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구멍 - 사소한 아픔은 없나 봐

2025-04-28T11:55:51Z

처음 보는 길이 생겼다. "저게 뭐지." 붉은 녀석이 밖을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안으로 찬바람이 불어든다. 생겨나서는 안 될 길이었다. 서둘러 하얀 덮개를 얹어 길을 막았다. 다음날, 조심스레 덮개를 걷어냈다. 길이 열리는 순간, 입구에서 기다리던 노란 녀석들이 순식간에 탈출했다. 일주일 전부터 팔을 구부

빨간 비니 - 그녀의 마음도, 내 마음도 감싸주는

2025-04-27T14:34:12Z

사람이 살이 있을 때 그 몸은 유약하고 죽으면 굳고 강직해진다.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에 속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에 속한다. 「 도덕경 / 노자 」 후웁. 매트 위에 누운 뒤 몸을 돌렸다. '배에 물이 더 차오른 걸까. 폐에 물이 찬 건가.' 오늘따라 숨이 가쁘다. 다시 몸을 돌려 눕고선 노랗게 바래진 천장을 바라봤다. 지각생이라도

짙은 파랑, 짙은 주황 - 주저함 속에 빛나는 용기

2025-04-24T13:09:40Z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 김영하 」 2주 전. 집에서 멀지 않은 작은

진짜 느리다니까 - 너무 소중해서.

2025-04-23T10:49:01Z

무심코 휴대폰을 열어 네이버앱을 켰다. < 재미로 보는 사주 - 태어난 시간별 타고난 성격 > 화면을 넘기려다 괜스레 호기심이 일어 화면을 눌렀다. 태어난 시간은 밤 아홉 시 사십 분. 슥슥 아래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흐릿한 글자들 사이에서 한 문장만이 선명해졌다. -행동은 느리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영리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

다크서클 - 천천히 오래오래 늙어가고 싶다

2025-04-23T13:54:20Z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 모든 순간은 의미가 있었다

2025-04-22T06:45:28Z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벵이는 굴렀는데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새해 첫 기적 / 반 칠환 > 나는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조용한 아이였다. 엄마와 길을 걷다 지인을 마주치면 엄마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 고개만 내민 채 인사를 하곤 했다. 학기가 될 때마다 새 친구를 사귀는 일

반려행복 - 길들이기 대작전

2025-04-21T12:36:04Z

"영화의 꿈을 꾸던 시절, 나는 온갖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를 찾아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는 보통 그것이 있었다. <굴곡>."- 배우 / 작가 박정민 -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밤이면, 영상을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는다. 자장가 대신,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스르륵 잠들곤 한다. 긴 어둠이 이어지던 어젯밤. 차가운 밤을

게임 - 레어템은 이미 내 손안에 있었어

2025-04-19T00:39:30Z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의 이유 / 김영하 」 동네에는 바래진 빨간 간판을 단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 문을 열기까지 30분이나 남았지만, 이미 가게 앞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루다씨 - 수천 번 루다라고 불려도, 나는 루고니까

2025-04-18T12:45:32Z

나는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어떻게든 완성이 되는 형태여야 하겠지만.완성처럼 보이는 미완성이어야 하겠지만.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좋았다.이어지지 않은 것들은 끊어지지도 않으니까.완성보다 미완성이 더 오래 지속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종결되지 않은 것들이 내 주변을 행성처럼 돌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하다고.「 나주에 대하여 / 김

곰돌이푸 - 옷은 한 벌이면 충분하지?

2025-04-17T03:45:33Z

어딘가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기어이 마음을 헤집어놓는 것들. 사진첩을 덮습니다. 옷장 깊숙이 그것을 감추려다 원래 놓여 있던 자리에 그대로 올려둡니다. 언젠가 또 우리는 그것을 펼치겠지요. 우리 삶에서 가장 돌아가고 싶은 한 순간을 그리면서요.「 두고 온 여름 / 성해나 」 새벽 두 시. 손이 뻐근하다. '안 좋은 걸 했었나..?' 하루를 어떻

동치미 - 맛없는 하루가, 맛있어지는

2025-04-16T00:53:00Z

'가만히 보면, 모두가 의외로 살아 있다.' ⋯살고는 있구나. 굉장히 의외지만 다들 살아 있긴 하구나.죽지 못해 살더라도 살아는 있구나. 꽤나 큰 메리트다. 살아 있다는 것 말이다.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잠을 잘 수도 꿈을 꿀 수도 있다.

졸업사진 - 그저 예쁘고 싶었던

2025-04-15T13:14:00Z

루푸스는 치료제가 존재하지 않지만 증상 악화를 막기 위해서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약이 있다. 그것은 소론도라고 불리는 '스테로이드' 한 움큼의 스테로이드를 보고 있자면 아침밥을 먹기 전부터 이미 배가 불렀다. 작고 동그란 녀석은 보기와는 다르게 무서운 이면을 숨기고 있다. 관절 괴사, 백내장, 당뇨.. 읽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부작용 사이에서 가장

기침 - 가장 아프게 만든, 가장 작은 소리

2025-04-19T06:01:16Z

6시 30분. 익숙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끄고선, 늘 그랬듯 이불속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여기까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의 모습이었다. 단 한 가지를 빼고. 쿨럭하고, 기침이 새어 나왔다. 한 번의 조용한 소리였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일상을 뒤흔들지도 모를 태풍이 불어올 거라는 걸.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포일 박스 - 사실은 피자를 제일 좋아합니다

2025-04-16T15:46:20Z

베란다에 나가니 포일로 덮인 박스가 하나 놓여있었다. 들여다보니, 어젯밤 가족들이 시켜 먹고 남은 치킨 조각들이 들어있었다. 눅눅해진 기름 냄새사이로, 내가 빠진 저녁의 풍경이 스며있었다. 식탁 위를 오갔을 웃음소리와 따듯한 온기는, 나를 빼고 다녀간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줄곧 내게 이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넌 그거 먹으면 안 되잖아.

김밥도시락 - 잊고 말았던,

2025-04-12T07:14:38Z

지금 너는 행복이 두려운 거야. 도담아,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어.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 「 급류 」 정대건 며칠 전, 드라마 속에서 김밥 먹는 장면을 본 용이는 김밥을 싸달라며 어린아이처럼 아우성을 댔다. 종종 낚시를 떠나

꽃이 피지 않는 나무 - 피지 않아도, 나무는 나무니까

2025-04-11T12:31:16Z

아파트 단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한 나무만 빼고. 모두들 이미 봄이라는 무대에 오른 뒤, 초록 녹음의 피날레를 걷고 있는데, 혼자만 여전히 무대 뒤에 서있다. 겨울 모습 그대로, 앙상한 나뭇가지만 덩그러니 남긴 채. 그 나무를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는데 오늘은 문득 바라보다 눈물이 흘렀다. 봄이 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저마다 벚꽃을 피우고, 벚

별거 아니야 - 나는 여전히 아프지만, 나는 나니까

2025-04-14T04:35:59Z

인간의 인생은 별이 반짝이는 순간에 불과하다고 하지요.인생은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의 승리입니다.「 소중한 것은 모두 키친에서 배웠어 / 히야마다미 」 어김없이 울린 알람을 무심코 끄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잠결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고는 황급히 휴대폰을 들었다. 7시. '많이 지나진 않았구나' 안도하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아침부터 배가 묵직하다

프롤로그 - 오늘도 나는 나를 안아줍니다

2025-04-24T09:34:30Z

나는 매일 나를 안아준다 저는 열다섯 살에 루푸스라는 자가면역질환을 진단받았습니다.그리고 어느덧 서른한 살이 된 지금, 수많은 합병증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20대에는 관절염과 관절 변형으로 느린 시간을 보냈고, 30대가 되면서는 간과 신장 질환이 찾아왔습니다.장기 합병증이 생긴 후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조차 두려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줄다리기 - 침묵이라는 청팀과 해명이라는 백팀

2025-04-22T09:43:22Z

한 달 뒤 열릴 체육대회를 앞두고 반 친구들은 하루가 다르게 들떠 있었다. 유난히 우리 반은 체격 좋은 아이들이 많았다. 165센티에 55킬로였던 내가 '말랐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줄다리기마저 전략을 세우며 연습할 만큼 승부욕 강했던 아이들은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에 나갔고,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나만 남겨진 채. 루푸스는 햇빛을 받으면

계란프라이 - 열다섯의 봄, 나는 어른이 되었다.

2025-04-15T23:47:37Z

2008년, 열다섯 살. 새 학년이 되었다. 올해는 왠지 전 과목에서 100점을 받고, 전교 1등까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달콤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겨울의 찬바람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따스한 봄바람이 친구들의 바람막이를 하나둘 벗겨낼 무렵, 내 바람막이는 여전히 지퍼를 단단히 잠갔다. 매일 밤 찾아오는 오한은 그저 지독한 독감이 온 줄만 알았다. 깨

이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