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數)가 보인다

2025-05-01T05:14:57Z

20여 년이 훌쩍 넘게 몸 담고 있는 한 모임에 평균 연령이 60세를 넘는다 70대 전후반의 대 선배님들이라 존함을 칭하기도 어려운 이 분들을 나는 감히 원로친구라 이름한다. 분야에서는 물론, 만날 때마다 한 수 배우고 깨닫고 돌아오기 때문이다. 모임에 젊은이들이 없다 보니 올해 초 원래의 직분을 자진 사퇴하고 사무국장일을 맡게 되었다. 워낙 고령이다 보

슬플 때 봄을 훔치는 여자.

2025-04-30T15:08:29Z

소원했던 시간들위로도 세월은 무심히 쌓여만가고 사람들 사이에서 복닥이면서도 한줄기 빈터는 늘 있는 법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면 마른 지붕들 위로도 이미 봄입니다. 놓아주지 않으려 마지막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미 겨울은 무기력하고 좀처럼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계절은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꽃을 피웁니다. 저 꽃 한 가지 고스란히 꺾어다

안녕! - 3월의 꽃바람 속에 그녀를 보내며.

2025-04-16T22:50:48Z

지긋한 연배를 살고 계신 네 분의 선배님들과 사진공부로 만나 20년을 훌쩍 넘겨 만년 총무를 자처하며 교분을 쌓아 오늘에 이르렀다. 고희를 넘긴 그녀들은 세상에 많은 관계가 있지만 이렇게 흉 허물없이 맘 터놓고 지낼 수 있는 관계가 흔한 건 아니라며 정기모임에 빠지지 않는 건 물론이요, 좋은 일 궂은일 챙겨가며 한 번이라도 더 자주 보고 싶어 하면서 서로를

내 사랑아

2025-04-16T12:57:01Z

봄 볕 한 줄기 큐피드 화살되어 내 창가에 사랑 두 개 피워놓았다 반백년을 살아도 햇살 한 줌 보다 못한 당신과 내 심장.

경칩절에 시한편을 읽다가...

2025-03-08T07:56:14Z

찻물을 올려놓았는데 커피가 떨어졌다. 맨발에 얇은 스웨터 한 자락 걸치고 새벽 찬 바람에 종종걸음으로 나가서 커피 한통을 사들고 왔다. 어제 종일 내리던 비가 새벽까지 내렸는지 아침 공기가 시리다. 어느새 입춘도 우수도 지나 경칩절. 어릴 적, 농군인 아버지를 두었던 탓에, 늘 돋보기 너머로 책력을 보시던 아버지 곁에서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절기에 관한

설날 스케치

2025-02-14T16:05:02Z

명절 음식 준비 첫날 기본양념부터 빠진 것이 없나 체크하고 야채는 다듬어 씻고 물기 빼서 손질해 놓고 파 마늘 같은 갖은양념은 다지고 갈아서 준비해 놓는 일부터 시작했다. 엿길금을 사다가 식혜부터 만들어 살얼음으로 얼려두고 꼬맹이들에게 체험시킬 만두소도 신경 써서 만들어 두었다. 연근 강판에 갈아서 새우랑 마늘종 다져 넣고 반죽하고, 구색 맞춰 표고랑 대구

삶에도, 이정표 있다면

2025-01-24T13:17:22Z

첩첩산중 혹한의 눈보라 속에서 너를 만났지. 앞을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던 그때 선연했던 방향표지를 마주하고서 내 사는 일에도 이정표 하나쯤 새겨져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소리쳐 울고 싶었지. 굽이진 산길을 돌아 고개를 하나씩 넘을 때마다 불안하고 막막했던, 미끄러지고 넘어질세라 노심초사 내딛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오늘이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이정

첫눈 오던 날

2025-03-06T00:09:44Z

오랜만의 평화다. 며칠 남지 않은 한 해를 마주하고도 이만큼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 같은 날들이 있었다. 감히 꿈이란 걸 꾸어볼 생각조차 못 하고 살다가 어른이 되었고, 유독 세상 다양한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보는 것마다 해보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급기야 마음먹은 대로 하나씩 이루어보리라 다짐 같은 걸 했었지 싶다.

선물 같은 하루

2025-01-13T04:01:24Z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서소문 근처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햇살은 눈부시고 공기는 달큰하고 길 건너편 이화여고 가는 길로 유난히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몇 그루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 색이 너무 고와서 내친김에 그쪽까지 가보고 다시 정동길로 발길을 돌려 계획에 없던 산책을 했다. 보통 11월 초부터는 제법 색 고운 단풍을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나뭇잎들이

낮아지는 계절 - 순리대로 살기

2024-11-22T13:08:23Z

가을은 하염없이 낮아지는 계절이다. 살아서 나풀거리던 모든 것들이 아래를 향하고 그리하여 계절을 한 바퀴 돌아 제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힘차게 하늘을 날던 곤충들도 차츰 낮아져 풀숲에 눕고 햇볕을 향해 반짝이던 나뭇잎들도 마지막 제빛을 다하고 떨어져 눕는다. 그것을 순리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가는 그 시간이 결코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갓 떨

가을 아침

2024-11-18T04:19:00Z

이 아름다운 아침을 보고자 밤새 달려 이 먼 곳까지 왔다. 실로 오랜만에 풀숲을 헤치고 새벽이슬을 밟으며 동이 트기 전의 호수를 만나고 안갯속에 서서 뿌옇게 밝아오는 여명과 고요한 반영과 세상이 깨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아침을 맞는다. 이슬은 발을 적시고 안개는 마음을 휘감고 차가운 정신은 시린 기억과 열정을 부리던 때의 그리움이 피어나 벅차고 눈물겹다

Rose

2025-02-12T14:03:52Z

어쩌면 저렇듯 원형 속에첩첩의 조화를 가지고 있으며 어쩌면 저렇게도탕진되지 않는 신비를간직하고 있을 수 있을까?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에..장미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완벽한아름다운 자태를 이루는 시간은불과 20초라고 들었다. 그 20초 동안 아름답기 위하여장미는 기나긴 어둠의 시간과 싸우고가시와 싸우고 토양과 싸운다. 20초

세상살이의 허(虛)

2024-10-18T10:19:15Z

실망을 본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흔들이 낭자한데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하지 못한 자들이 이해와 너그러움을 논한다. 비극이다. 방금 제게 일어난 작은 일도 용서하지 못하고 주변에 너그럽지 못한 자들이 그릇보다 크고 거국적인 일을 논하며 비판에 열을 올린다. 세상에 떠도는 뭇 일들에 대해 무엇이든 다 헤아리고 용서한 척할 수 있는 건 자신과는

어머니와 오이지

2024-12-08T15:47:23Z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방안공기가 오슬 하다. 아이들은 늦은 귀가에 밤샘 컴퓨터를 했는지, 컴퓨터 책상이며 거실탁이며 식탁 위까지 이것저것 꺼내 먹고 치우지 않아 지저분하다. 늦잠에 빠져있는 식구들 방을 한 바퀴 돌며 창문을 닫아주고 잠자리를 다독여 주는 일로 주일 아침을 시작했다. 곤한 모습 속에 깃든 착한 표정들을 한 번씩 어루만져보며 여리디 여

보란듯 살기

2025-01-05T15:30:41Z

나팔꽃 달개비 민들레 같은 흔한 풀씨들이 날아와 수채구멍이나 돌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보란 듯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고 거들떠보는이 없이도 척박한 그곳에서 제 생을 다 할 때까지 꿋꿋하다. 그 거침없는 자기애가 눈물겨워서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한 포기라 할지라도 나는 매냥, 그 앞에 머리를

따로 또 같이

2024-09-25T22:36:46Z

우리는 애초에 자기만의 색을 지닌 존재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도 나란히 그것을 인정하고, 감싸주고, 보담아 주고, 그리하여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의 날개가 되어주는 일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Red, 뜨겁게 바라보기

2024-09-24T10:05:30Z

하늘은 높고 햇살은 마냥 따가운 날 하필 시선으로 Red가 자꾸 들어옵니다. 골목 막다른 집 앞에서, 때 이르게 물고추를 가득 널어놓은 풍경을 만났습니다. 빛깔 곱게 널려있는 마당 안쪽으로, 반짝이는 장항아리들과 고무 화분들이 정겹습니다. 인기척을 내며 열린 대문을 빼꼼히 들여다보자, 후덕한 인상의 어머니께서 실내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들고 나오시다 저를 보

비록, 꿈일지라도

2024-09-24T08:42:29Z

아직도 바다를 꿈꾸고 있니? 잘리고 헤쳐진 몸통을 매달고 어찌 저리 맑은 눈을 하고 있는지. 어쩌면 우리는 소멸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포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스치고 지나는 순간의 모든 것들이 사소하나 근원이 되는 무한의 힘이 될 때가 있다. 비록 이루지 못한다 해도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가자미 미역국으로 원기회복을

2025-02-24T10:11:33Z

어제까지 열대야로 잠을 설치며 덥단 소리를 달고 살았다. 종일 비가 내렸고 저녁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길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모두가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무탈하게 여름나기 하느라 수고 했다며 덕남을 나누고 헤어졌다. 에어컨 가동 이틀 만에 감기에 걸려 8월 한 달을 고생했다. 목이 붓고 염증이 심해서 이비인후과를 다니며 항생제를

불일암(佛日庵) 무소유길을 걷다.

2024-09-21T03:03:13Z

불일암을 오르던 날,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치고 싱그러운 산에 운무가 내려앉았다. 푸른 잎들이 저마다 손짓을 하며 방긋 웃음을 웃는다. 송광사에서 암자로 가는 길은 <무소유길>로 한가로운 오솔길을 따라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1km 남짓 된다. 빗방울 맺힌 잎들과 드믄드믄 피어있는 키 작은 풀꽃들과 고목에 핀 촉촉한 이끼들까지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