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오늘은 금요일. 원어민 수업이 하루에 세 시간 남짓이니 물리적으로는 그리 부담되지 않지만, 몰타에서 다섯 달 넘게 생활하다 보니 매주 금요일마다 ‘오늘은 그냥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다. 그럼에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수업을 빠진 적은 없었다.
요즘은 여름이라 날씨가 덥고, 티처 아미라는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퀴즈나 게임으로 도입부를 꾸리는 경우가 많다 보니 수업 분위기도 조금은 느슨해진다. 덕분에 나도 함께 나태해질 뻔하다가,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티처 아미라가 아파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반과 합반해 수업을 대신 진행하게 되었고, 평소보다 인원이 두 배가 넘어 대타 선생님도 힘들어 보였다. 목이 아픈 듯 말을 아끼고 얼굴에도 피로가 역력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태어난 언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이 다 알아듣지 못하니 한 말을 두 번, 세 번씩 반복해야 하고, 학생마다 이해 속도도 달라 에너지 소모가 클 것이다.
‘오늘은 인내심을 갖고, 가볍게 수업에 집중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수업을 따라가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 같은 학생들끼리 1층 로비에 모여 모국어로 푸념도 나누고, 주말 계획이나 여행담도 이야기하며 30여 분쯤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7월 중순. 한낮의 열기는 점점 극심해져 간다. 에어컨을 켜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자연스레 잠이 쏟아진다. 이따금씩 2시에 잠들어 두세 시간씩 자거나, 거의 반나절을 자버리는 날도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점심식사 후 ‘시에스타’를 즐긴다는 게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낮잠을 자고 나면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아 아깝기도 했다.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대부분은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만 약속이 잡혀 있어, 당장은 함께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혼자 집에서 30분 거리의 바닷가로 수영을 가기로 했다. 더위를 피해 오후 5시쯤 길을 나섰다.
조금은 걷고, 버스를 타고 도착한 바닷가. 혼자 나왔지만 주변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혼자만의 바다수영을 즐기며 오히려 여유롭고 괜찮은 시간이었다. 잠수도 하고, 먼바다 쪽까지 가보기도 했다. 이제는 파도가 쳐도 당황하지 않고, 물을 먹는 일도 없다. 바다 수영 실력이 꽤 늘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근처에 해양 구조대와 감시탑이 있기에 너무 멀리 나가지는 않았고, 수영 제한 구역은 넘지 않도록 조심했다.
1~2시간 정도 수영을 즐기고 나니, 기분 좋은 피로가 밀려왔다. 운 좋게도 버스가 제때 와서 오랜 기다림 없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녁 8시경,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에 콜롬비안 아벨미와 칠리안 알바로가 나와 있었다. 평소엔 잘 볼 수 없는 풍경이라, ‘무슨 일이지?’ 싶기도 했지만, 기분은 꽤 좋았다. 특히 평소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아벨미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알바로가 옆에서 질투라도 하는 듯, “아벨미, 아벨미, 아벨미~”라며 시샘 섞인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솔직히 이 집에 사는 세 사람이 서로 잘 어울려 지내면 가장 좋겠지만, 알바로는 평소에 항상 자기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식사 때나 간간이 나왔다가 들어가거나, 외출 후 돌아올 때만 모습을 드러냈다. 아벨미나 나에게 무관심한 편이었다.
알바로의 이런 성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렇게 셋이 함께 있는 순간이 반가웠고, 아벨미와 알바로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며칠 전 사온 와인을 함께 마시자고 제안했다. 아벨미는 흔쾌히 응했지만, 알바로는 역시나 단칼에 거절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크든 작든, 매번 어떤 제안이든 거절로 일관하니 때론 조금 섭섭했다. 그러면서도 나와 아벨미 사이에 질투를 보이는 걸 보면, 왜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하기 어렵웠다.
사람 셋이 살다 보면 편이 나뉘는 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알바로에게도 다가가려 여러 번 시도했다. 음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대화를 유도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차가운 반응만 돌아왔다. 그러면서 자신이 따돌림당한다고 느낀다면,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낯선 나라에서, 몇 달간 같은 집에서 살아가는 것도 일종의 가족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알바로는 “너는 네 고국에 가족이 있지 않느냐”며 단번에 그 말을 부정했다. 옆에 있던 아벨미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몰타에서의 나의 가족’이라는 표현으로 말을 바꾸었지만, 알바로는 묵묵부답이었다.
알바로는 지극히 자기 삶에만 집중하는 사람이다. 집 안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고, 주로 친구를 만나러 밖으로만 나돈다. 나는 45세의 나이로 살아오며 가족과 친구, 그리고 공동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감정을 터뜨리면 괜한 싸움이 될까 싶어 늘 자제해 왔다.
내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 수도 없고, 또 그런 말이 외국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알바로 단둘이 집에 있었던 일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알바로가 거실에 나와 있었고, “집에 있었네” 하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알바로가 영어 원어민 학원을 다녔음에도 나랑 일상적인 쉬운 대화도 어려울 정도로 진척이 늦은 편이라 더 이상은 대화가 어려워 서로 묵묵히 자기의 저녁식사만 준비를 하다가 알바로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알바로가 말했다.
“카지노 쿠폰 never lose.”
내 성격이 그렇다고 했다.
뜻은 알고 있었지만, 혹시 내가 잘못 해석할까 싶어 바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점점 불편해졌다. 나는 나와 아벨미가 그에게 더 많이 배려하고 양보하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런 나를 두고 ‘절대 지지 않는 성격’이라고 단정하는 알바로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가르칠 입장도 아니고, 또 그가 그렇게 쉽게 변할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알기에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그는 8월이나 9월쯤 몰타를 떠날 예정’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터치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아벨미에게 계약 종료일을 물었지만, 그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