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도 한도 없지, 푸짐하게 살았다!
2005년.
막내가 선생이 되어 발령이 났다. 그즈음 큰딸도 더 큰 회사로 옮겼다. 이제 다 되었다 싶었다. 새끼들이 사회로 나가 자리를 잡았으니, 아비로서 역할은 다 했구나 싶어 행복했다. 막내가 임용고시를 붙은 것은 참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힘들었다. 부처님과 신명님, 그리고 명숙동생과 춘화의 간절함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온가족이 빌고 또 빌었었다.
예전에 조 선생님께서 아버지 묘를 이장할 때
“학자가 많이 날 카지노 쿠폰야!”
라고 하셨던 말씀이 이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시작이구나!!!
그리고 둘째 손녀가 찾아왔다. 그 녀석은 유별나게 나를 따랐다. 옹알이도 못하는 녀석이, 울다가도 할아버지 집에 간다고 하면 눈물을 멈췄다면서, 큰아들 내외가 자주 찾아왔다. 큰아들은 5분 거리에 집을 얻어서, 이제는 오며 가며 자주 볼 수 있었다. 큰손녀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잘 자랐다. 벌써 손녀가 둘이나 되다니.. 큰아들 내외는 월급을 타면 춘화와 나에게 짜장면을 사줬다.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참 시간이 빠르고도 감사카지노 쿠폰. 둘째 동생이온 가족 여행을 하자면서 카니발을 사서, 서울 막내가 사는 곳에 갔다 남산타워 구경도 했다.
서울 막내는 국밥을 먹어도 호호~ 불어가며 참 맛나게도 먹었다. 땀을 흘려가며 호쾌하게 웃는 모습이 누군가를 자꾸 떠오르게 했다.
‘아부지 이만하면 저 약속 지켰죠?
동생들도 장성해서 이제 다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살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즈음 막내도 빨간 차를 사서 우리 부부와 함께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다. 전남 곡성 철길 마을도 가고, 담양도 가고. 전국 팔도를 다니면서 동생도 보고, 자식들도 보고, 참 사는 것이 재미졌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이런 맛인가?
예전에 행복하면 멀미가 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지금 내 마음이 그러했다. 모두 잘 풀려나가고 소원대로 되고 있는데... 무언가 모를 불안함이 자꾸 불쑥 일었다. 내가 죽을 때가 다가오나... 자꾸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애들한테 이야기를 했다가 아주 호되게 혼이 났다. 이제 효도를 시작했는데 무슨 말이냐며 말도 못 붙이게 했다. 내 딸이지만 참 매섭다. 누구를 닮았겠는가?
그렇게 둘째 손녀가 3살이 막 되었을 때, 고달픈 운명이 또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항상 함께 다니던 큰아들 내외가 어느 순간부터 혼자 다니는 것이 아닌가?
일이 터졌구나 싶었다.
이거는 아니다 싶어서, 큰 놈을 족쳤더니 술술 불었다.
동네에서 갈라서려는 부부를 수없이 붙여주고 다독여서 살게 만들었던 나지만, 내 새끼 문제만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바깥일을 작파하고 두 손녀를 키우며 집안에 들어앉았다. 당시에 춘화는 재가 방문 요양보호사 일을 하면서 두루 다니고 있었으니, 애들 키우는 것은 내 천신이 되었다. 다른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내 자식과 손지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시간이 나면 불경을 더 암송하고 기도하고 신께 매달렸다. 살려야 카지노 쿠폰.
저 어린 새끼들을...
그리고 정신을 놓고 술독에 빠져버린 내 아들을...
그 시절은 너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져서 지금도 까마득하다. 그 길고 긴 터널을 어찌 지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그래도 확실한 것은 잘 견뎠다는 것이다. 우리 큰아들도, 언니 노릇 톡톡히 한 큰손녀도, 흔들리지 않고 잘 커준 둘째 손녀도.
춘화는 바깥일을 하면서도 애들 밥이며 반찬을 다 해놓고 출근을 했다. 애들이 감자 좋아한다고 채를 곱게 썰어서 볶아 놓고, 메추리알 좋아한다고 한 알 한 알 까서 장조림도 해놓고. 날마다 다른 반찬과 국을 준비해 놓고 일을 갔다. 그때는 온 가족이 똘똘 뭉쳤다. 특히 둘째 동생이정말 애를 썼다. 주말마다 카니발에 가족들을 다 싣고 횟집에 고깃집에 데리고 다니면서 밥과 술을 사줬다. 애들도 우리를 위로한다고 코 묻은 돈으로 밥을 사고 술을 사고 아낌없이 다 쏟아부었다. 1차, 2차, 3차까지 꼭 다니면서 노래방도 많이 다녔다. 그럼 제수씨가 술 취한 가족들을 차에 한가득 싣고 집으로 데려다주고, 참 다시없을 일이었다. 그리고 날을 잡아서 모두 싣고 광주로, 여수로 여행을 몇 번 다녔다. 그냥 그렇게 그 시절을 견디었다. 동생이나보다 더 실망하고 눈물을 흘려서 그것도 마음이 아팠다. 큰 조카에게 걸었던 기대가 남달랐던 만큼 더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10년 세월이 죽어 흘렀다.
명절 아침만 되면 둘째 손녀는 제 어미가 생각나는지 울고불고 떼를 썼다. 그럼 카지노 쿠폰 밥을 먹다 속이 상해서 눈물을 훔쳤다. 그 어린 녀석을 달래는 것은 내 역할이었다. 쭈굴쭈굴한 목살을 붙잡고 비비고 끌어안고 하다 보면 가라앉았다. 옆에서 속이 꽉 차서 눈치만 보는 큰손녀가내내 안쓰러웠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것 같아서 미안하고 속이 상카지노 쿠폰. 큰애는뭐든 제 할머니가 해 놓고 간 음식은 다 잘 먹었다. 그것도 얼마나 큰 힘인지 모른다. 그런데 작은 녀석은입 짧은 나를 닮아서 잘 먹지 않았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는 날에는 ‘짜파게티’가 답이었다. 그것을 끓여주면 뚝딱 한 그릇을 먹었다. 어찌 입맛도 나를 똑 닮았는지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큰애가초등학교에 가고 둘째 손녀가학교를 다니면서 사는 것은 차차 숨통이 열렸다. 큰아들도 조금씩 가라앉아서 제 몫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정규직도 되고 승진도 하고 차츰 하늘이 열렸다. 그래도 사람은 절대 안 봤다. 지가 상처받은 카지노 쿠폰 있어서 그렇겠지 싶었지만, 아직 40살도 안 된 놈이 혼자 사는 것을 보는 게 쉽지는 않았다. 중간에 이사도 해서 집을 찾아가면, 흰 빨래를 깨끗하게 빨아서 각 맞춰 널어놓은 카지노 쿠폰...
참 대단하였다.
내 아들이지만 참 대단한 녀석이다.
집에는 먼지하나 티끌하나 없었고, 애들 먹는 것도 탁탁 차려서 먹게끔 챙겨주고. 단 하나, 그놈의 술만 좀 덜 먹으면 싶었다. 젊은것이 어찌 그렇게 술독에서 나오지를 못하는지 그게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다. 재혼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지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인 게... 농협에서는 총각인줄 알고 중매 서겠다는 할머니들이 줄을 섰다고 했다. 성격도 좋고 인물도 안 빠지니 그럴밖에... 무엇이 그렇게 급하다고 서둘러서 저 고생을 하는 것인지...
그래도 손지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없어졌다. 학교를 다니면서 둘째 손녀도 많이 컸다. 초등학교 체육대회와 학예회 발표 날은 빠지지 않고 참석카지노 쿠폰. 나 아니면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열 일 제치고 무조건 갔다. 그러면 애들 얼굴에 그늘이 싹 사라지고 미소가 환하게 올라왔다.
“할아버지!”
하고 달려오는 카지노 쿠폰 어찌나 예쁜지. 내 자식 키울 때도 이렇게까지 예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참 어여쁘다.
그즈음 둘째 아들도 장가를 갔다. 둘째며느리는 우리가 우두망찰 하던 시절에 집까지 와서 일손도 돕고, 가족 식사도 함께 따라다니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 애가 말수도 적고 차분하니 둘째 짝으로 맞았다. 우선 둘이 좋다 하니 그것이면 되었다. 둘째가 결혼하던 때, 끝까지 책임을 지고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부적처럼 들려주었다. 속 깊은 녀석이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둘째네는 자수성가를 카지노 쿠폰. 돈 한 푼 도와준 것도 없는데 지들이 아파트도 사고, 차도 사고, 첫 딸도 낳고, 둘째도 낳고. 부족할 것 없이 착착 잘 살아줬다. 그카지노 쿠폰 참 고맙다.
그리고 그림처럼 큰 아들이 동창이라며 여자 친구를데리고 왔다. 명절 때 동창회를 간다고 하더니 친구 서넛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켰다. 되었구나 싶었다. 둘이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한 것이 그것이면 되었다 싶었다. 이제 애들도 중학생이 되고 했으니, 이렇게 제 인생을 찾아간다면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명절 근처에함께 인사를 왔다. 내가 좋아하는 옷도 사 오고, 모자도 사 오고. 나는 그 무엇보다 며늘아기의얼굴이 반가웠다. 둘은 우리 부부 앞에서
“여봉봉~”
을 찾아가며 엉덩이를 투덕거렸다. 우리 아들의살찐 뱃살도 엉덩이도 예쁘다면서 애정 표현을 하는데, 이것보다 좋은 카지노 쿠폰 어디 있겠는가? 십 년 가까이 지독하게 외롭던 녀석 얼굴에 꽃이 피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자식들이 있어서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이만하면 되었다. 큰 놈은 며늘아기를 만나면서 담배를 딱 끊었다. 그리고 술도 자리를 봐가면서 먹기 시작카지노 쿠폰.
이제 우리 집에도 해가 뜰랑갑다!!
나는 검단이를 더 자주 찾았다. 다기 그릇도 바꾸고 용궁 청소도 더 열심히 하고, 단 위에 있는 낙엽과 먼지도 더 열심히 치웠다. 절은 몇 해 전 찾아온 스님이 계셔서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부산 동생도 지극정성으로 절을 다니고 있었다. 절도 이만하면 되었다. 혹시라도 신명을 모시는 일에 소홀할까 전전긍긍하던 마음도 이제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
동생들도 모두 며느리를 봤다. 사위도 보고. 다들 일가를 이루었다.
그사이 있던 모든 일들을 어찌 하나하나 다 담을 수 있겠는가?
그저 기억나는 대로 주억주억하는 카지노 쿠폰지.
이제 남은 숙제는 춘화의 아픈 무릎과 저린 손이었다. 무릎이 아파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출근하던 뒷모습을 보자면 마음이 아팠다. 한 번은 빙판에서 넘어지면서 발목이 상해 6개월 가까이 병원 신세도 졌었다. 그때도 딸들이 옆에서 병수발을 했다. 이제는 무릎을 고쳐야 해서 좋은 병원을 찾아 입원을 시켰다. 내가 걱정된다면서 미루려고 하는 것을 설득하고 설득해서 입원하게 했다. 하필 그때 코로나가 와서 옆에 보호자를 둘 수 없다 하여 간병인을 사서 붙여주었다. 자식들 모두 돈을 벌고 있으니 전담해 줄 사람이 없었다. 날마다 기도를 올리고 또 올리면서 춘화가 퇴원하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몇 개월 후 반대쪽 다리도 수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야무진 춘화는 제 병원비도 알아서 마련하였다. 없는 살림에 보험을 넣어 놓았던 것이 아주 요긴하게 써먹어졌다. 그렇게 두 무릎과 두 손목 수술도 해주었다. 아프다고 해도 수술 전보다는 덜 아프다 하니 아주 잘한 일이었다. 옆에서 처제부부가 애를 썼다. 둘째 동생도, 제수씨도 나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엇보다 명숙이 동생이 하루면 두 번씩 절을오고 갈 때마다 먹을 것도 챙겨주고, 따끔하게 혼도 내면서 나를 챙겨주었다. 동네 어르신들도 많이 찾아와 주셨다. 특히 사돈이 먹을 것을 많이 해다 주셨고, 뒷집 동생 내외가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주었다.
주말이면 딸들도 먹을 것을 챙겨 나와 춘화를 번갈아 가며 찾아왔고, 둘째 아들이 먹을 것을 잔뜩 챙겨서 손자들을 데리고 와주었다. 큰 아들은 전화도 자주 하고 병원도 데려가 링거도 맞혀주고 애를 썼다. 형님과 서울 동생, 여동생도자주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물었다. 그 와중에 큰아들은 승진을 해서 공장장으로, 또 승진해서 상무로, 지금은 지사장이 되었다. 큰손녀는 대학을 졸업해서 치위생사로 근무하였고, 둘째 손녀는 대학교 장학생이 되었다.
참. 고맙고.
착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둘째 아들도 승진을 해서 차장이 되었다. 다음에는 부장을 더 시키고 싶은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으니 그저 건강을 바랄 뿐이다. 큰딸도 승진을 해서과장이 되었다. 대학을 못 보낸 것이 한이었는데, 지가 열심히 해서 자꾸 올라가니 그 또한 되었다. 막내는 고전 문학으로 박사를 땄고, 지금도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친다. 아비를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논문을 써서 들고 오던 날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
지금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손지들이 학자의 길을 갔으면 싶다.
2023년 12월에 명숙 동생이 절을세웠다. ‘만인의 절’이라며 십시일반의 마음을 모아 절을 창건했다. 대단한 일이었다. 한평생 창건주가 된다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은행 빚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없는 형편에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목탁을 치는 것이었다. 그해 12월부터 시작해서, 아침 예불을 지금까지 계속 올리고 있다. 내가 카지노 쿠폰하는 나의 귀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해서, 죽을힘을 다해 염불을 하고 있다. 이 터전이 명당이 되어 만인을 위로하길!하루빨리 일어서게 해 주십사 빌고 또 빌었다. 한평생 절에서 커서 절에서 저물어가는 것도 영광이다. 만인을 위하고 달래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지금도 명숙이 내외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돕는다. 쉬는 날이면 새끼들이 다 이 법당으로 찾아온다. 카지노 쿠폰 무릎 꿇고 옆에 앉아서, 내 불경과 목탁 소리에 맞춰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요즘에는 사는 카지노 쿠폰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만하면 한생 푸짐하게 살았구나.’
이 년 전 가을, 검단사에 올라갈 때,딸들이 이것저것 물은 적이 있다. 춘화의 수술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공양을 올리러 가던 길이었다. 숨이 차서 열 걸음에 한번씩 쉬는데도, 양옆에 딱 붙어서 조잘조잘 어찌나 말을 시키던지... 듣고 있노라면 내가 몇 걸음 걸었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때 물었더랬다.
“아빠, 아빠는 다음에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 고모는 큰스님이 되고 싶대.”
참 맑은 눈으로 호기심 어리게 물었었다. 순간 뭐라 대답을 할까 고민하는데... 녀석이 다시 물었다.
“큰 스님이 되고 싶어? 아니면 공부하고 싶어?”
평생 못 배운 한이 큰 것을 알아서인지 잘도 물었다. 뭐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아빠는 공부하고 싶어. 학생 가르치고 싶어.”
이렇게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카지노 쿠폰.
다음 생이 있다면 공부를 실컷, 아주 마음껏 하고 싶다.
부모, 동생, 처자식도 다 귀하지만. 양껏 공부하고 난 후에 그걸로 후학을 가르치고 싶다.
감히 나에게 다음이 주어진다면...
‘천지신명님! 제가 그럴 수 있겠지요?’
눈송이가 폴폴 날리는,
하늘 파랗고 드높던 날이었다.
여든이 넘게 살아보니 사는 것은 이득이다. 참 많이 남는 카지노 쿠폰다.
“모다들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 어쨌든 행복한 사람 되어서 잘 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