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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해 Dec 24. 2024

어서 와, 카지노 게임는 처음이지?

돼지국밥

엄마는 말했다. 부엌이더러우면 운이 나빠진다고.조왕신이 화가 나서 불행을 몰고 온다고. 그래서일까. 부모님 댁방은 늘 반짝였다. 작은 방에는 버리지 못한 짐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가스레인지에서는 광이 났다. 싱크대 주변은 물 한 방울 튀어 있지 않았고, 음식물 쓰레기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요리하기 전에 싱크대부터 치워야 하는 우리 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들과 둘만 집에있을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복잡한 요리는 피하고먹고 나면 바로 치웠다. 때가 쌓이면 나중에 고생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관사인 남편이 배를 내리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시아버님을 닮아 손맛이 좋은 그의 요리는 탁월다. (미식가인 그는 나에게 요리를 맡기지 않는다.) 다만, 뒷정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칼질 후 남은 채소 부스러기, 식재료를 꺼낸 플라스틱과 젖은 봉지, 떨어뜨린 국물로 레인지 주변은 초토화됐다. 허옇게 변해버린 지방은 여러 번 문질러도 미끈거렸다. 손도 대기 싫어서 못 본 척하면하루도 지나기 전에재난현장으로 변했다.


카지노 게임

엄마의 경고를 무시한 탓일까. 종종 이용하던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카지노 게임를 당하고 말았다. 아이가 글짓기 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책을 사달라고 한 것이 계기였다. 전권을 들이려니 돈이 모자라 중고로 사는 건 어떠냐 권유한 건 바로 나였다. 사이트에 키워드를 등록해 놓고 들여다보기를 며칠, 새벽에 울린 알람에 일착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기를 키우느라 답변이 늦다며 가격을 깎아준 인심 후한 그 사람이 카지노 게임꾼일 줄이야. 인터넷카지노 게임 조회 서비스에 등록되지 않은 협잡꾼을 알아챌 방법은 나에게 없었다.


보낸다는 송장사진은 약속시간을 넘겼다. 밤까지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절로 눈이 떠졌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게시글을 지운 범인은 사이트마저 탈퇴한 상태였다.희미하게 밝아오던 아침이 도로 어두워졌다.무거워진 심장이 바닥을 보고 누웠다. 내가 지금 답답한 건 숨을 참아서일 거야. 산소 부족을 외치는 허파를 있는 힘껏 부풀렸다. 그래도 막힌 속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은 평소보다 상냥한 엄마의 밥을 먹고 등교했다.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일을 어떻게 축소시킬까 잔머리를 가동했지만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기분 좋은 때를 노려 얘기하자고 뻔한 결론을 내렸다. 남편은 느지막이 일어나 휴대폰 액정에 사고 싶은 물건을 띄워 이거 어떠냐 물었다. 얼마 전 차를 바꾼 뒤로 그는 매일이 흥분 상태였다. 핸들 커버에 콘솔트레이, 킥 매트에 발판 가드. 차량용 액세서리는 화장품 종류처럼 끝이 없었다. 결제 허가를 기다리는 그를 보며 매운 현실을 공유하기로 했다.


나, 카지노 게임당했어.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의 얼굴이 대번에 가라앉았다. 머리를 헝클어트린 커다란 손바닥이 얼굴을 가렸다. 두툼한 손가락 사이로 침울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돈 들어갈 곳도 많은데..


시작점을 찾지 못하는 투명 테이프처럼 짜증이 밀려왔다. 여러 번의 사과에는 미동도 없더니 입을 연 첫마디가 그거라니. 폭풍처럼 밀려오는 서운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쏟아지는 찬물에 여러 번 얼굴을 씻어냈다. 돈을 잃은 건 미안한 일이다. 근데, 나쁜 사람은 카지노 게임꾼이지 내가 아니지 않은가.

왜 니가 화를 내?
난 니가 이런 일 당했으면 그런 말 안 했을 거야.


화장실까지 따라온 그에게 진심을 토로했다. 억울한 마음에 타는 입 안을 찬물로 헹궈냈다. 남편은 조용히 생각하더니 곧 미안하다 사과했다.시무룩한 얼굴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말처럼 화를 낼 군번은 아니었다. 세면대에 고여있던 속상한 마음이 물과 함께 빠져나갔다.


남편은 금방 기운을 차렸다. 이럴수록 맛있는 음식 먹고 힘내야 한다며 외출을 권했다.'오늘은 단골집이다.'라고 외친 후,주저앉은 내 발에 양말을 신겨주었다. 추운 바깥 날씨처럼 마음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뜨끈한 국밥이라. 집 나갔던 식욕이 하얀 국물과 함께 돌아왔다.


그 돈이면 국밥 13그릇은 먹을 수 있겠네?


남편은 화내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틈틈이 깐죽거리며 농을 쳤다. '조용히 하고 밥이나 드세요.'하고 부처님의 미소로 응답하자 껄껄 웃으며 국물에 밥을 말았다. 시키면 5분이 안 돼서 나오는 국밥은 언제나 신속 정확하다. 김이 나는 뽀얀 국물에는 푹 익어서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여러 점 들어있다. 양념이 된 부추를 한 뭉텅이 집어넣으면 빳빳했던 초록색 뭉치는 금세 몸을 굽힌다. 옅은 분홍빛의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단골집 특유의 다진 땡초를 넣어 휘휘 저으면 내 입에 딱 맞는 맛이 완성된다. 개인커스텀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고객 맞춤형 음식이라고 하겠다. 밥은 말아도 좋고 따로 먹어도 좋지만 이런 날은 전부 말아서 푹푹 퍼먹어야 할 것 같아 그리했다.


진하고 구수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목구멍에 남은 설움까지 반찬 삼아 뱃속에 밀어 넣었다. 포만감이 쌓일수록 날카로운 신경은 닳은 연필처럼 무뎌졌다. 분노와 서운함이 흑연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그래, 연말에 불우이웃 도왔다고 생각하자. 남편은 그런 이웃은 돕고 싶지 않다며 이마를 찡그렸지만, 그 모습이 익살스러워 자꾸 웃음이 났다.


인생은 더하고 빼기의 연속이다. 이 날은 잃어버린 돈만큼 생생한 글감을 보충했다. 빠져나간 복은 어딘가에서 행운으로 변해 배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카지노 게임를 업으로 삼은 자는 훔친 운이 마이너스로 돌변하는 순간 쇠고랑을 차게 될 거다. 그날이 온다면 마지막으로 국밥 한 그릇을 권하고 싶다. 차가운 교도소를 버티게 해 줄 따끈한 힘이 되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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