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엉클디 May 07. 2025

'감感' - 지젝의 시선으로

3편:칸트의 물자체와 인식의 구조 ―“인식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역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사물을 그것 자체로 알 수 없다."


이게 칸트의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급진적인 요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우리는 모른다"가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칸트적 혁명의 진정한 폭발점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실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실재가 너무 많아서 —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려 했던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좋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실재는 항상 이미 우리의 인식 체계를 넘어서 있으며, 바로 이 '넘어섬'이 우리의 인식 체계를 구조화한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만든 전복적 역설이다!


그렇다면 '물자체(Ding an sich)'란 대체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철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는 바로 —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어떤 것, 즉 인식의 레이더망에 결코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두 가지 환상을 동시에 거부한다. 하나는 경험론적 환상이다. '모든 것을 감각으로 알 수 있다'고? 이것은 바보 같은 소리다! 다른 하나는 전지전능한 이성이라는 환상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포착할 수 있다'고? 또 다른 바보 같은 소리다! 칸트는 과감하게 선언한다 — "인식은 항상-이미 조건에 갇혀 있다. 인간은 세계를 그냥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시공간이라는 주관적 안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듣는 칸트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서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물자체는 단순히 '저기 어딘가에' 존재하는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상징계가 자체적으로 붕괴하는 지점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흔적이다. 달리 말하면, 물자체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려 할 때마다 우리를 방해하는 그 골치 아픈 걸림돌이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체계가, 우리의 이해가 무너질 때마다 — 바로 그 순간에 물자체가 그 뒤틀린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영화적 장면을 상상해보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클리셰 장면을 떠올려보라. 괴물이 있지만 그것은 직접 보이지 않는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오직 그림자만 본다. 발자국만 본다. 희생자들의 비명소리만 들을 뿐이다. 괴물은 결코 직접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왜? 그것이 물자체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재함으로써 오히려 과도하게 현존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실재는 결코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항상 '너무 많이' 나타난다"는 역설이다. 이는 마치 히치콕 영화에서 맥거핀과 같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님'이 바로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알 수 없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서 칸트는 윤리를 끌어들인다. 그의 진정한 메시지는 이렇다: "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행위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윤리의 초석이다. 즉, 윤리는 지식의 안전한 영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무지의 심연에서 내리는 결단에서 비롯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말한다: "정확히 그렇다! 주체는 항상-이미 결핍되어 있으며, 그 결핍이야말로 주체의 핵심이다!"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해야 하는 구조적으로 '정신병적인' 존재다. 바로 이 역설이 칸트에서 나로 이어지는 물자체적 주체의 계보학이다.


칸트는 물자체에 대해 무지했다. 하지만 — 이것이 중요하다! — 그는 그 무지를 체계화했다. 이는 단순한 인식적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세계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의해 구조화된다는 폭발적 인식이다. 이것이 칸트가 일으킨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현대는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시대다. 빅데이터, 알고리즘, 유전자 지도, 인공지능... 모든 것이 해석되고, 분해되고, 설명된다. 그러나 — 이것이 오늘날의 가장 아이러니한 역설이다! —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도, 불안도, 충동도, 쾌락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름'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앎"을 조직화했던 칸트의 통찰을 필사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자체는 단순히 철학의 '바깥'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멍이다!" 이것은 마치 무대 위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검은 커튼과 같다. 그 커튼 자체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님'이 바로 모든 것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물자체이며, 오늘날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윤리적 무지의 철학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 다시 질문해야 한다 — 그것도 아주 폭력적으로! "당신은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는가? 아니면, 당신은 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윤리의 근본을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직면하지 않은 윤리는 — 내가 대담하게 말하자면 — 윤리가 아니라 단지 도덕적 위선에 불과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