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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찌 May 02. 2025

카지노 게임 윤곽선으로서의 약함

니체의 초인을 넘어서 자유로

현대인은 니체의 사생아이다. 그리고 그 사생아는 불행하다.


서론: 초인은 더 이상 유효한가?


프리드리히 니체는 절대선, 영원성, 시공간적 초월성, 전지전능함 같은 속성을 지닌 신 개념이 인간을 억압한다고 보았다.

그러한 신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강제하며, 인간을 외부 권위에 종속시키는 도구로 기능한다.

『즐거운 학문』에서 그는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니체에게 신의 죽음은 해체가 아닌 창조의 조건이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카지노 게임, 초인(Übermensch)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초인은 고통을 자기 극복의 동력으로 삼고, 신이 차지하던 가치를 자기 삶의 방식으로 대체하는 카지노 게임이다.


그러나 나는 묻고자 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초인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 질문은 니체의 철학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철학이 제안한 형이상학적 방향성 자체가 현대 사회에 부적합하거나 위험한 이상이 된 것은 아닌가를 묻는 것이다.

나는 초인이 더 이상 인간 카지노 게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며, 오히려 고립과 자기기만, 괴로움의 재생산을 촉진하는 구조로 변질되었다고 본다.


나는 니체의 초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현대 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그 결과를 검토하며,

그 대안으로서 ‘실존적 개방성’을 포함한 ‘약함의 감각’을 통한 자유를 제안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 대안은 니체가 비판했던 노예 도덕과도 다르며,

사회적 가치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초인과도 명백히 구분된다.

나는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 사회적 연대, 감정적 의존 속에서 살아가는 카지노 게임임을 긍정하며,

심리적 자유는 사회적 가치의 극복이 아니라, 투명한 카지노 게임감 속에서 성립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 글은 초인을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1. 살아남은 초월성과 초인의 민낯


니체는 신적 초월성을 부정했으며, 초인을 통해 인간이 기존 가치 체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거부한 이후에도 여전히 ‘타자를 넘어서는 카지노 게임’를 욕망한다.


신은 사라졌지만 초월에 대한 갈망은 살아남았고, 오늘날 현실적 초월성(성공, 이상적 삶)으로 재구성되었다. 그것은 미디어 속 타인의 성공, SNS 피드 속 이상적인 삶이다.

과거의 신은 감각할 수 없는 카지노 게임였기에 도전하거나 거부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초월성은 너무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오히려 도달 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곧바로 비교와 박탈감, 자기의심으로 이어진다.

즉 인간이 도달할 수 없어야 초월성이 초월성으로 남는데, 현대의 초월성은 ‘가능해 보이는 초월성’으로 변형되어 인간을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강박 속에 가둔다는 점에서 신보다 더 위험하다.


인간 카지노 게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자기 인식조차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타자의 시선, 언어, 인정은 인간 정체성의 기반이다. 니체의 초인이 ‘사회적 카지노 게임성을 가진 인간이 기존의 평가 구조를 넘어 자기만의 평가 체계를 세우는 카지노 게임’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회적 가치의 극복이 괴로움을 재생산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인간은 사회적 기준과 비교 구조를 초월하려 할때 오히려 이를 더 강하게 인식한다. 따라서 초인이 되고자 하는 시도는 끊임없는 타자 비교와 자기의심 속에서 왜곡된다.


니체가 상정한 초인은 스스로의 고통을 긍정하고 독립적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카지노 게임였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초인은 타인의 기준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자기긍정조차 자기기만으로 느끼게 되는 고립된 인간상으로 변질되었다.

타자의 기준을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끊임없이 타자와 비교하고 타자의 인정 욕구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기긍정은 외부 평가에 의해 조건부로 유지되는 자기기만이 된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재생산이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초인의 민낯이다.




2. 약함의 감각 — 카지노 게임 윤곽


나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의 자유와 자기긍정의 시작이 강함이나 창조성이 아닌 약함의 감각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약함’은 단순한 무기력이나 열등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한계를 능동적으로 감각하고 수용하는 실존적 태도이다.

이루지 못함, 끝까지 가지 못함, 타인보다 뒤처졌음을 외면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며 자신을 통과시키는 감각, 그것이 내가 말하는 약함이다.

그리고 이 체험은 단순히 사라지지 않고, 기억으로 남는다.


자기 카지노 게임는 강함의 순간보다 무너짐의 기억 위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기억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자기 카지노 게임의 가장자리이며, 정직한 윤곽선이다.

약함을 감각한 자는 “나는 이 정도까지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은 체념이 아니라 카지노 게임 투명함이다.

자기긍정은 이런 윤곽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때 얻는 자유는 더 이상 ‘선택의 폭’이나 ‘독립성’이 아니다.

자유란 비교와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실패의 기억을 껴안고, 자기 카지노 게임를 긍정할 수 있는 상태다.

이러한 자유는 현대의 초인을 따르는 이들이 고통의 극복을 통한 자기창조의 과정에서 겪는 부작용을 극복한 개념이다.




3. 약함의 공유 — 사회적 동물의 실존


자기긍정은 내면에 고립될 때 완결되지 않는다.

약함이 카지노 게임 윤곽을 감각하는 일이라면,

실존적 개방성은 그 윤곽을 타자 앞에 감추지 않고 내보이려는 용기다.


실존적 개방성은 공유 가능한 약함의 기억에서 비롯된 투명한 카지노 게임 태도다.

무너짐의 기억을 드러내는 것은 고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실존적 해방의 선언이다.


약함이 나를 나로 받아들이는 행위라면,

실존적 개방성은 나를 감추지 않겠다는 조건이다.

그것은 완성된 인격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살아가려는 카지노 게임 태도이며,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극복의 시작이다.


약함의 공유는 항상 좋은 결과를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약함을 경멸하거나, 악용하거나, 무관심하게 방치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내는 용기 자체가 자유의 열쇄가 된다. 즉 약함을 드러내는 행위는 ‘좋다’기보다는, 인간 카지노 게임의 구성상 회피할 수 없는 필연적 과정이다.




결론: 우리는 초인이 아니라, 실패를 나누는 카지노 게임가 되어야 한다


자유는 강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너졌기 때문에, 그 무너짐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취득한 행복이다. 우리는 초인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한계]
지금까지 나는 실존적 개방성을 포함한 약함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심리적 자유가 가능하더라도, 사회적 자유까지 도달하는 건 또 다른 투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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