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신고 청계산 간 딸
“엄마, 이번 주 토요일에 친구랑 청계산 가기로 했어!”
큰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빠가 소원이라며 그렇게 애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딸이 웬일인가. 그런데 가만, 얘가 등산화도 없고 등산복도 없는데 뭘 어떻게 가겠다는 건지.
“괜찮아. 그냥 운동화 신고 오리털 파카 입고 가면 돼.”
그때부터 폭풍 잔소리를 시작했다. 산이 그렇게 만만하냐, 특히나 겨울산을 위험하다, 장비 없이 갔다가 큰코다친다…. 딸이 웃는다.
“엄만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그래, 백날 얘기해 봐도 소용없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이것만은 꼭 가져가라며 애원했다. 아이젠! 안 가져가면 널 따라갈 거라 협박을 해댔다. 마지못해 아이젠을 집어넣는 딸. 산 아래서 친구 카지노 쿠폰젠도 꼭 사라고 신신당부했다.
친구들과 관악산을 걷고 있는데 큰딸이 문자를 보냈다.
“엄마, 청계산 도착. 날씨 너무 좋아. 따뜻해. 바람도 안 불고. 잘 다녀올게.”
장갑과 목도리, 물, 사과, 곤약젤리도 야무지게 가방에넣었다고 했다. 발 디딜 때 조심하고 특히 하산 때 집중해서 내려오라는 조언을 남겼다.
관악산 능선에 올라 사방을 둘러봤다. 음, 상쾌한 공기! 딸의 말처럼 진짜 봄날 같다. 오늘따라 하늘 색깔이 유난히 파랗다. 한겨울 날씨가 이 정도라면 등산하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다 싶다. 고개를 돌려가며 서울 시내와 과천 경마장도 훑어보다 산허리 응달진 곳에 눈이 멈췄다. 하얀 눈이 수북이 쌓였고얼음이 그대로다.
사계절 산의 매력을 설파하자면 끝도 없다. 그 중에서도 겨울 설산, 빙산은 단연 최고다. 하지만 그 멋진 풍광은 결코 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사방 천지에 얼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낮은 산이라고 결코 얕봐선 안 된다. 햇볕 들지 않는 음지는 그래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특히 내리막 빙벽 앞에선 자세를 한껏 낮추고 몸에 힘을 빼야 한다. 이런 걸 알 턱이 없는 딸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등산로의 수많은 아들딸이 남 같지 않다. 친구 사이네, 저들은 연인인가? 떼 지어 다니는 걸 보니 동호회서 왔구먼, 나 홀로 산행도 꽤 낭만 있지. 그들의 옷차림과 장비도 관찰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완벽하다. 등산화, 아이젠은 기본이고 스틱에, 선글라스, 모자, 방수 재킷, 배낭 등 빠진 게 없다. 어리다고 얕볼 일이 아니다. 요즘 사람들은 철저히 공부하고 연구하며 시작하나보다. 근데 우리딸은? 명색이 등산 좋아한다는엄마가 딸을 운동화 차림으로 보내다니, 아 또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주말이면 꼼짝도 하지 않던 딸이 산을 찾은 것만 해도 어딘가 싶어서대견하기도 하면서, 딸을 어떻게든 따라갔어야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앞서 걷던 친구가 아이젠을 신고도 넘어졌다. 흙 아래에 얼음이 언 걸 모르고 무심코 디딘 발이 쭉 미끄러졌단다.
“넘어질 땐 배낭 믿고 그냥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면 돼. 안 넘어지려고 손을 짚고 억지로 버티다 뼈가 부러지거든.”
친구가 엉덩이 살 많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너스레를 떤다. 또 딸이 생각났다. 가벼운 쌕 하나 달랑달랑 들고 갔을 딸들이 넘어진다면? 아이고야, 가지 말라고 뜯어말렸어야 했다.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걔가 휴대전화 할 정신은 또 있겠냐 싶어 말았다.
그때였다. 딸에게 카톡이 왔다.
“엄마, 나 미끄러질 뻔했어. 생명의 위협을 느낌. 진심으로.”
그러자 작은딸과 남편이 당장 내려오라며 댓글을 달았다.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지금 통화하는 게 더 위험하다 싶어 조심히 천천히 오라는 말을 남겼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큰딸은 가방을 냅다 던지고는 재잘대기 시작했다. 등산길 초입에서 중무장한 사람들을 친구와 비웃었다고 했다. 날씨가 이렇게 따뜻하고 좋은데 왜 저렇게 오버냐고. 그런데 한 시간 정도 걸었더니 군데군데 얼음이 있어 아이젠을 한 짝씩 나눠 꼈다고 했다. 겨우 한 걸음씩 떼며 올라가다 정상아래서는 완전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했단다.
“엄마, 가만히 서 있는데도 줄줄 미끄러지는 공포감, 그거 알지?”
이러다 굴러떨어져 죽겠다 싶어 정상 못 찍고 내려왔다고. 엄마의 경고가그제야 이해됐다며 친구도 너희 엄마가 왜 그렇게 따라오고 싶어 했는지 알겠다고 했단다.
“헤헤, 근데 산아래서 먹은 동동주가 꿀맛이었어. 그래서 다음엔 용마산 가기로 했어. 그땐 등산화에 아이젠 신고 만나기로 했고.”
머리 한 대 쥐어박고 싶다. 어째 우리 딸들은 저러나 모르겠다. 평소 부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늘 직접 겪어봐야 수긍하는 아이들이다. 지난한 과정에 속끓이고 걱정하는 건 남편과 내 몫이다. 그게 늘 불만이고 답답해서 힘들었는데 이젠 뭐 달관의 경지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더디 가지만 자기 속도로 살아가고 있으니 됐다.
완봉 사진은 합성하면 된다며 맛있는 음식 사진을 꺼내 보이며 자랑하는 딸. 남편과 내가 딸옆에 바짝 붙었다. 등산화 사줄게, 용마산 갈 때 우리도 끼워주면 안 되냐? 딸이 눈을 흘긴다. 그것도 부족해? 그러면 동동주에 파전도 우리가 쏠게. 딸이 웃는다.
“생각 좀 해볼게.”
으~ 얄미운 딸내미, 저 밀당 실력으로 연애를 좀 하시지. 그나저나 우리 남편의 소원, 딸과 함께 산에 오를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