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바로 이거야!라는 판단……
바르트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저자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독자에 의해 무한히 재생산·재창조될 대상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서 저자는 명목상의 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서 오독이란 무의미한 말이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독자를 온라인 카지노 게임로 유희하며 새로운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생산하는, 다시 말해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저자들은 독자를 능동적인 대상으로 설정한다. 내가 읽어온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손을 떠난 작품은, 읽는 이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전혀 다른 무엇이기에, 더 이상 자신이 애초에 탄생시킨 그것이 아님을 이야기했다. 우리와 같은 독자에게 부지런히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렇게 던져지는 우연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들은 연결성을 지니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론을 띄엄띄엄 내키는 대로 읽었던 나는, 김영하의 언어로 새로이 뱉어진 바르트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론을 만나, 반가운 생각에 잠긴다. 각기 다른 지점에서 만난 그 둘을 연결 지어 다채로운 맥락을 구성하기도 하고, 결국 그것이었다고―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선별적이며 무한한 창조성을 지녔다!― 단정 짓기도 한다. 놀라우리만치 확고하게 새삼 깨달은 바는 단연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대하는 '독자의 주체성'이다.
내가 만약 즐거움에 따라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평가하기로 한다면, 이 책은 좋고 저 책은 나쁘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수상자 목록도 <비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평은 항상 전략적인 목적, 사회적인 효용성, 또 대개는 상상적인 포장만을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이것은 지나치고 저것은 충분치 않다는 식의, 그런 규범적인 술어의 유희에 가담할 만큼 완벽해질 수 있다고는 측정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것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는 내게 있어 전혀 형용사적인 것이 아닌 바로 이거야! 혹은 내게는 바로 이거야!라는 판단만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게는이라는 말은, 주관적인 것도 실존적인 것도 아닌 니체적인 것이다(……결국 그것은 항상 똑같은 질문이다, 이 내게는 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롤랑 바르트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즐거움』
내 휴대폰의 갤러리에는 수천 장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남아 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내 소유가 아니기에 밑줄을 그을 수도, 페이지를 접을 수도, 인덱스를 붙일 수도 없어서 그리 된 것이다. 물리적인 방식을 동원해 저장할 수 있었던 나머지 더 많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들은 나의 책장에 잠들어있다. 바르트가 말했듯 내게는 바로 이거야!라는 판단이 선다면 지체 없이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그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음미하고 남기고 싶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떠밀려 와 갑작스레 내 것이 되어버린 무언가처럼 책의 저자와 제목에 관한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글을 읽고 있는 와중에 그러한 정보를 함께 기록할 만큼 부지런하거나 치밀하지 못한 이유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저 온라인 카지노 게임만이 남았다. 무용해 보이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 더미에서 의외의 신선한 의미를 찾았다. 휴대폰 속의 사진으로만 저장된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기록하던 순간, 당시의 시간이 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 시간의 나는 그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유의미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내 안에서 심상을 일으키고 마음을 휘저으며 어떤 작용을 일으켰으리라. 예전의 사진첩을 열어 찍힌 온라인 카지노 게임들을 가만 읽어보다가, 책과 저자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글을 쓴 이와 그가 글을 펼친 맥락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낭패감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김영하와 롤랑 바르트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 관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게 된다. 그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이미 내 안에 새로운 의미로 창조되었고, 그 속에 '내가' 더 정확히는 '그 순간의 내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2021년 8월 6일 금요일 오후 6:03
시스템은 소속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응용해야 할 것일 뿐이다. 시스템으로부터 호명되고 부여받는 자리와 명함이 얼마나 손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 그 신기루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선망하지 않는 것, 나는 이것이 혁명이 불가능한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혁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신 이들은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각자의 미감과 세계관, 도덕적 기준과 윤리를 양보하지 않으며 오늘을 산다.
안전하고 규격화된 일에 머무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답답한 적이 많았다. 내 안에 두려움과 나약함이 얼마나 커다란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시스템의 바깥 만을 응시하는 게 늘 못마땅했다. 겁이 나도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해져 있는 틀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본연의 자신에게 충실한 모습을 통해서만 인생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에도 나는 시스템의 변두리 중의 변두리에 서 있는 참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나만의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대부분의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었지만, 나 같은 이도 그럴듯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채워가자는 것을 언제나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2021년 9월 15일 수요일 오후 6:18
하지만 그 뒤로
제가 얼마나 뜨겁고 또 차가운 시간들을
무수히 반복하며 지내왔는지 생각하면
서른도 마흔도 인생이나 청춘의 끝은 아니었고
언젠가 쉰이 되고 예순이 된다 해도
그 역시 끝은 아닐 거라 믿고 있죠.
그때, 그토록 절망했던 17년 전의 나는
그 후 내가 이렇게나 많은 일들을 겪게 될 줄 알았을까요?
아무것도 속단할 필요는 없었던 거예요.
17년, 거대한 틈으로 보이기도 매끈한 연결로 보이기도 하는 그 세월의 무자비함과 포용력 앞에서 나는 내 세월을 세고 있었다. 인생행로는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를 끌어가고 있었고, 다가오는 시간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깨끗한 선으로 밑그림이 그려져 있고 우리는 정해진 칸 안을 마음에 드는 색으로 꽉 채우기만 하면 되는 색칠도안 같은 것이 인생이라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나중에 내 것은 어떤 그림이 되어있을까. 밑그림이 없는 채로 여러 색의 칠을 뭉개며 이렇게 그려나가도 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그려나간다. 어쩌다 만난 희망의 속삭임이 싹튼다.
'아무것도 속단할 필요는 없었던 거예요.'
'거기……, 아주 멋진 그림이었으면 좋겠어요.'
2021년 9월 17일 금요일 오전 1:16
영국의 정신분석가 애덤 필립스는 2012년에 발간한 에세이집 『놓쳐 버린 것들』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의 삶은 충족되지 못한 필요성과 덧없이 희생된 욕망에, 거절당한 가능성에, 걸어가지 않은 길에 바쳐진 슬픈 만가가 되고 만다. 잠재적 가능성의 신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행동이라고 해 봐야 기껏 애도와 불평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설령 우리의 꿈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 설령 그 꿈들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계속해서 필립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의 삶이 담고 있는 살아 보지 않은 또 다른 삶들이 없이 지금 현재의 우리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새로운 업을 선택하고 3년쯤의 응축된 시간이 흘렀고, 제주도라는 섬에 고립되어 있었다. 모든 선택은 내가 내린 것이었다. 최선의 열심을 기울인 선택의 뒷맛이 자주 씁쓸함이었음을 나는 기억했다. 선택하지 않은 다른 가능성에 여전히 마음을 내어주며, 왜 이리도 연약한지 끊임없이 나에게 물었다. 그 당시의 나는 충족과 회한과 가능성이라는 단어만 맞닥뜨려도 모든 게 잘못되어 버린 기분에 시달렸다. 무엇을 할 수 있었더라. 내가 내린 선택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공을 들이고 아슬한 한 걸음씩이라도 희망과 앞을 향해 내딛기 위해 온 힘을 쏟는 것, 평온한 날이면 그것만 아주 조금 해낼 수 있었다.
이것은 얼마간은 모두 지난 이야기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같지 않다. 나와 내 삶은 또 다른 변화를 온몸으로 맞이해 왔고,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기록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행간과 선택받은 언어들, 그 모두가 자아내는 분위기 아래에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지금보다 덜 여물고 휘청휘청하던 여린 자아를 만나 홀로 쓰다듬었다. 요즘에 채워가고 있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떠올리면서, 듬직하고 단단한 생각의 틀을 잘 지어가고 있으니 염려 말고 견디라고 그때의 내게 얘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