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농사도 뜻처럼 되지 않고...
10년을 계획하고 시작한 인삼 농사가 다 망해버리고, 산판일을 더 본격적으로 다녔다. 나무를 베는 것을 저어해서 날일만 하다 기계톱을 샀다. 기계톱은 두 배 정도를 더 벌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장사도 안 되고, 농사도 안 되고, 자식은 무럭무럭 커 가는데.
그때 큰 아들이 군대 다녀와서 경찰고시를 보겠다면서 서울로 올라가고, 둘째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니고, 큰딸은 막 취직해서 눈물로 돈을 벌었고, 막내가 막 고3을 앞두고 있었다.
돈이 한참 들어가던 때였다.
동네에서 마을 사람들과 부부동반으로 산림조합 일을 다니며 낮에는 산판일을 하고, 밤에는 농사를 짓고, 새벽으로 풀을 뜯어 소와 염소를 먹이던 시절이었다. 우리 부부가 죽자고 돈을 벌어도 ‘마른논에 물을 대듯’ 돈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래도 애들 건강하고 공부 잘하니 그것만이 희망이었다. 더는 돈을 좇지 않았다. 내 새끼들 원하는 공부만 시킬 수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내가 비록 ‘하루살이’라고 해도 내 새끼들이 있으니 아까울 것이 없었다.
하루는 조 선생님께서 집에 오셔서 대학생 둘을 어찌 가르칠 계획이냐며 나무라기도 하셨다. 땅이 있어도 대학생 한 명 가르치기가 힘든데, 맨 몸으로 자식 교육에 욕심내는 나를 염려하신 것이다. 아버지 같은 분의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서 팔뚝을 걷어 근육을 보여드리면서
“걱정 마세요. 선생님! 제가 이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애들 대학은 가르칠 겁니다!”
라며, 웃으면서 말씀드린 날도 있었다. 막내까지 대학에 보낼 심산인 것을 알고 염려하신 것이었다. 아무리 힘들다고 어찌 아들과 딸을 차별하겠는가? 지가 알아서 대학을 포기카지노 쿠폰 취직해 준 큰딸이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해 겨울.
별일이 벌어졌다.
경찰 공부하러 올라간 큰아들이 어떤 처자를 데리고 내려온 것이다. 둘의 사이를 보아하니 친구는 아니고, 색싯감인 듯했다. 제 녀석 나이 이제 고작 24살인데.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녀석이... 어찌 감당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상대는 2살 어린 22살이었다. 아무리 고심카지노 쿠폰 검단이를 찾아가 기도를 해봐도 답이 안 보였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큰아들이 25살이 된 3월에 임신 소식을 전해 왔다.
자손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어른의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가족으로 품어야 한다. 고심 끝에 둘을 집으로 불러들여서 함께 생활을 했다.
가장이 된 큰아들과 산림조합 산판카지노 쿠폰 다녔다. 기계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고 옮기고... 이 죽을 고생을 안 시키고 싶어서 25년을 죽사리를 쳤는데, 옆에서 내 새끼가 같은 카지노 쿠폰 하다니.
'하, 이것은 아니다. '
'정말 이것은 아니다. '
며늘아기는 그래도 잘 먹고 늘 웃으면서 생활을 했다. 가끔 둘이 투닥거리는 것을 듣기는 했어도, 최소한 어른들 앞에서 티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들은 대학을 포기카지노 쿠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급하게 뒷집 도움으로 소 사료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산달이 가까워서 며늘아기는 친정으로 갔다.
춘화와 상의를 해서 애들이 살 수 있게 집을 고쳤다. 바깥채를 허물고 새롭게 집을 지었다. 혹시라도 터가 잘못되어서 큰아들 내외가 고생할까 걱정되어 지관이신 조 선생님을 모셔다 집 자리도 잡고, 공사 일자도 고르고, 좋다는 것은 카지노 쿠폰 다 했다. 신식 부엌도 넣어서 추운 곳에서 춘화와 며느리가 더는 고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산판일을 하며 조금 모아둔 돈을 카지노 쿠폰 털어 넣어서 기반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둘째 동생이 부엌 싱크대를 좋은 것으로 넣어줬다. 다행히 첫 손녀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며느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새집에서 살 수 있도록 장롱도 이불도 카지노 쿠폰 새것으로 준비해 두었다. 기름보일러는 단추만 눌러도 방이 따뜻하고 훈훈해졌다.
첫 손녀를 품에 안아 보는데, 예전에 큰아들을처음 안아 볼 때보다 더 묵직카지노 쿠폰 마음이 든든했다. 눈물이 흐른다면 이런 날이리라. 너무 귀해서 함부로 안지도 못카지노 쿠폰 그저 바라보았다. 신생아가 먹성이 좋아서 분유를 꿀떡꿀떡 먹는데 어찌나 예쁘던지. 왜 어머니가 둘째 동생 큰아들을보겠다고, 하룻밤만 자면 다음날 가셨는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눈을 못 떼고손녀를바라보고 있는데...
애들이 가겠다고 말하였다.
큰 아들 내외는 집을 따로 구했다고 한다. 소 키우는 집에 딸린 가정집으로. 소를 키워주면서 그곳에 살 수 있다고...
그 밤에 새로 구한 집으로 넘어갔다.
나보다 더 서운해하는 춘화를 달래기 위해서 군말 없이 애들을 바로 보내줬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따로 잠을 잤다. 나는 안채에서 잤고, 춘화는 막내를 데리고 새로 지은 집에 가서 잠을 잤다. 그 속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나오는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겠지. 자식 키우는 일은 참 어렵다. 내 마음과 같지 않고. 이제 저도 한 가정의 가장이니, 존중해 줄 수밖에... 그저 안쓰럽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맛보는 것이.
그 뒤로 우리 부부는 더 열심히 산림조합 산판카지노 쿠폰 다녔다. 거의 10년을... 날이면 날마다 함께 카지노 쿠폰 다녔다. 우리는 암벽을 뚫어 산에 등산로를 냈고, 땜 수몰 지역의 잔나무 제거와 정화 작업도 했고, 주변에 꽃나무 심는 일도 했다. 가장 젊었고 희망찼고, 꿈도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가끔 춘화와 그때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꽃시절이었다고!
하루면 커피를 열 잔도 더 마셨던 때였다.
기계톱 매연과 톱밥 가루에 목이 막혀서 그것을 삼키느라 서너 잔, 아침에 피곤해서 곤죽이 된 몸을 일깨우느라 서너 잔, 추위에 몸을 녹이느라 서너 잔. 열 잔은 일도 아니었다. 작업단 일이 끝나면, 숯불에 삼겹살을 통으로 구워서 얼굴에 꺼멍을 묻혀가며 소주 한 잔 하던!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산 등산로를 정리할 때, 점심을 먹고 허리가 무너질 듯 아파 길가에 죽 누워 5분 정도 쉬었었다. 그때 지나가던 5살 정도 된 아이가
“엄마 저기 할머니들은 집이 없어? 왜 길에서 자?”
하는 것이다. 다들 눈감고 들은 그 소리가 귀엽기도 카지노 쿠폰, 맘 한편이 상하기도 카지노 쿠폰... 집으로 돌아오는 봉고차 속에서 그 말을 하며 하하하 웃었지만, 그렇게 거칠고 힘든 일을 하며 돈을 벌었었다. 그렇게 40대부터 50대까지 이 한 몸을 받쳐가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