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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찌 May 01. 2025

사랑은 카지노 게임 될 수 있는가?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그리고 진실 위의 정치

1. 마마마에서 시작된 질문 — 구원의 카지노 게임 vs 사랑의 카지노 게임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는 절망을 구조화한 드문 작품이다. 희망은 반드시 절망으로 귀결되는 세계에서, 소녀들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주인공 마도카는 신이 되어 세계의 법칙을 바꾼다. 이 결말은 비극을 해결한 듯 보이지만, 실은 시청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절망은 피할 수 없지만, 아주 특별한 누군가라면 이를 제거할 수 있다고.


현실의 나는 마도카가 아니다. 마법소녀도, 신도 아니며, 절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만 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런 나에게 《마마마》는 “절망해도 괜찮다”는 말 대신, “희망은 가능하다, 단 너는 아니야”라는 메시지만 남긴다. 이 결말은 구원의 구조를 말하면서, 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엄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 등장하는 것이 호무라의 반역이다. 그녀는 마도카의 선택, 즉 ‘완전한 구원’을 거부하고, 마도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으로 존재하길 바란다. 그녀는 마도카의 결정을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그래서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너의 결정이 아니라, 너의 존재를 사랑해.” “네가 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세계 전체를 반역하겠다.”


이 반역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두 가지 카지노 게임의 충돌이다.


구원의 카지노 게임는 목적론적이다. 고통은 제거되어야 할 ‘문제’이며, 인간은 그 고통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기능화된다. 구원이 완수되면 그 주체는 종종 버려진다. 마치 전쟁이 끝나면 전쟁 영웅은 필요 없어지는 것처럼, 구원의 카지노 게임는 비상 상황에서만 작동하고, 고통이 끝난 후에는 함께 퇴장한다.


반면 사랑의 카지노 게임는 존재론적이다. 고통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그 곁에 머문다. 인간은 어떤 상태이든 수용 가능한 존재이며, 관계와 응답이 카지노 게임의 중심이 된다.


이 두 카지노 게임는 뿌리부터 다르다. 구원의 카지노 게임는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묻는 반면, 사랑의 카지노 게임는 “너니까”라고 응답한다. 전자는 판단 위에 세워지고, 후자는 존재 위에 세워진다. 구원은 고통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사랑은 고통과 함께 머무른다. 구원은 목적과 기능을 중시하고, 사랑은 관계와 감각을 중시한다.




2. 사랑의 카지노 게임는 왜 더 근본적인가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사랑의 카지노 게임가 구원의 카지노 게임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사랑은 고통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구원의 카지노 게임는 고통이 전제되어야만 작동한다. 상태가 정상화되면, 구원자는 퇴장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고통이 지나간 뒤에도 존재를 붙든다. 구원자는 문제가 해결되면 사라지지만, 사랑하는 자는 결핍이 없더라도 곁에 남는다. 사랑은 결과의 카지노 게임가 아니라 관계의 카지노 게임다.


둘째, 사랑은 논리적 순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구원은 항상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카지노 게임적 기준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 상태는 고통스러워 고쳐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라는 판단은 다시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란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카지노 게임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구조는 카지노 게임적 질문에 카지노 게임적 질문으로만 답하는 순환에 빠진다. 카지노 게임를 정당화하려면 또 다른 카지노 게임를 호출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기준이 아니라 응답으로 시작된다. “너는 너로서 존재하고, 나는 그것에 응답한다.” 이 응답은 그 어떤 조건도, 해석도, 우선적 가치 판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카지노 게임의 원초적 형태이며, 카지노 게임 이전의 감각이고, 관계 속에서 도출되는 존재의 인식이다.




3. 사랑의 카지노 게임는 위험하다 — 그래서 정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존재론적 포용이 언제나 카지노 게임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네 동성애를 병으로 생각하지만, 받아줄게.”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야.” 이러한 말들은 사랑의 형식을 한 억압이다. 진실에서 멀어진 응답은 동정을 가장한 동화가 되고,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 된다.


카지노 게임가 사회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형식과 제도적 비판 가능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실현을 위한 정치적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는 부분집단의 가치에 무관심해야 한다. 국가는 ‘좋은 삶’을 판별하지 않고, 존재 자체를 수용하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누구의 삶이 더 나은 삶인지에 대한 논의 없이, 다양한 존재가 평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둘째, 정치는 다양성을 억압하는 가치를 제재해야 한다. 혐오 표현, 강제 동화, 차별 구조는 다양성의 형식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포용을 해치는 배제는 공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자유는 반드시 공존의 규칙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셋째, 정치는 진실 기반의 의견만을 수용해야 한다. 종교, 학문, 예술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건전한 양심에 기초하지 않은 왜곡된 주장은 통제되어야 한다. 진리를 빙자한 사이비 종교, 통제를 목적으로 한 거짓 담론은 공론장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원칙은 사회민주주의 체계에서 가장 실현 가능하다. 스웨덴은 복지와 다양성의 조화를 이루려 했고, 독일은 자유와 보호의 균형을 꾀했으며, 캐나다는 다문화주의와 차별 규제를 병행했다. 이들은 모두 사랑을 정치로 끌어내려 한 실험들이었다. 물론 모두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투입해야 했고, 결과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시도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4. 결론 — 진실 위에 선 사랑만이 카지노 게임 될 수 있다


우리는 마도카의 구원이 아니라, 호무라의 반역에 더 가까운 존재다.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누군가의 존재를, 그대로 품을 수는 있다.


사랑은 카지노 게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진실을 외면하거나,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거나, 관계 없는 추상으로만 머문다면, 결코 카지노 게임가 될 수 없다. 진실 위에 서고, 스스로를 되묻고, 관계 속에서 출발하는 사랑만이 카지노 게임가 될 수 있다.


정치는 존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이 제도화되기 위해서는 자유와 형식, 진실과 무관심의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선언이다. 팩트에 기반한 정책, “절망해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정치, “너는 너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카지노 게임. 그것이 사랑의 카지노 게임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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