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몽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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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Apr 28. 2025

나선형 터널 #1

1.

사각사각. 참외 껍데기를 깎는 소리가 병실의 적요를 갈라놓았다. 참외는 누군가 주삿바늘을 꽂았던 것처럼 군데군데 검은 점이 박혀있었다. 그것이 과일의 당도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여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암담한 바다의 밑바닥에 서식하는 석화처럼 굳게 다문 여자의입에서는 가느다란 호흡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여자가 아버지에게 참외를 먹여야겠다고 마음먹은 건순전히 어머니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침밥 대신에 과일 몇 조각으로 끼니를 시작하는 것이 꽤 오랜 버릇이라는 것도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 앞에서 손 때 묻은 낡은 과도의 무딘 칼날로 묵묵하게 과일을 자르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예삿일처럼 보여주지는 못했다. 사각사각.여느 때처럼참외 껍데기는 나선형으로 깎이고 있었다. 여자는 모든 과일을 나선형으로 깎았다. 조금이라도 끊어지지 않고 껍데기를 모두 깎으면 구원이라도 받는 것처럼 그녀는 시간을 들여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서 과일 껍질을 잘라내었다. 툭. 참외 껍데기가 병실바닥에 떨어졌을 때 여자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 작은 소리에 행여나 아버지가 깨어났을까 봐. 하지만 아버지는 평온하게 누워있었다. 여자는 다시 바닥을 쳐다보았다. 나선형으로 깎여 나온 참외 껍질은 흐트러지지 않고 차가운 병실바닥에 구멍을 뚫을 기세로 노란색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침묵과 갈등의 소용돌이. 고통과 폐허를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아래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떨어진 참외 껍데기를 줍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그녀의 비명이 들려오는 그 작은 노란색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과도를 쥐고 있는 손떨림은 핍색한 세월을 관통한 노인의 거친손처럼 보였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엷은 쪽빛에 비친 여자의 손은 노인들처럼 살비듬이 얹혀 있었다.그곳에는 여자가관통해사납고 고약한 세월이 굳은살이 되어박혀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참외 껍데기는 그 손으로 하여금 휴지통에 옮겨졌다. 여자는 하얀 알몸의 참외를 반으로 잘랐다. 평소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참외였다. 예배가 끝나면 아버지는 목사실에 비치된냉장고에서 신도들이 가져다 놓은 참외를 꺼내서 드시곤 했다. 어릴 적 기억이 맞다면 참외의 속을 무조건 발라서 드셨던 아버지였다. 여자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서 참외 속을 모두 긁어내고 작게 조각내어 접시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가래처럼 물컹거리는 참외 속을 물티슈로 감아서 휴지통에 버렸다. 하얀 접시에 담긴 하얀 참외는 하얀 바탕의 접시때문에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지않아서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눈을 감은 여자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족의 품 안에서 만들어진 악몽 같은 시간을 지워버리기 위해 홀로 견뎌온 세월이누워 있는 아버지 앞에서 파도처럼 하얗게 부서졌다.하지만 여자의 발치에는 여전히 새파란 시간들이 물들어 있었다.발치에서 일렁이는 검고 푸른 시간들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듯이 자신이 깎아 놓은 참외 역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무연히 바라보면서 여자는 이쑤시개로 참외를 푹 찍어서 자신의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지금 이 시간 아버지가 꾸는 꿈을 상상하면서 여자는 말없이 참외를 씹었다. 짧은 저작운동 때문에 참외 조각은 식도를넘어가지 못하고 이내 손에 뱉어져서 휴지통에 버려졌다. 여자는 물컹거리는 하얀 것들을 보자 욕지기가 솟구쳤다. 그리고는 잽싸게 화장실로 뛰어가서 수돗물로 입 안을 헹구었다. 내친김에 차가운 물로 세수도 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붉게 충혈된 두 눈에 실핏줄이 곤두섰다. 두 눈에는 참기 힘든 증오와 혐오감이 부패한 송장의 뱃가죽처럼 부글부글들끓고 있었다. 여자는 젖은 옆머리카락을뒤로 넘기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젖은 얼굴을 휴지로 대충 닦고서 다시 병실로 향했다. 터벅터벅. 지친 여자의 힘겨운 발걸음에는 희미했던 어릴 적 기억이 따라붙었다. 기억은 희미해진 것이 아니라 관음증 환자처럼한 꺼풀 뒤에 숨어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참외를 먹었던 모습을 잊지 않았다.


2.

아삭아삭. 여자 꿈속에서는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불결하고 불쾌하다. 아삭아삭. 소리는 점점 더 커지면서 여자를 절망으로 물들여 간다. 자신의 입 속에서 나는 소리인지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여자는 식별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꿈속에서 여자는 검은 천으로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삭아삭. 농밀한 어둠 속에서 여자는 자신의 몸을 볼 수 조차 없다. 아삭아삭. 혐오스러운 소리가 여자의 몸에 균열을 새겨 넣는다. 아삭아삭. 여자의 몸에 새겨진 균열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아삭아삭. 여자는 자신이 수 백개의 조각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낀다. 아삭아삭. 맹렬히 퍼져나가는 하얀빛을 껴안고 여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아삭아삭. 여자는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아삭아삭. 보이지 않는 깊은 수렁 속은 살갗이 데일만큼 뜨겁다. 그 열기가 여자의 몸에화상火傷 과 악취를 남긴다. 아삭아삭. 여자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풀린다. 아삭아삭. 명순응이 더딘 탓에 이곳이 어디인지 식별할 수가 없다. 아삭아삭. 불길한 소리는 그녀의 몸을 더욱 거세게 조여 온다. 아삭아삭. 여자는 절망으로 물들여진 자신의 검붉은 몸을 마주하며 몸서리친다. 아삭아삭. 절망으로 가득한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다가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녀가 드디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삭아삭. 자신의 입에서 아삭아삭 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여자가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는 창 밖은 여전히 고요했고 짙은 어둠의 여백뿐이었다. 현실의 시제는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는 중이었고 그녀는 악몽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악몽의 여운이 음침하게 그녀의 가슴에 깃들어있었다.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녀의 평균 수면시간은 결코 그것을 상회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불면증이 그녀의 삶에 끼어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여자는 불면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시달린다는 것 자체가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는 반증이었고 기억이었다. 여자에게 있어서 시달림이 주는 괴로움은지나간 기억이었고 성가심은 황급히 다가온 미래였다. 눈앞에 놓인 현실을 관통하는 것. 그렇게 관조된 시간을 기록하는 것이 여자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여자는 어둠 속에 기대어 홀로 중얼거렸다. 조금 돌아왔을 뿐이야. 한 번에 가기엔 너무 높은 곳이니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언어는 조각칼이 되어 방 안의 어둠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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