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몽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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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Apr 28. 2025

나선형 터널 #3

5.

병실에서 도난 사고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옆자리의 모녀가 입실했을 때부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4인 병실에는 얼마 전 뇌출혈 수술을 받은 60대 여성과 그녀를 간호하는 딸이 입실했다. 60대 여성은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거동할 수 조차 없었고 왼쪽 얼굴이 마비되어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딸은 여자와 동년배처럼 보였으나 동글동글한 이마와 하얀 피부에 가느다란 눈웃음 때문인지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고 생김새와는 다르게 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외형과 대비되었다. 하지만 낮게 깔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꽤나 매력적이어서 여자의 귀전을 간간히 간지럽히고는 했다. 엄마가 혈압이 좀 높으신데. 최근에 충격받는 일이 생기셔서 그만. 그들이 입실한 날 딸이라는 여자는 병실에 환자들에게 자신들의 자초지종을 늘어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여자의 낮은 목소리는 아교가 되어환자들을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병실의 환자들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씩 건네며 그녀를 달래주었고 각자의 상황들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조금씩 의지하게 되었다.공교롭게도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모두 60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화합을 이끌어낸 것은 만성화되어 있는 동병상련이었다. 다행히도 그 낡은 마음들은 병실 내에 환자들에게 자포자기식의 절망감을 지워내면서 인생이 우연히 던져준 불운쯤은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는 선량함과 성실함을 일깨워주었고 신념과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병실 내 환자들은 새로 입실한 모녀 덕분에 힘들고 벅찬 투병생활에 조금이나마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여자의 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것이 여자의 누선을 자극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 날 여자는 머리를 감기 위해 병상 밑에 놔두었던 욕실바구니를 끄집어냈다. 욕실바구니에 있어야 할 샴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잠시나마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지만 가방 속에 들어있던 마트 영수증에 찍힌 샴푸 구매의 내역 덕분에 의심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둘 수 있었다. 그날 여자는 병실에서 중저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동년배의 여자에게서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었고 본능이었다. 그녀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징조였고 전갈이었다. 여자는 확실한 증거를 손에 쥘 때까지 침묵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한 분란을 일으켜서 병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일주일 뒤에 옆자리에서 주스박스가 분실되었고 그다음 주에는 누군가의 지갑에서 주민등록증만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자신의 생리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여자의 확신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일에 적잖이 당황했고 병원 보안 카메라의 녹화본을확보하려고 했으나 병실 내에는 카메라가 없을뿐더러 보안 카메라는 병원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할 수 없다는 병원 측의 통보가 이어졌다. 고가품이나 금품을 도난당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땅히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날 저녁 여자는 자신의 불면을 이용해서 동년배 여자에게 겨누어진 불투명한 의혹을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확신으로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6.

여자는 또 한 번 세 시간의 질 떨어진 수면을 취하고 눈을 떴다. 오래된 수면습관이라서 그런지 정신은 혼몽했지만 팔다리는 가볍게 느껴졌다. 여자는 아버지의 병상 밑에 놓인 간이침대에 누워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검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 밖의 암흑은 발을 질질 끌며 거친 숨소리를 내쉬었다. 푸른 어둠을 오만하게 비추는 차가운 달빛이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여자의 몸속에 스며들었다. 여자는 순간 섬뜩해졌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허무함이 여자의 눈앞에 길게 가로놓였다. 가늘게 시들며 말라가는 지금의 시간들이 야멸차게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푸른 어둠과 하얀침묵 속에서 여자의 시간은 뼈저린 궤도를 그려냈다. 여자는 목적지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은 원래 목적지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목적지가 알게 모르게사람을 주고받는 것인가. 인간이 목적지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아니라 출발할 곳과 도착할 곳이 사람을 주고받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삶이란 언제나 예기치 않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닐까. 여자는 자신이 도착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선회하고 있다는 것도. 여자가 한 동안 생각에 잠겨있을 때 병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병실의 적요를 가르지 못할 정도로 작게 들려왔다. 누군가 맨발로 걷고 있는 것처럼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슥슥. 발소리가 자신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이질감이 묻어있는 체온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여자는 하얀 발끝이 아버지의 병상 쪽으로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는 여자의 나일론 가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병상 옆에 비치된 서랍장에서 누군가가 여자의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여자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일어났다. 어두운 병실에서 누군가 자신의 가방을 뒤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여자는 드디어 확신할 수 있었다. 저기요. 여자의 음성이 적요를 갈랐다. 가방을 뒤지던 가냘픈 몸이 순간 굳었다.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가방을 뒤지던 얇은 손목을 낚아채서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낚아챈 손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끝까지 걸어간 뒤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가장 안쪽에 자리한 칸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손목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는 의심을 거두고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동년배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눈빛으로 그녀를 추궁했다. 죄송해요. 생리만 시작되면 나도 모르게 무언갈 훔치고 싶어 져요. 오줌을 오래 참으면 노상방뇨라도 해야 되는 것처럼 눈앞에서 가장 가깝게 있는 곳들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종의 정신병 같은 거예요. 고의적으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가버려서. 여자는 울먹이면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여자는 같은 여자로서 호르몬에 의해 작동되는 여성의 신경계를 안타까워하며 동년배의 여자의 어깨를 다독였다. 여자는 변기레버를 눌렀다. 중저음의 울음소리가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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