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포스트 윤석열 시대의 대한민국

답이 '어떤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by SCY Apr 06. 2025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과 세계 정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사건이, 지난 4월 4일 11시 22분 문형배 재판관의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몇 마디 말로 막을 내렸다. 누군가는 환호하며 소리를 지르고 웃었고, 또 희열과 안도의 눈물을 흘렸지만, 다른 누군가는 탄식하거나, 통탄의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이게 정의라고,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이들은 각자만의 정의관을 내놓으며 사태를 진단했다.


아무튼, 이렇게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제 이 나라는 6월 3일에 진행될 대선 정국에 돌입했다. 전 정부 여당과 제1야당에서는 때를 놓칠 세라 너도 나도 대선판에 뛰어들었다. 물론 물망에 오른 전부가 대선 주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공식화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시간 문제에 불과한 일이므로 크게 중요한 점은 아니다. 벌써 일각에서는 어차피 대통령은 OOO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고, 나로서도 그무료 카지노 게임 터무니없는 망상이라거나 단순한 추측 수준에 머문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의 문제일 무료 카지노 게임다.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이 갖는 의미와 권한을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히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며, 한편으로는본질이 아니어야 한다.비록 정치의 주체는 인간이지만, 정치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특정인은 다른 이들과 동일한 인간임에도 그가 지녔던 능력이나 수완 등을 이유로 마치 역사와 정치의 '주인공'인 것처럼 간주돼 왔고, 세상은 그들을 일러 '영웅' 내지 '위인'이라 한다. 민주공화정이 수립되어 뿌리를 내린 지 수십-수백 년이 지난 21세기 하고도 25년째인 지금도 '민(民)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관념보다는 '정치권력을 위임받아 이를 행사하는 누군가'가 더 주목받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에서다. 인간은 늘 누군가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는 유혹을 받고, 이는 민주공화정 체제에서도 마찬가지라, 내가 권력자를 투표 행위로 선출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특정 개인의 역량, 카리스마 등에 쉽게 묻히고 만다. 사람들은 '나의 한 표'에 담긴 자신의 바람이 '특정 정치 인물'을 통해 구체적으로 적용 및 실현되길 원하는데, 대의민주정치의 주된 속성이자 한계 때문이다. 그렇게 민주공화정 사회의 개인은 투표 시기가 되면 기고만장해지나, 그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무력해진다. 이해한다. 공감도 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시스템'이기에, 이를 무력화할 의지가 없는 개인들은 그저 나의 한 표가 내가 택한 정당, 그리고 정치 인물에 가 닿기를 바랄 뿐이다.


어떤 방송사의 영상에서 모 대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국가는 전능하지 않습니다."라고.

사람들은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또는 해결해주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무료 카지노 게임 일반적인 인식이다. 현실적으로 국가 없는 사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가 담당한 역할과 지닌 권한이 국가에 기대되는 바 이상으로 막중하다. 실제로 국가는 '권한'이 아닌 '권력'을 무수히 많이 행사해 왔고, 이는 대중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그래서 민주공화정 사회(사실 권위주의 사회나 왕정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의 개인은 국가를 초월하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문화'의 힘을 알면서도, 국가가 이를 적절히 조절하고 통제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그 권력 내지 권한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바로 그 흔한 오류가 발생한다. 바로 그 권력과 권한을 행사할 '그 사람'에 전적인 기대와 희망을 거는 것이다. 그 사람은 정치적 유력자일 수도 있고, 정치 신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흔히'안정성'이라는 측면에 기대어 꾸준히 자신의 세를 확장해 온 인물을 선택하지만, 간혹 '참신함'에 매료되어 막 정계에 입문한 사람을 고르기도 한다. 유감스럽게도 후자에 해당했던, 막 전직 대통령이 된 윤석열은 '정치적 난국'을 타개할 방편으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그렇게 그에게 기대를 건 유권자의 50%에 해당하는 표는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이러한 경험으로 '윤석열은 안 된다' 외쳐 왔던 이들은, '역시 정치 신인은 위험하다'고 선전하며 노련한 정치인, 위기를 기회로 삼아 끈질기게 살아남은 인물이 대권을 거머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뭐, 비단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내세우는 인물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어지러운 상황을 잘 해결하여 대한민국이 다시금 국제 사회에 인정받는, 심지어는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인물이 설령 그럴 만한 의지와 뚝심, 추진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무료 카지노 게임 마치 민주공화정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윤석열이 파면당해 대통령직을 상실하여 이에 기쁨과 안도의 눈물을 흘린 이들의 목표가, 단순히 보수 정권의 (조기)종결이라거나, 본인들이 지지하는 인물이 국가 권력의 정점에 서는 무료 카지노 게임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국가가 전능하지 않다는 말을 다르게 말하면, 인간 또한 전능하지 않다는 말과도 통한다. 특정 개개인에게 거는 기대는 반드시 실망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정하나, 상황은 늘 한계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행위는 인간의 것이므로, 반드시 다른 인간의 정치 행위와 충돌하게 돼 있다. 이러한 진리를 유념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어떤 누군가'가 현재 이 국가와 사회가 당면한 난관을 일소할 것이란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이 지향하는 이념이나 가치관은 결코 누군가의 집권으로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이뤄진다면',그것은 결코 '지향'이나 '이념', '이상' 등의 이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꿈은 절대 쉽게 이뤄지지 않기에 꿈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자신의 꿈이 다른 누군가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꿈은 상당히 천진난만하고 또 위험하다.


'그렇다면 개인이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란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인정하고 수긍한다. 스스로 언급했듯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개별 인간이 더 나은 사회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 그러나 이런 현실론적인 상황과는 별개로, 그래서 더더욱 '그 누군가', '그 정당'이 이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모든 열망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 개인, 당신의 몫이어야 한다. 정당은 사람들의 지지를 먹고 살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존속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지지자의 바람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알 수 있듯, 여러 개인의 합으로 이뤄진 집단은, 그것이 막 생겨날 때는 개개인의 의견을 철저히 반영할지 몰라도, 그것이 힘을 얻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개인의 층위와는 분리된다. 이는 집단에 실체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집단을 창설했지만, 어느샌가 주객이 전도되어 집단의 유지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만 것이다. 민주화 세대가 주역이 되어 창당한 정당이 현재 '기득권 정당'이 된 것이, 과연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당연히 그중에는 권력욕이 유달리 강한 이가 있었겠지만, 그들은 권력을 수단으로 여겼지 목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삶에 무뎌지고 취하면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어느샌가 목적이 되고 만다. 이 점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민주공화정 사회의 유권자가 특히 '선택'의 순간에 반드시 경계해야 할 점이다. 스스로의 열의와 열망을 누군가에, 특정 집단에 온전히 투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을 좇던 아이에서 집단을 지키기 위한 괴물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 이 나라와 사회가 처한 상황, 그 무엇보다 빨리 손을 대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는 외면하고서, 그저 어떤 개인과 집단이 권력을 손아귀에 넣는 것만을 바라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난 그런 점에서 어떤 개인이 '정권 창출'을 이유로 유력자가 되는 상황이 참으로 염려스럽다. 정치가 인간의 영역이기에, 인간만이 정치로 문제를 풀어나간다는 진리에는 절대 동의하나,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 존재가 '그'여야 한다는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다.


이번 탄핵 심판으로, 각자의 이유로 눈물을 흘린 이들이 있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억울함 모두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개인'을 위한 눈물이라면 유감스럽지만 그것은 잘못된 눈물이요 틀린 눈물이다. 어떤 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몰락한다고 해서, 반대로 어떤 개인이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선다고 해서 사회가 획기적으로, 혁신적으로 변할 것이란 생각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의 한 표'가 지닌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이 표가 지닌 의의와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이 불러일으킬지 모를 어떤 결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가 우리 인간에게 '영웅'과 '전설', '위인'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쉽게 그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웅도 끝을 맞이한다. 전설도 끝이 있기에 전설로 남은 것이며, '위인'이 정말 위대한 사람인지는 다각도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 21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민주공화정의 위기와 권위주의로의 회귀, 너무나 만연한 정치적 우상화의 심각성과 중대함을 '나'와 '우리'의 일로 여겨야 한다. '나'의 선택, '당신'의 선택, '우리'와 '그들'의 선택은 반드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눈물은 누군가의 실각, 집권이 아닌 이 나라와 사회, 특히 개인이 처한 상황에서 흘려야 할 무료 카지노 게임다. 수도권 인구 과밀로 길 위에서 1-2시간을 버려가며 출퇴근하는 이들, 과도한 업무량과 상호 감시에 시달리며 정력을 빼앗기는 이들, 위계와 서열에 점철되어 평등한 인간 대 인간이 아닌 '갑 대 을'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 욕망으로 빠르게 일어섰으나 오히려 그 욕망 탓에 무너져가고 있는 사회와 나라...

눈물은 이런 상황에서 흘려야 하는 게 아닐까?


너무나 중요하기에 반복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특정 개인이나 집단(정당)이 정권을 쥐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나의 삶이, 공동체의 삶이 누군가의 손에 함부로 좌우되지 않도록 늘 비판적인 태도를, 이의를 제기하고 따지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맡겨버리는 순간, 그 결과는 모두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부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몰지각하고 비이성적인 태도가 아닌성숙한 정치적 입장을 갖기를, 그리고 이를 잘 지켜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유일한 해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정치적 선택의 후과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