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삶. 과거와 현재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
태어남에 있어 인간은 선택권이 없다.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지고,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간다.
그렇다면,
적어도 카지노 게임만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위스의 어딘가에서는 '존엄사'를 허락한다지만,
그 절차는 복잡하고 허들이 많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마감할 자유조차 ‘카지노 게임’이라는 이름 아래
죄책감이라는 덫에 걸린다.
아이러니하다.
돌고래가 바다 밑으로 잠영한 채 스스로 숨을 멈출 때
우리는 그것을 '카지노 게임'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환경 파괴의 신호'거나, '고등 지능 생물의 우울'로 포장되며
인간의 잘못에 대한 거울처럼 분석된다.
하지만, 사람의 카지노 게임엔 다르다.
‘패배’라는 말이 따라붙고,
‘약함’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누가 그런 기준을 만들었을까?
어디서부터 그런 척도는 시작됐을까?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우리는 매년 ‘등수’로 평가받았다.
“올해는 아직 중간까지만 열심히 살았군.
하반기엔 좀 더 노력해서 상위권으로 가야지.”
그런 식의 삶이라면 얼마나 명확할까?
적어도 기준이 있으면
스스로에 대한 비난은 덜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잣대를 들고 살아간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다 못해 마음을 찢어내고 상처받다가도,
때론 과한 보상으로 위로하며 견딘다.
삶에 정답이 없다면,
카지노 게임에도 정답은 없어야 한다.
그 선택을 판단하려는 순간,
우리 모두 모순의 늪에 빠진다.
누군가는 전직 대통령의 카지노 게임을 두고 '약함'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에겐 생명보다 신념이 무너지는 일이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도덕성이 무너졌을 때,
그 고통은 심장을 멈추게 했을 수도 있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의 카지노 게임은 '책임'이거나 '명예'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연예인의 카지노 게임엔
‘가십’이 덧붙고,
‘주목받으려 한 것’이라는
잔인한 말들이 따라붙는다.
과연, 누구의 카지노 게임이 더 진지하고,
누구의 카지노 게임이 더 경박한가?
만약,
‘우주 정복’ 같은 인간의 목표를 이뤘다 말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카지노 게임’이 가장 멋진 퇴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삶의 절정에서,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
그 결정을 감히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카지노 게임은 패배가 아니다.
그 안에는 환희가 있을 수도 있다.
“드디어 이 더러운 세상과 안녕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떠나는 영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나는 죽기로 했다.
'카지노 게임'이 아니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