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 추천이 과거급제 전에 조광조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지나는 여인이 있어 조광조의 눈길이 따라갔는데, 카지노 게임 추천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조광조는 이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제가 수양이 부족하여 여인을 훔쳐보았습니다.”
하니 모친 여흥 민씨가 말했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다워야 한다. 아름다운 처녀를 보고 젊은 장부의 마음이 어찌 잠잠하겠느냐? 아무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사람이다. 카지노 게임 추천을 조심하여라.”
모친의 이 경고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김굉필·이목·정여창 등과 동문인 사림(士林) 이었다.
성종 말년에 카지노 게임 추천은 외척이자 권신인 윤필상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훈구파들의 역공격을 받고 투옥되었고, 유순정·성희안의 비리를 탄핵하였다가 다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 사림의 추천을 받아 요직을 거치면서 훈구파 인사들의 축재와 비리를 탄핵하고, 음서 제도로 출사 한 관리들이 요직을 차지한 것을 비판하여 실력으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는 등 사림으로서 충실했다.
그러다가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여 연산군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금고형에 처해진다.
금고 중인 카지노 게임 추천은 반정에 동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참여하지는 않고 동의만 하였다.
중종반정 후 석방되어 조정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심정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심정이 박경·김공저 등을 시기하자 카지노 게임 추천은 유숭조를 시켜 ‘김공저 등이 심정·유자광 등 대신들을 도모하여 왕을 세우려 한다’고 거짓 고변케 하여 그 공으로 후에 가선대부가 되었다.
조광조는 이 일에 대해 ‘유자광은 패악한 인물이고 심정은 심보가 바르지 못하고, 카지노 게임 추천 역시 소인배다’며 비판하였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이 말을 가슴 속에 저장해 두었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우의정 후보였는데 주청사로 가게 되어 있어안당에게 우의정 자리가 넘어갔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이자를 부사로 한충을 서장관으로 삼아 북경으로 갔다. 이는 명나라 백과사전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 기록된 내용을 수정하기 위한 종계변무 사절단이었다.
9월에 북경에 도착하니 황제 무종은 7월부터 지방순시에 나서고 없었다. 예부에 주본(奏本-해명서)을 제출했지만 별 대응이 없었다. 10월 초에 명나라 태감이 부본(副本)을 가지고 행재소에 와서 ‘신하를 보내 황제를 배알하고 성지를 받아 오려면 정월이나 되어야 한다. 황제가 더 멀리로 가신다면 이 기일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사이 카지노 게임 추천은 병이 나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부사 이자가 약을 지어 지성으로 간호하였지만, 서장관 한충은 “카지노 게임 추천은 반드시 사림(士林)을 해칠 자요.” 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이 말도 가슴속에 저장해 두었다.
이자의 간병으로 몸을 추스른 카지노 게임 추천이 서둘러 귀국하자고 하였다.
한충은 “끝까지 기다렸다가 왕명을 다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하며 직접 예부에 가서 조선의 종계를 설명하였다.
한충이 명나라에서 점복자에게 일의 운수를 물었더니, “소년 때 재주와 솜씨는 하늘을 어루만질 듯 높았고, 용천검 잡아서는 얼마나 연마했던가.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들은 현사의 값 이뤘으나 가생은 어찌 홀로 귀양 갔나?” 라는 점괘가 나왔다.
(가생(賈生)은 중국 전한의 문인 가의(賈誼)인데 문제(文帝)가 그를 공경에 임명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미움을 사 폄출되어 33세에 사망한 비운의 천재였다. 한충을 가의에 비유하여 점괘를 냈다는 것은 한충이 카지노 게임 추천 눈 밖에 났다는 뜻이었다.)
2월 14일에 궁에 돌아온 황제가 16일에 답을 보냈는데, ‘조선 국왕의 조부가 이인임의 종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우리 태종 문황제께서 이미 개정할 것을 준허 하라는 성지가 있었는데, 곧 조칙을 등사하여 왕에게 주겠다.’ 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예부가 수기작성본을 전해오자 “판본은 그대로 있으니 예전대로 와전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예부 상서는 “『대명회전』에 기록된 것은 조훈에 의거하여 이미 발간된 책이므로 소급하여 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머지않아 개찬할 것이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 결과를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니김정이 주청사를 다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청사 남곤이 종계에 대한 일은 발명하였으나 사왕(연산군)을 시해한 일이 더욱 큰데도 이를 발명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하가 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갔으면 3∼4년을 체류하더라도 마땅히 힘을 다하여 준허를 얻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카지노 게임 추천 잘못입니다.”
남곤은 김정의 말도 가슴 속에 저장해 두었다.
사림인 카지노 게임 추천은 조광조 등의 급진적인 개혁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서서히 바꿔나가야 된다고 주장하여 신진사림의 맹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카지노 게임 추천은 훈구파 심정과 홍경주 등에 동조하여 기묘사화를 일으킨다.
카지노 게임 추천 집 뒤에 궁정동 북악산 기슭 큰 바위가 있었다. 남곤이 승지였을 때 박은과 이행이 자주 술을 들고 찾아왔다가, 남곤이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퇴청하니 함께 놀 수가 없다며 농담을 하였었다. “주인이 알아주지 못하니 대은암(大隱岩)이요, 시내가 있어도 놀지를 못하니 만리 밖의 시내로다.”
이 만리 냇물에 카지노 게임 추천은 장난질 친 나뭇잎을 띄워 궁 안으로 흘러들어 가게 했다. 조광조 등의 사림이 잡혀 들어갔다.
조광조·김정 등이 귀양 가서 사사되자 남곤은 말했다. “나에 대해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고 하겠구나. 이제 상관하지 않겠다.”
이제 카지노 게임 추천은 선을 넘어 버렸다.
거기에 한충도 잡아넣었다. 한충은 명 사신으로 가기 한 달 전인 1518년 중종 13년 6월에 직산에서 만난 한 선비의 익명서를 중종에게 전한 적이 있었다. 중종의 명을 받고 그 선비를 수소문하여 찾으니 권탁이었는데, 그 일이 물의를 일으켰다.
“권탁은 폐조 때에 장녹수의 심부름을 하던 자로, 그 상소는 한충이 윤색하여 올린 것이니 천총을 속인 것이 심합니다. 나추하여 율문에 따라 죄주소서.”
하여 한충에게 장1백에 절도 유배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카지노 게임 추천은 송사련의 고변이 있자 추국을 맡아 안당 일가를 역모로 몰고 한충도 엮어 넣었다. 송사련이 거사 명부라며 바친 조문객 명단에 서경(瑞卿)이라는 이름을 한충의 자(字) 서경(恕卿)이라 우겼던 것이다.
“한충은 특히 그중에서도 심한 자로서, 기군망상한 죄가 죽어도 남음이 있는데, 지금 유배지에 있으면서 태연하게 관가에 드나들어 조금도 두렵거나 거리낌이 없으니 그의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중종실록』에는 한충이 감옥에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카지노 게임 추천 자객에 의해 죽었다는 말도 있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천거에 대해 잘잘못을 아뢴 적이 있었다. 하여 자신의 인재 감식력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시험관이 되어 실력도 없는 황헌을 급제시키고 정자로 추천하였다. 황헌은 승승장구하여 이조판서에 올랐다. 을사사화 때는 상중이라 집에 있는 바람에 공신에 책록 되지 못했다며 분해하다가, 명종 3년에 우의정에 오르더니 자신이 김안로를 탄핵한 공이 있다며 위사공신 3등의 책록을 받아냈다. 하지만, 윤원형의 심복 진복창에게서 ‘공리를 탐하고 죄인을 함부로 죽였다’는 탄핵을 받아 삭직탈작 되었다.
1527년 중종 22년 영의정 카지노 게임 추천이 57세의 나이로 졸했다.
중종은 조참과 경연 등의 일을 정지하고 소찬을 올리게 하였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임종할 때 평생 동안의 초고를 모두 불사르고, 이어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 내가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하지 말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다.
카지노 게임 추천 외손자 송인은 중종의 서녀 정순옹주의 부마가 되었다.
어우야담』에 중종 사위 송인의 집에 밤마다 뿔 달린 구렁이가 담 밑에서 기어 나와 마당을 기어 다녔다고 한다. 담장 구멍을 막아도 다음날이면 구멍 막은 돌이 치워져 있고 구렁이가 드나들었다. 하여 집을 팔고 이사하였다고 한다.
고향인 밀양의 전설에 의하면 카지노 게임 추천이 변절자로 지탄 받게 되자, 카지노 게임 추천을 태어나게 한 이곳의 지맥을 끊기 위해 배(舟)의 모양인 대항리 산에 연못을 팠다고 한다.
끝내 카지노 게임 추천은 선조 1년에 삭탈관작 되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동각잡기·사재척언·해동잡록·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