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베개는 놓고 가요

2025-04-24T13:26:18Z

"잘 시간이야, 양치는 했니? 어서 불 끄고 눕자." 하루동안 바깥생활을 하며 겪었을 피로, 곤란함, 무례함을 모두 내려놓고 비누향이 나는 아이의 말간 얼굴을 부비며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다. "엄마, 죽을 때 베개는 놓고 가요." 유월이가 내 베개에 얼굴을 파묻더니 대뜸 던진 말이었다. 으응? 베개를 놓고 가라고? 그 말을 듣고는 순간 웃음이 났다가

마사지와 MSG - 달고나의 기술, 위로의 맛

2025-04-18T02:58:06Z

국자 하나로 동네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할머니는 단촐한 달고나 살림을 들고 나와 좌판을 깔았다. 하굣길, 좌판에 놓인 낡은 국자와 설탕, 소다봉지 사이로 코를 찌르는 단내가 퍼진다. 그 곁을 지나며 힐끗 보던 유월이가 운을 뗐다. "엄마 저거 먹고 싶어요." 버너불에 노랗게 녹아가던 설탕 덩어리는 점점 갈색빛으로 변해가며, 하교하는 아이들의 주머

아무 글이나 일단 써 -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2025-04-13T09:29:28Z

잡문집섞일 잡 (雜) : 여러 가지, 다양한글월 문 (文) : 글, 글쓰기모을 집 (集) : 모음, 모아 놓은 것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잡문집을 하나씩 만드세요." 6개월 전, 글쓰기 강의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왜인지 나는 '잡'이라는 한 글자에 발이 탁 걸렸다. 잡. 잡스럽다. 잡다하다. 잡탕. 잡것. 어째 어감이 하나같이

어쩌다 심부름 같은 걸 하고 있을까.

2025-04-07T11:54:47Z

그날 아침,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등교한 아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콜 포비아의 공포감은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가는 길에 무슨 일이 난 건가?' '사고가 난 건 아니겠지?' 아이는 준비물을 집에 두고 왔는데, 학교로 가져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숨을 꾹 참고 듣고 있다가 '준비물'이라는 단어

면접에 노쇼 했다

2025-03-31T16:51:15Z

대관절 내가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는 그랬다. 취업을 뽀갠다는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온몸으로 배운 세대랄까. 취업문을 부수고 통과하기 위해 인문대학 1층 건물에 위치했던 취업지원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릴 때면, 거의 본능적으로 허리와 고개가 숙여지고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이외에도 '추천서' 한 장이 필요했던 시절이라

드레스코드, 블랙

2025-03-27T13:12:58Z

절기상 춘분이 지나도록 아침공기는 여전히 싸늘하지만, 한낮의 햇살은 거실창을 통해 바닥에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말도 없이 민첩하고 확실하게 봄이 온 것이다.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남동향의 봄햇살이 아쉬워 서둘러 옷가지를 탁탁 털어 햇볕에 내걸었다. 그러다 양손 허리를 짚으며 바라본 건조대 풍경이 문득 낯설어진다. 검정, 검정, 검정... 죄다 검정

민들레 홀씨처럼

2025-03-20T11:10:28Z

땅이 척박해도 바람이 거칠어도 소리 없이 날아간다. 결국 어딘가 내려앉아 자신만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민들레. 내 품에 조금 더 머물러도 좋을텐데 바람은 너를 부드럽게 밀어올린다. 멀리 가거라. 너무 멀지는 않게. 높이 날거라. 너무 거세지는 않게. 엄마의 기도가 네 날개에 가 닿기를 바라며. 봄바람이 불어오면 너는 작은 날개를 단다. *

내 자리 돌리도

2025-03-18T07:18:03Z

무슨 일이든 한번 시작하기까지가 오래 걸릴 뿐이지, 시동이 걸렸다 하면 가늘고 길더라도 끝을 찍어야 하산하는 고집근성. 강씨 DNA는 삶의 어느 때고 툭 튀어나와 나를 밀어붙인다. 물론 채찍질만 하는 쪽은 아니다. -이봐 강씨 그만하면 됐어. 됐다구. 적절한 당근으로 셀프위로를 하다가도 그 근성이 하염없이 피곤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나는 '

엄마 누룽지에서는 공장맛이 나요

2025-03-14T01:33:23Z

아이들과 함께 양가 부모님 댁에 가면 빠지지 않고 상에 올라오는 시그니처 메뉴가 있다. 친정에서는 직접 밥을 눌러 만든 누룽지와 갈치구이가, 시댁에서는 노릇하게 구운 스팸구이가 그렇다. 웬만해선 통조림 음식을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 시어머니는 종종 나를 시험에 들게 하셨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어릴 때 ㅡ그러니까 유기농과 무농약 재료를 찾아 삼천리

울고 싶은 날에는 파를 썰어

2025-03-06T08:02:59Z

새학기에는 싹싹김치 어쩌고 호들갑을 떨면서 글을 쓴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는데, 어젯밤부터는 그놈의 새학기가 뭔지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오월이는 그랬다. 오감이 예민하고, 새로운 환경을 낯설어하며, 어깨가 바짝 올라간 채로 잔뜩 긴장을 하는 아이. 어릴 때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기띠에서 내려 눕히면 '잘 자고 있었는데 깼잖수, 다시 나를 안

나를 넘어서 보고 싶었어 - 내 몸을 돌보는 마음

2025-03-02T14:54:07Z

마라톤이나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극심한 피로감을 넘어서면서 찾아온다는 황홀감,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몸이 지치는데 오히려 더 가벼워지는 순간이라니. 어디쯤에서 찾아오는 걸까 그 감각은. 얼마나 달려야 하나? 30분? 1시간? 어쩌면 시간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나를 넘어서야 보이는 세계. 아침마다 헬스장으로, 한강으로

새학기에는 싹싹김치

2025-02-27T20:56:09Z

바야흐로 3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 달력을 펼쳐놓고 아이들의 스케줄을 하나씩 채워 넣었다. 한 학년씩 올라가면서 변경될 하교시간, 학원일정, 셔틀버스 타는 시간과 승하차 장소까지. 수정테이프를 몇 번이나 죽죽 긋고 다시 쓰는 내 안에 무의식의 카타르시스가 폭발한다. 드디어 가는구나. 학교에. 새 학기를 맞이하는 흥분과 설렘은 우리 집 두

에필로그 - 수영을 좋아하세요...

2025-02-25T02:38:41Z

외로운 웅얼거림도 요란한 비명도 매운 소문도 그래서 떨떠름했던 기분도, 물속에 들어가면 들리지 않았다. 외부소음이 단절되며 귀를 덮어오는 고요함. 때때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는데서 오는 피로감이 짓누를 때면 부러 수영장을 찾았다. 그 순간을 사랑했다. 나를 온전히 혼자로 만들어 주는 물속의 평온한 시간을. 어지러웠던 마음을

소금물의 농도를 구하시오.

2025-02-20T13:21:50Z

그래서 소금을 몇 그램 탔다는 그 물의 염도는 혀끝이 알싸해오도록 짰을까, 기대했던 짠맛 대신 미적지근한 물비린내만 남았을까. 낯익은 얼굴인데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을 맴돌기만 하고 끝내 스쳐가 버리는 '수(數)'는 내 것인 듯 내 거 아닌 내 것 같은 것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숫자와 서서히 거리를 두는가 싶더니 결국 잽싸게 등까

수영장에서 만난 불편한 유형들(2)

2025-02-17T06:43:57Z

그녀의 긴 생머리는 흡사 배우 전지현을 연상케 했다. 수영장 전지현 씨는 종종 거울 앞에서 잔머리를 정리하며 수모를 쓰느라 진땀을 빼기도 하였는데, 볼 때마다 늘 머리를 감지 않은 채로였다. 눈앞에서 부조리극을 마주하고도 나는 침묵할 핑계를 찾았고, 부끄럽게도 생각들은 목구멍 속으로 꾸불꾸불 기어들어갔다. '그냥 감으세요.. 물에 젖으면 수모 쓰기 편해요.

엄마, 나만 없어 핸드폰!

2025-02-13T14:03:40Z

둘째 유월이가 어린이집을 졸업할 즈음 친구들이 하나 둘 목에 핸드폰을 걸고 나타났다. 초등 입학 전 키즈폰을 준비한 것이었는데, 아이는 평소 좋아하던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핸드폰을 보고는 세상에 있는 감탄사를 모두 쏟아냈다. 그때 유월이의 눈은 으레 <내 친구가 가진 거라면 나도 가져보겠다>는 충만한 야망으로 반짝였다. 아이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우

수영장에서 만난 불편한 유형들 -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chill한 수영장을 만들어 보아요.

2025-02-10T11:10:34Z

처음엔 내 착각인 줄 알았다. 분명 나보다 사물함 발권번호를 늦게 받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늘 먼저 준비를 마치고 여유롭게 스트레칭을 하며 강습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 '대체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 있지' 안 씻고 입장했다는 이야기다. 그놈의 '집에서 씻고 왔어요'(그러니 안 씻어요)나, '옷 안에 수영복을 입고 왔으니 안 씻어요' 족이 분명했다

소심한 어린이

2025-02-06T09:49:48Z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그러니까 그만그만한 동네에서 남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비슷비슷하게 자랐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했고, 발표시간에 손을 드는 일은 연중행사일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담임선생님은 알아들었으면 끄덕이지 말고 '네' 대답 한마디라도 하라고 하셨고, 부모님도 탐탁지 않

수영하고 뭐 먹지

2025-02-03T12:15:32Z

수영을 하면 다른 운동보다 유난히 더 허기가 몰려온다. 소도 때려잡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극강의 허기짐. 강사님의 치기 어린 열정에 휩쓸려 점점 더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할 때였다. 마치 내가 불쏘시개라도 된 듯 얼굴은 익은 고구마처럼 달아오르고, 숨은 가빠졌다. 몸속의 연료가 바닥나기 시작할 즈음, 아이러니하게도 머릿속엔 점점 음식 생각들이 자리를

마음 깎는 어린이

2025-01-30T13:54:17Z

축구학원에 다녀온 유월이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이내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울분을 터뜨렸다. 같은 팀 선수가 "너 때문에 졌잖아, 왜 패스를 못 받아?"라고 했단다. "그러는 넌 항상 잘 받냐고, 그랬어" 유월이는 날카롭게 반격했다고 했다. 사건의 일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듯 눈동자가 오갈 곳 없이 흔들렸다

깡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