 친구들의 아내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그때마다 전화를 거는 것이다. 그래서

구토 2024 #5

2024-12-01T08:32:51Z

아침에는 늘 개운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수면장애도 없을뿐더러 현재 살고 있는 집은 건물에 꼭대기 층이어서 층간 소음도 없기 때문이다. 맑은 정신에 가벼운 몸으로 기상하는 것은 하루의 시작을 기분 좋게 만든다. 숙면이 삶의 질을 올려주는 것은 확실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침구류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비구름이 물러간 파란 하늘에 시선을 두고 창문을

구토 2024 #4

2024-12-01T08:32:35Z

눈을 떠보니 다행히도 나는 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굳게 닫힌 커튼 틈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보니 아침까지 술을 마신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실 한복판에는 세 개의 맥주캔과 두 개의 빈 소주병과 글렌 모렌지 빈 병 하나가 나란히 줄지어서 나를 반겼다. 왼쪽부터 맥주캔이 있었으니 어제는 맥주를 마시고 다음으로 소주 그다음은 위스키 순서로

보림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