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립

바리스타와 커피

서립 — Wed, 30 Apr 2025 07:37:29 GMT

그날 이후 계속해서 카페를 찾았다. 글을 쓴다는 명목으로 향한 발걸음 끝엔 늘 그 바리스타가 있었다. 그녀가 눈앞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으면, 내 노트북에도 자꾸만 새로운 글이 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실패한 사랑 이야기를 쓰면서 계속해서 가슴이 뛰었다. 커피 향이 어지럽게 코끝을 맴돌았다. "오늘은 좀 연하게 내렸어요. 진하게만 드시는 것 같아서." "

내가 훔친 문장들

서립 — Thu, 24 Apr 2025 06:42:32 GMT

글을 써서 겨우 먹고사는 내가, 처음으로 글이라는 걸 써본 건 열 살 때였다. 학교 백일장 참여율이 낮다고, 학급 임원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끌려나갔다. 그날의 교실은 딱딱하고 냄새났다. 억지로 앉혀진 나무 책상 위에, 나는 어디선가 봤던 문장 하나를 그대로 베껴 적었다. 그게 표절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솔직히, 그땐 그런 구분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냥

그저 무너져 무뎌질 뿐

서립 — Tue, 22 Apr 2025 15:00:17 GMT

한동안은 그 누구와도 연애할 수 없었다. 내게 돈을 빌린 그녀는 계속해서 연락을 해왔지만 돈은 갚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미련보다 받지 못한 돈이 더 아쉬웠다. 그렇지만 그녀에게서 돈을 받아낼 재간은 없었다. 법적 조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부정형이 몇 번이나 들어간 걸까. 마치 내 연애가 다 부정 당하는 느

동성과의 잠자리에 관한 고찰

서립 — Tue, 08 Apr 2025 15:00:03 GMT

그녀는 여자이면서 여자이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렌터카를 빌려 회사에 다니면서 그 렌트비조차 내지 못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리고 갚는 것을 반복하다 유치장에도 끌려갔다. 그러면서도 주변 경조사를 끔찍하게 챙겼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내게 친구 아버지 부의금을 빌렸고, 그 뒤로도 간간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갈 돈을 빌렸으며 다음 월급날

완전하지 못한 사랑

서립 — Tue, 08 Apr 2025 14:06:14 GMT

올해 이상문학상에서 최연소 수상자가 탄생했다. 나와 나이가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런 수상작을 읽다 보면 괜히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지 못할까 같은 생각에서였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런 것은 생각도 않고 무작정 떠들어댔던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낡고 헤진 위로들

서립 — Thu, 03 Apr 2025 09:34:41 GMT

하도 많이 쓰여 낡고 헤진 표현은 어쩐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도망가자던지, 쉬어가도 괜찮아 따위의 것들. 아니, 어쩌면 새것이었을 때부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도망갈 곳도 확실하지 않고, 쉬고 난 다음이 나을 거란 보장도 없는데 무작정 괜찮다고만 하는 무책임한 위로에 화가 났다. 태양의 정수리가 지평선 너머로 들이밀어질 때 묵직한 공포감으로

일기

서립 — Thu, 27 Mar 2025 13:21:39 GMT

글을 쓰는 것이 더더욱 어려워지는 요즘입니다. 몇 안 되는 글자를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매일 쓰던 일기도 쓰지 못합니다. 그것도 글이라고 자꾸만 찢어내게 됩니다. 평생을 글만 쓰고 살았습니다. 억지로 끌려간 백일장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그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책 읽고 글 쓰며 이 길이 내 길인 것마냥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구애의 춤

서립 — Tue, 04 Mar 2025 15:00:10 GMT

과제를 위해서 펼친 노트북은 정신 차려 보니 중고등학교 시절 쓴 동성애 소설을 비추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소설들은 내게 한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깨달음을. 학창 시절 내내 써왔던 사랑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남자와는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쓴

사랑하면 섹스해야 한다고?

서립 — Wed, 26 Feb 2025 08:16:22 GMT

그즈음 나는 동성애 소설에 빠져 있었다. 으레 내 또래 여자애들이 그렇듯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서로 사랑하는 소설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인기 있는 멤버 구성도 존재했고, 그 구성을 칭하는 커플 이름도 있었다. 나는 읽는 것도 모자라 쓰기까지 했다. 제법 인기를 끌기도 했다. 동성애 소설을 읽고 쓰면서도 나는 이성애를 향한 환상을 키우고 있었

2월 7일의 단상

서립 — Fri, 07 Feb 2025 09:29:00 GMT

- 마시고 마셔도 목이 말라 바다 같은 당신은 단 한 번도 나만의 것이 되지 않아 내 온 우주는 바다가 됐다. - 난 가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상상을 한다. 곱씹어보면 전부 나를 향한 말이다. 그래서 내게 그 말들을 퍼붓는다. 아무리 퍼부어도 상처 하나 받지 않는다. 상처가 날 자리가 부족해서라는 사실이 얼마 전 계시처럼 트였다. 나는

엔딩

서립 — Mon, 27 Jan 2025 07:58:20 GMT

여러 번의 달이 지나고 나는 여전히 남자와 어울리며 그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사람에게선 더 이상 간간한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동생과 마주한 술자리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가끔씩 그 사람한테서 연락이 와. 보고 싶다고." "누나, 그 말 믿지 마. 남자는 보고 싶으면 몸이 먼저 가." 어쩌면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애써 외

살아가는 순간이자 죽고 싶은 이유

서립 — Sat, 25 Jan 2025 08:37:15 GMT

틈만 나면 그 사람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아가는 순간이자 죽고 싶은 이유였다. 그깟 사람 하나 때문에 내 시간들이 어지럼증으로 정신 못 차린다는 사실이 못내 자존심 상했다. 그러면서도 남자를 계속해서 만났다. 누구라도 만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나 좀 어떻게 해달라고 울부짖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 알코올과 니코틴에 절어 살면서, 주변 사람들이

과하게 얘기하자면 사랑인 것 같아

서립 — Wed, 08 Jan 2025 04:30:12 GMT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창문 너머로 붉은 십자가를 내다보며 또 생각했다. 가끔은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이 덮쳐오기도 했다. 처음 눈을 마주쳤던 순간부터 아이를 없앤 어딘가를 거쳐 좋아하고 사랑한단 말을 하게 됐을 때까지. 그 무엇 하나 내 것 같은 순간이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움켜쥐기엔 과분한 사람인 듯했다. 그래서 나를 떠났나. 나는 오래도

외사랑

서립 — Sun, 22 Dec 2024 01:29:56 GMT

- 앞뒤 가리지 않고 그저 좋아서 내 감정에 목을 달아 내 손길에 휩쓸렸다. 비가 오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내 우산은 너 모르게 버리던 나의 일그러진 애정이 나를 산책시켰다. 나는 수동적으로 능동적인지라 현관문을 여는 법을 모를 뿐 혼자 나를 산책시키는 법은 기가 막혔다. - 왜 겨우 잠든 밤에 겨우 잊은 네가 나와선 나를 달콤한 말로 뒤흔드는지

혀

서립 — Tue, 17 Dec 2024 15:00:02 GMT

넘어도 되는 선 앞에서 나는 자꾸만 우물쭈물했다. 그 사람의 일상을 묻는 것도 불편했고, 주변 이들에 대해 묻는 것도 껄끄러웠다. 나는 그저 그 사람이 하는 말에 고개나 끄덕이고 웃기나 하며 인형처럼 옆에 서 있었다. 내가 바란 게 이런 걸까.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도 없는 이 사람을 내 애인이라 칭해도 되는 걸까. 그 사람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비틀비틀

서립 — Mon, 16 Dec 2024 07:17:42 GMT

비워내려고 합니다. 우리가 나란히 걸었던 것은 아닌가 봐요. 이만 안녕히 가세요.

창백한 시간

서립 — Tue, 10 Dec 2024 15:00:04 GMT

영은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 보는 영의 눈물에 당황한 나는 휴지를 몇 장 뽑아 건네주었다. 영은 그것을 받아들고선 닦을 생각은 않고 손 안에 구기며 목 놓아 울었다. 영이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너 여자친구도 그래서 못 놓는 거지? 내가 묻자 영은 역시나 대답하지 않고 그제야 눈물을 닦아냈다.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의 죄책감 끝

안녕하세요. 내가 당신의 아내입니다.

서립 — Thu, 05 Dec 2024 15:00:03 GMT

BGM박화요비 - 그런 일은 여자는 중국에서 왔다. 먹고살기 팍팍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 돈을 벌러 한국에 왔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위장 결혼을 했다.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곤 안녕하세요 정도. 여자는 브로커의 손에 이끌려 술집으로 들어섰다. 반반한 얼굴 탓에 포주가 좋아했다. 여자는 눈치로 술을 따랐다. 곧이어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놀라

환영받지 못한 존재

서립 — Tue, 03 Dec 2024 15:00:04 GMT

그 사람을 피해 다닌 지 한 달. 그동안 병원을 지겹도록 다녔다. 소독이다 검진이다 해서 갈 일이 많았다. 생명을 죽인 대가라 생각하고 꾹 참고 견뎠다. 그 좋아하는 술도 먹지 못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 괜찮았다. 생각도 나지 않았으니까. 생을 마감해야 하는 때가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웃겼다. 수술한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본 건 전 애인이었다

어설픈 낭만

서립 — Fri, 29 Nov 2024 05:04:05 GMT

가난한 애정에서 비롯된 무력감 우리는 어설픈 낭만만 떠들어 무엇도 직관적이지 못한 표현들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던 외사랑 나를 바라볼 때 태우던 담배 나는 그게 참 싫었던 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