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2025-03-07T15:45:18Z

끓어 넘쳐 오르던 것들은 거품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이렇게 바닥에 고여 가만히, 가만히 달아오르던 것들은 수증기로 날아가고 우리는 이렇게 바라보며 가만히, 가만히 존재하였던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을 무심히 제 일 아닌 냥 바라보며 한 때 그 안에 담겼던 것은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네 그것으로 숨을 쉬고 그것으로 살아가던 그러니까 이를테면

생각 없이 산다

2025-02-27T21:06:50Z

가끔씩 생각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히곤 한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삶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삶을 끝내는 방향 같은 것. 몸은 기계처럼 내 하루의 루틴을 따라 움직이지만 어쩐지 생각은 아무 데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한다. 그러다 날아가 흩어지거나 더 무겁게 가라앉아 온 군데 다 묻어버리거나. 도망치려 해도 도망갈 곳이 없다. 이 소용돌이 안에서 돌고

남겨지는 이에게

2025-02-28T10:05:44Z

네가 울지 않았으면 한다. 방문 걸어 잠그고 어두운 곳에서 슬퍼하지 않았으면 한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결국 혼자라며 무너지는 일 없길 바란다. 다가올 모든 것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언젠가는 무뎌진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한 시절에 매몰되지 않길 바란다. 염치없지만, 이다지도 많은 것을 네게 바란다. 끼니를 모두 챙길 수는 없겠지만

물들어 가는 일

2025-03-02T10:43:02Z

다시 사랑한다면 농도가 맞는 사람이었으면 해 짙게 나를 물들여서 흥건히 젖어버린 내 마음이 네 작은 손짓에도 찢어지는 일 없게 옅게 나를 물들여서 그곳에 자리한 우리 사랑이 안녕한지 자꾸 들여다보는 일 없게 서로가 서로에게 같은 농도로 번져갔으면 해 너무나 짙어서 모든 걸 덮어 나를 잃어버리는 일 없게 너무나 옅어서 네가 다녀간 흔적조차 남지 않는 일

안녕, 안녕.

2025-02-26T21:10:00Z

코끝이 알싸해지는 것은 매운바람이 불어서 그런 것이었으리라. 다른 어떤 이유는 없다. 단지 바람 때문이었다. 심장이 쿵, 제 자리를 잃었다. 분명 몸통 여기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더듬더듬 만져보아도 두근거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멎어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부시게 내리쬐는 빛에 일순간 앞이 뿌예졌고 몽글한 눈물이 샘솟았다. 아니면

썩어진 너는 무슨 맛이 날까

2025-02-19T12:58:40Z

사진조차 없는 그 얼굴을 잊을까 하여 매일 밤 흰 천장에 그려보기를 여러 날이었다. 함께한 날보다 시간이 더 지나버렸다. 이대로라면 길을 가다 마주친다 해도 알아볼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럼 나는 너를 잊은 걸까, 잊지 못한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누구이며, 혹은 무엇일까. 당신만은 미동 없이 심장에 박혀있다. 문득 얼척없이 그리워지는 날이 있고 가끔

당신은 나로 인해

2025-02-16T13:13:49Z

당신의 가지 끝에 걸터앉을까 생각해 보았지요 끝자락부터 스며들까 해보았지요 이미 뿌리부터 썩어가고 있는 당신인 줄 모르고 바람이라도 되어 간질여 주고팠지요 당신이 썩어진 채 사는 줄도 모르고 알량한 위로라도 되어주고팠지요 나는 당신을 위해 살지 않을 것임에도 당신은 나로 인해 살고 싶게끔 만들고 싶었지요

슬픔 뒤에 이는 허기

2025-02-14T10:00:38Z

슬픔 뒤에 이는 허기를 좋아한다. 때가 되면 이는 허기는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힘겹더라도 밥 한술 뜨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다시금 일상으로 스며든다. 슬픔은 슬픔이고 상실은 상실이니까. 남겨진 자들에게는 살아야 할 생이 있으니까. 내 생의 첫 장례식은 20대 중반 무렵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TV에서나 보던 검정

독백

2025-02-12T06:16:27Z

툭- 하고 끈이 끊어진다. 이제부터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건너 마침내 나의 어느 한 면에 붉고 커다란 엑스 표를 긋고 이내 그 위를 검정으로 새카맣게 덮어버린다. 이제부터 이곳은 죽은 곳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홀로 남았다. 마침내 바래왔던 끝이 보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드디어 손만 뻗으면 가닿을

연분홍

2025-02-16T12:43:13Z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할매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연분홍 꽃빛 치마 두르고 어느 구름 타고 어느 무지개를 건너 사뿐사뿐 가고 있을까 내 할매는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확신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내드린 것이다 못내 사무치는 것은 가슴속 한이 서린 수십 년이 아니라 이미 장성한 자식새끼들이었을 그 짐을 우리가

가해자

2025-02-11T01:53:23Z

인생은 씁쓸하였다. 사는 것은 기름칠한 기둥에 오르는 것과 같았고 때때로 연필 뒤꽁무니를 씹는 듯한 맛이 났다. 살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면 살았던 날들이 간절해질 것이 분명했지만 사는 동안은 사는 것에 미련이 없었다. 버려지는 빗방울과도 같았다. * 퍼부어지는 사랑에 젖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당신이 마르고 난 뒤에야 빠끔히 눈을 떠 땅에

낮의 뒷면

2025-02-05T12:25:12Z

지독히도 잠들 수 없는 밤이 있다. 멈춘 듯 흐르는 시간에 짓눌려 잠들 때까지 마냥 누워있지도 못하고 영화를 볼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없는 밤. 막연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껴지고 지나간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밤. 잘못 산 듯 잘못 살지 않은 삶에 대해 자꾸만 곱씹게 되는 밤. 냉장고에 묵혀둔 캔 맥주를 단숨에 마시고 뻗어버리고 싶지만 술에게 나

너의 빛깔

2025-02-16T12:43:29Z

찢고 들어와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보고 사랑인가 하였다 붉게 흘러 물들어 검어지는 것을 보고 사랑인가 하였다 찢어진 곳에 딱지가 내려앉고 몇 날 며칠 밤을 홀로 견디어도 그것 역시 사랑인가 하였다 검붉다는 단어는 그래 아마도 이 감정에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검붉은 사랑을 겪었기에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가로등과 달

2025-01-30T10:15:08Z

가로등을 달이라고 착각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캄캄한 밤에 둥근 달님 오신 줄 알고 막막한 밤에 둥근 달님 함께하는 줄 알고 잠시 반가웠다가 잠시 외롭지 않았다가 사실은 차오를 줄도 비워질 줄도 모르는 멍청한 가로등임을 알게 된 후 일순간 얼마나 허망했던가. 어두운 내 마음에 빛 비추러 온

보란 듯이

2025-02-16T14:56:09Z

사랑했던 날과 사랑하지 않는 날의 사이에서 아, 아마 나는 모든 것을 잃었는지도 몰라 그때 내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모든 기억이 알알이 추억으로 자리 잡아서 잠시 그것들을 꼭 쥐고 있다가 지나간 향기를 좇던 날마저 지나 아, 나는 이제 얼마든지 더 망가져도 좋아 사랑 없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비와 목말

2025-01-29T05:27:30Z

내 아비는 나를 목말 태울 수 없을 정도로 늙어졌고 나는 그 위에 올라탈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다. 떨어지지 않게 손을 꼭 붙잡고 출발하는 아빠 말과 쫑알쫑알 조종하며 갈 길을 이르는 아이 말을 보며 처음 당신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탔던 그 시점부터 나는 당신을 짓누르는 짐은 아니었을까 한다. 늙어지고 늙어져도 나를 내려놓을 줄 모르고 자라나고 자라나도

당신도 나와 같음을

2025-01-29T04:23:11Z

김남숙 작가님의 가만한 지옥에서 산다는 것을 읽고,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한 작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3개의 글만을 읽었을 뿐인데 당신도 나와 같음을 느꼈다. 연락처가 있다면, 댓글이라도 달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당신을 향한 나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힘든 시기를 지나오며 가장 위로가 됐던 건 술도, 음악도, 그 무엇

초록의 고백

2025-01-29T05:06:07Z

유난히 빨리 자라는 손톱이 있고 유난히 빨리 자라는 마음이 있다. 너는, 다리 한구석에 자리 잡은 멍이고 눈 속에 들어간 속눈썹 한 올이고 긁은 적 없는 모기에게 물린 곳이며 미처 눈치채지 못한 손등의 상처이다. 언제 찢고 들어와 자리했는지 모르나 자각하니 이토록 아프다. 골목길을 지나는 개 한 마리의 갑작스러운 짖음이 온 동네 개들의 잠을 깨워 짖게

사랑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고 - 우리는 서로를 현명하게 만들지

2025-02-13T07:53:10Z

있잖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넌 어느 때로 돌아갈래? 생을 흔드는 그런 보상 말고 아주 약간의 보상만을 감당해 내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그럼,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생을 톺아볼 수 있겠지? 하늘 위에서 어미아비를 고르던 때로 돌아갈까, 아니면 인생의 중요한 시점 시점마다로 돌아갈까. 난 있잖아. 널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아갈래. 하

증인

2025-01-28T10:21:57Z

운전 연수를 받은 이후 혼자 떠나는 여행에 미쳐있던 때가 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생각지도 않았다. 무조건 차를 빌려서 멀리멀리. 서울에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파주, 김포, 영종도, 강화도, 강릉, 속초, 영덕 등지를 부지런히 다녔다. 떠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던 때가 있었다. 흐르는 시간은 조금씩 나를 잠식해 왔고 마음은 물에 젖은 수건 같아졌다. 도

윤한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