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저 블루베리
여기, 크루저 한 병이요.
남자는 의아했다. 주량에 자신 있다는그녀가 처음 시킨 술은 무료 카지노 게임 도수 5%의 음료수였다. 아, 혹시 이건 몸풀기용인가. 달리기 전에 엔진을 가열하는 스포츠카를 떠올리며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여자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반도 채 비우지 못한 술잔에 달아오른 얼굴, 헤실거리며웃는 표정과 살짝 꼬인 말투가 벌써 취한 것 같았다.이상하다. 분명 술을 잘 마신다고 했는데.사내는 앞에 앉은 상대의 엉뚱함에 웃음이 나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의 첫 직장은 지역에서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어학원이었다. 학원장은 새로 생긴 대형 아카데미에 맞서기 위해원래 있던 강사들을 모두 잘라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초임강사는 월급이 적고 부리기 좋으니경험이 부족한선생님을 채용해'잘 길러봐야지.'하고 판단하신듯하다.마치, 신인 아이돌 그룹을 키우는 연예인 기획사사장처럼 말이다. 나를 포함 5명의 연습생이 들어왔지만다들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간 걸 보면 그 전략이 성공무료 카지노 게임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주량을 살펴보고 있는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는훗날 내 제자가 될 사내이자어학원청소를담당하던아르바이트생이었다. 교실 뒷정리를하면 수업을 무료로 듣게 해 준다는 공고에 덥석 지원서를 내민예비졸업생이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운명적이게도 발렌타인데이였다. 네모난 미니쉘초콜릿을 강사들에게고루 나누어준 모양인데,일본어과인나와 다른 한 선생님만 선물을 받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치워주는 덩치 큰 학생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칠판지우개를휘두르는너른등판과 싹싹한 인사소리에 '참 성실한 학생이야.'라고 감정했었다.다만, 다음 수업을 준비하기 바빠서 정확한얼굴을 본 적은 없무료 카지노 게임. 작은 초콜릿 조각이 뭐라고강사실에서'나는 못 받았소~. 아쉽소~.'이러고 있는데 출석표를 가져온 문제의 사나이와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
짙은 눈썹에동그란 눈, 오뚝한 콧날에 키가 큰 남자. 서글서글 잘 웃는 그는(내 기준)훈남이었다. 생각지 못한 취향저격에 마주친 눈동자가흔들거렸다. 그런데그러면 뭐 하겠는가.딱 봐도 당신은 학생인 것을. 취직한 지 몇 달 안 된 초짜주제에'넌학생이고, 난 선생이야.'를외치며 마음속에분필로 경계선을그무료 카지노 게임.
나눔에 실수가 있었던 걸 알게 된 그는 친절하게도 한 번 더 초콜릿을사 왔다.퇴근시간이 가까워서 흥분한 나머지 멀리서 던져주는 과자를 폴짝 뛰어받았다. 만세를 외치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머쓱해서 슬그머니 두 손을 내렸다.내심 뻘쭘했던 그때가남자는사랑에 빠진 순간이라고 회상하니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제멋대로구나 싶다.
다음 날, 사내는 대학생으로 가득 찬 일어 초급반에덜렁나타났다.자리에 앉아 꾸벅웃는 모습에당황했지만 기꺼이인사를 받아주고 수업을 시작했다. 내주는 숙제를 군말 없이 해오고 결석하는 일이 없는학생을 두고 다들 근면하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연하가 아니라 졸업이 늦어진 동갑내기 친구가 아닌가.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놓는 일 없이 서로 존대를 유지하며 무던하게 지냈다. 언제나처럼 수업을 마친 어느 날 정오,불쑥 그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오늘 저랑 점심 같이 안 하실래요?
마음이 뻔히 보이는 데이트 제안에 오케이를 날린 건 그가 (재차 강조하지만 내 기준)미남자였기 때문이다. 함께 한 첫 식사자리에서 사귀자는 돌직구를 건네는 행동력이맘에 들었다. 평소 착실했던 모습에서 이미 가산점을 얻은 상태였다.거절할 이유가 없어 교재를 승낙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이 사람은 착실한 학생을 가장한 맑은 눈의 광인이었다. 만난 첫날부터 결혼에 아이는 셋 이상 가지고 싶다는얘기를 서슴없이 꺼내는 독특한 사람이었다.들이대는 게 부담스러워 도망칠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그가 싫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의 실행력에 호감을 느끼지 않았던가.나도 사회초년생으로 위장한 풋내기로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마치 대학생 커플처럼 학원에서 비밀 데이트를 즐겼다.
수업 시간에 쓰기 연습하는 학생들 틈에서 그의 머리만 쓰다듬고 지나가기, 아르바이트생 휴게실에서 들려주는 기타 연주 듣기, 모두가 돌아간 빈 강의실에서 키스나누기 등 다른 사람 몰래하는 연애는 몇 배는 더 짜릿했다. 학원 앞 거리를 떨어져 걸으면서도그의 시선과 나의 시선은 은근하게 뒤섞였다.이어진 붉은 실이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그가 물었다.
선생님, 술 좋아하세요?
술. 애증의 술. 중학생 때 친구가 산 불법복제비디오에 나온 만화 주인공은 샤워 후 맥주를 아주 시원하게 들이켰다. 나도 어른이 되면 꼭 저걸 마셔봐야지 다짐했었다. 그런데 정작 어른이 돼서 마셔본 맥주는 쓰고 텁텁했다. 세상에 맛있는 음료수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이걸 왜 마시는 건지이해가 되지 않았다. '크으'하고 떨리는 목울림과 함께 털어 넣는 맹물 같은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걸 소주라 불렀는데 내 생각에 그건 지옥에서 퍼 온 생수 같았다. 세상의 모든 술은 쓰기만 했다. 로망은 부서지고 사기당한 기분만이 혀끝에남았다.
거기다 내 주량은 아버지를 닮아 처참했다. 어떤 술이든 한 잔만 마셔도 몸 전체가 벌게졌다. 우리 동네에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람을'촌년'이라고 불렀다. 나는 술자리에서 어김없이 촌년이 됐다. 무리해서 마시는 날에는 꼭 바닥에 빈대떡을 부쳤다. 그러니 내가 술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밖에.그가 술을 좋아하냐 물었을 때 잘 마신다고 대답한 건 어디까지나 허세였다.소주컵처럼 투명한 내끼 부림을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예요.
나는 사내의 순진함에 반했던 것 같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믿어준 착한 마음씨가 좋았다.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뚜렷한 눈매와 시선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와의 미래를 설계하는 당찬 모습은 가슴 떨리는 설렘이 되어 그와 나를 하나의 부부로 만들었다.
부끄럼 많은 부산여자는 오늘도 다가오는 남편을 밀어낸다. 제발 술자리 한 번만 만들어달라는 그의 외침을 건강을 핑계 삼아 못 들은 척한다. 남자의 술주정은 버겁다. 커다란 덩치로 흐느적거리면 무겁고 힘이 든다. 토하는 그의 등을 사심을 담아 힘껏 두드려주는 건 할 수 있다. 벌거벗은 몸에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다음날 국밥을 함께 먹어주는 것 까지도. 그게 지금까지 이어온 나의 사랑방식이다. 그래도 일 년에 하루쯤은 함께 술을 마셔줄까, 말까.어젯밤 몰래 사둔 냉장고 속 파란술이오늘 밤을 기다리며 슬며시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