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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열 Jan 09. 2025

사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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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색된 아스팔트 위를 힘없이 구르는 낙엽을 밟으며 성수가 긴 코트에 양손을 찔러 넣고 걷고 있었다.

성수가 밟으며 걷고 있는 아스팔트도 퇴색되었고 그 위를 구르는 낙엽도 퇴색되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걷는 수의 머릿속이 생각에생각을 물고 일어나 상념으로 가득하다.


한 때는 푸르다 못해 녹음의 그것으로 살았을, 그러나 지금은 퇴색되어 바람이 이끄는 대로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낙엽을 보면서 어째 지금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에 가슴한편에서 찬바람이 일었다.


- 내가 앞으로 다시는 이런 모임에는 가지 않을 거야.

우리가 퇴직한 지가 얼마인데 아직까지 부장님, 과장님, 팀장님이야? -


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말소리가 입 밖으로 까지 새어 나왔나 보다.

곁을 스치는 사람이 흘낏 눈을 흟기고를 쳐다보며지나갔다.


오늘 수는 퇴직한 前직장 동료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직장에 몸담고 있었을 때 지긋지긋하다고여기고 퇴직만 하면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수십 번 다짐하였던 그 동료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수는 나이 24살에 그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에 입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국영기업체였다.

수가 학창 시절부터 희망하고 꿈꾸어 왔던 그에게는꿈의 직장이었다.


그는 4년 대학을 졸업하고 군필의 신분으로 입사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입사하였다.

입사하고 한 동안 그는 자신이 지금의 직장에 취업을 하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며칠 동안 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그가 입사하였을 때 경쟁률이 20:1이었다.


입사하고 한참 동안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하였고 성수 자신도 자부심의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였다.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이곳에서 자아를 성취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직장은 늘 직원들에게 박쥐 행세를 강요하였다.

공무원의 신분도 아니었는데 행동거지는 공무원의 그것을 교육하였고나라에 급한 상황이 생기면 공무원들과 같이 행동하기를 강요하였다.


회사는 늘 기업의 사회적 책임 때문이라 하였지만 직원들은 그런 것들을 몹시 불편해하였다.

퇴직한 지금 그는 공무원연금이 아닌 국민연금을 지급받고 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직장이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쥐가 되는 박쥐가 되기를 강요하였다고 생각하였다.

퇴직하는 순간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수는 입사하고 성실히 일했다.

그의 아버지 생활모토는 '성실과 겸손은 언제나 능력보다 앞선다.'라고 여기고 있었고 그가 어렸을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왔던 터이라 어느새 자신도 아버지와 생각이 같아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또 군자(君子)는 모름지기 대로(大路)로만 다녀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편법을 사용하거나 비겁한 방법으로 그 일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가 입사 10년이 되던 해

그는 성실과 겸손을 모토로 주변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그가 속해서 일하던 과(課)과장이 되었다.


입사동기들보다 1~2년이 빠른 승진이었다.

그의 동기들은 하나같이 그를 축하해 주었고 그는 그런 축하를 쑥스러워하면서도 스스로를 대견하다 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승진이 그의 마지막 승진이 될 줄은 그도 몰랐고 주변의 직원들도 몰랐다.

일찍 피는 꽃이 일찍 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랬다.


과장 이후의 또 다른 승진~

현실적으로 그 승진들은 성실과 겸손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능력을 기초로 하였지만 그 뒤에 숨은 또 다른 무엇이 늦가을 겨울잠을 준비하는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성수는 그 또 다른 무엇을 알지 못하였고 찬규는 알고 있었다.


찬규는 수보다 2년이 늦은 해에 와 같은 회사에 입사를 하고 수가 일하고 있는 부서에 발령받았다.


방금 입사한 찬규의 눈이 빛났다.

그는 붙임성이 좋아 입사 후 바로 부서 선배들에게 입 안의 혀처럼 일하였고 부서의 귀염둥이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수에게도 '선배님, 형님'하면서 그를 따랐고 어떤때 찬규는 수에게 친동생 보다 더 친밀하다는 생각이 들게도 하였다.

찬규 스스로 자신도 성수와 같은 H대학을 졸업했다고 여러 번 말하였으나 성수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다.


수도 찬규를 아끼고 좋아하였다.


수가 과장이 되자 찬규는 아예 그의 시녀역할을 자청해서 하였다.

수가 가려운 곳은 기가차게 미리 알고 긁어주었고 수가 필요로 하는 곳에 미리 가서 그를 기다렸다.


처음에 수는 이런 찬규가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점차 그가 무섭게 느껴지고 부감감이 들었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찬규의 친절이 달콤한 설탕의 맛 같아 맛있다고 느껴졌지만 점차 친절에 대한 그의 의도를 알고부터부담감이 들었다.

이 친구 무서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찬규는 성수에게 가려운 곳을 한번 긁어주고 자신의 인사고과를 언급하였고 성수의 일을 하나 덜어주고 이내 자신의 승진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수와는 살아가는 방식이 확연히 달랐다.


수는 크고 바른 길로만 걸음을 하였고 찬규는 샛길과 지름길을 가리지 않고 빠른 길로 걸음을 하였다.

수는 회사의 모든 일을 자신의 집안일처럼 성실히 하였고 찬규는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성실히 하였고 보이지 않고 숨은 일은 후벼 파지 않았다.

수는 사람을 대할 때 이사(理事)와 회사 청소를 하는 사람을 같이 대하였지만 찬규는 이사에게는 엎드리고 청소를 하는 사람에게는 군림하였다.


수는 처리할 일을 찾아다녔지만 찬규는처리된 일과인사권을 쥔 사람을 찾아다녔다.


수가 과장으로 승진하고 2년 후 찬규도 과장을 달았다.

수가 회사에서 과장이 해야 할 일만 찾아다닐 때 찬규는 승진에 필요한 사람들만 찾아다녔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승진에 유리한 조건들로 답하였다.


찬규는 과장이 되고 4년 만에부장이 되더니 이내 이사(理事)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찬규가 관할하는 부서에 수가 속해있는 부서가 있었다.


찬규가 동수의 상사가 된 것이다.


직장에서의 상하관계는 생년과 출신학교, 군대선후배와는 바뀌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후 찬규는 성수가 퇴사할 때까지 그를 직속 부하직원으로만대하였다.

그를 부를 때 형님, 선배님 대신 성수과장이라고 하였고 그와 대화를 할 때는 건조한 업무지시만 하였다.


성수가 나이 56살에 퇴직하고 찬규도 그의 나이 56살에 퇴직하였다.

성수는 과장으로 퇴직하였고 찬규는 상무이사로 퇴직하였다.


오늘그때 함께 하였던 직장동료들과 오늘 송년회를 하였다.

퇴직할 때 마음먹었던 '내 다시는 이 직원들과는 ㆍ ㆍ'하였던 성수의 결심과 다짐들을 몇년의 세월들이 무디게 하였고 더러는 망각하게도 하였다.

세월은 그때의 상처를 추억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성수는 퇴직하고 3년간 퇴직직원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임은 언제 시작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모임 회원수만 200명이 넘는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다.

1년에 두 번 모임을 하였는데 한 번은 초여름에 산행(山行) 모임을 하고 또 한 번은 오늘처럼 연말에 송년 모임을 하였다.


성수가 퇴직하였던 그 해 연말

동우회에서 서너 번 회원으로의 가입을 권하는 전화가 성수한테 걸려 왔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잠재운 전직(前職)에 대한 애증이 줄었던 올해 처음 모임에 참석하였다.

의외로 반가운 얼굴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성수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수를 '이 과장, 이 과장님'이라 호칭하였다.


그래도 괜찮다.

하기사 내가 퇴직하였을 때 만년과장으로 퇴직하였으니그들이 나를 과장이라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싶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성수와 입사동기였던 유현은 그를 보고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내 친구 성수 아니신가?' 하며 그를 안았다.

친구라는 말에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유현은 임원심사에서 탈락하고 바로 퇴직하였다.

그때 그의 직함은 부장이었다.


그렇게 뷔페식사를 하고 오래전에 같이 근무하였던 옛 전우들과 오래된 이야기들로 회포를 풀고 있던 성수의 어깨를 누군가 손으로 탁 치며 말했다.

- 이게 누굽니까?
이성수 과장님 아닙니까?

그래 결국 이렇게 나오실 것을 그동안 왜 그리 고집을 부렸습니까? -


많이 들었던 목소리였고 귀에 익숙한 말투였다.

퇴직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여전한 목소리였다.


찬규였다.


- 그래 티 내지 말자.

내가 이 친구를 싫어하는 티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이고 그들이 나를 쪼잔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을 거야. -

성수는 뒤를 돌아보기 전에 미리 마음을 다잡았다.


- 그래

찬규후배.

우리 오랜만이지? -

성수가 목소리 톤을 낮추고 얼굴에 억지로 웃음의 가면을 쓰고 찬규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 예.

저 조찬규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이라 그냥 듣는데 다음에는 찬규후배라 칭하지 마시고 찬규상무라 불러주십시오.

과장님께 제가 후배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상무로 졸업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후배들이 보기에 과장 출신이 상무출신인 저를 보고 후배 어떻고 하시면 제 가오가 뭐가

됩니까? -


성수는 순간 토가 나올 것 같은 것을 손으로 입을 막으며 참았다.


- 그래 미안하네.

자네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그만 실언을 하였네.

그런데 과장 출신인 내가 감히 상무출신 자네한테 딱 한마디만 하고 물러가겠네.-

성수가 찬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찬규는 차라리 말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성수의 눈빛이 워낙 강해 그냥 들었다.


- 찬규 상무.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극장에서 가끔 입체영화라는 것을 상영하였어.-

성수의 얼굴 어디에도 웃음기가 없었다.


- 예.

저도 서너 번 보았습니다.-

찬규가 대답하였다.


- 그 입체영화를 보려고 하면 극장에 입장할 때 입체안경을 사서 써야 했지.-


-

그때 안경하나에 천 원을 주고 사기도 하였고 어떤 극장은 극장값에 안경값을 미리 얹어서 받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관람객은 입체감을 높이기 위해 이천 원을 주고 더 비싼 안경을 사서 보기도 하였지요.

그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면 화면에서 날아오는 돌이 마치 나한테로 날아오는 것 같은 입체감에 관람객들은 몸을 피하기도 하고 또 어떤 관람객은 비명을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입체 안경 말씀은 왜 하시는가요? -


찬규가 의아하다는 듯 성수를 보며 물었다.


- 그래 정확히 기억하는군.

그 안경은 입체영화를 상영할 때만 쓰임새가 있었지.

즉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하등의 필요도 없는 쓰레기였어.

조찬규 상무!

이제 그 입체 영화는 끝났어.

그것도 몇 년 전에.-


찬규는 아무 말없이 성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런데 찬규상무 자네는 아직 그 입체안경을 끼고 있어.

아무짝에 쓸모없고 차라리 쓰지 않은 것보다 못한 쓰레기 안경이 아직 자네 코에, 귀에 걸려있다는 말이야.


이제는 그 안경을 벗어.

지금 자네가 서있는 세상은 아주 밝고 환해.

그런데 자네는 다 끝난 입체영화용 안경을 쓰고 앉아 내 안경은 이천 원짜리 안경이야 하고 있어.

어쩌면 가엾게 보이고 흉하게 보여.

지금 자네가 쓰고 있는 그 입체안경을 벗어야 자네 앞에 있는 밝고 환한 세상을 볼 수 있어-


성수의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말하고 있는 성수의 눈이 빛났다.


성수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어쩌면 과장에서의 퇴직에 대한 자격심일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마음보다 그것에 대한 진실함이 더 컸다.


찬규는 성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옛날 자신이 모셨던 상사의 부름에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찬규의 뒷모습에서 '대체 이게 무슨 잔소리람?' 하는 듯 한 표정이 보이는 듯하였다.


성수는 식(式)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식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씁쓸하였다.

자신은 오늘 퇴직직원 모임이 그 옛날 생업의 전선에서 회사를 위하고 자신을 위한 삶을 함께 하였던 옛 전우들이 모여 서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지난날을 추억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인 줄 알고 나왔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직 입체영화에 쓰였던 검은색 안경을 쓰고 내 안경은 이천 원짜리 안경이다, 내 안경은 특수 코팅된 안경이라며 그 안경을 귀에 걸고 코에 걸어 유유상종으로 자신과 다른 추억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성수가 깨달았다.

- 찬규 저 사람 지금 많이 허(虛)하는구나.

어쩌면 과장으로 퇴직한 나보다 더 불행하고 나보다 더 불안하구나.

사람 참 변하지 않는구나 -


이후 성수는 퇴직직원 동우회에 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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