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같은 빨간색은 없다.” 색조 화장을 하는 친구들에게서 자주 듣던 말이다. 같은 빨간색 계열이지만 각자 다 다른 발색을 하고 있다나. 내 눈엔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지만, 그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눈총을 맞을 게 뻔하다. 생전 색조 화장을 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할 일이 없는 나는 도통 모를 일이지만, 색조 화장과 친숙한 사람들은 그 색이 그 색이 아니라는 것을 너끈히 안다. 그들은 각 색의 개성을 꿰뚫고, 심지어는 그 색만의 개성도 끌어낸다. 혹 나같이 모르는 사람이 그 앞에서 다 같은 계열이라고 한꺼번에 ‘빨간색’으로 치부해 버리는 순간, 그들은 대개 분노한다. 불편이 아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한 듯이 그들은 분노한다.
‘분주함은 악에 가깝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세상에 쏟아지는 일은 너무나 많고, 쏟아지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참 바쁘다. 양은 방대하고 일은 밀려있고 속도는 빠르고 마음은 급하다. 분주함은 하나와 개인과 순간에 침잠하도록 두지 않는다. 하나와 개인과 순간에 머무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와 개인과 순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분주함에 휘말려 하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분명 개인의 색을 보는 눈을 잃게 될 것이다. 하나를 하나로 보는 데 무뎌질 것이다. 하나는 결국 빨간색이 될 것이고, 개인은 결국 무리와 같은 계열이 될 것이고, 오늘의 햇빛은 결국 어제의 햇빛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색을 완전히 가린 분주함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당연한 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너는 하나가 아니라 빨간색이라고.
색조 화장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이 간단한 진리가 우리 함께 사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쓰다. 같은 계열처럼 보여도 분명 각자가 가진 발색이 있다. 그 발색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와 개인에 침잠해야 한다. 시간을 내어 깊이 있게 바라봐야 한다. ‘나는 나, 너는 너, 그래서 우리.’라는 어울림은 상대를 잠잠히 침잠하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