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빼지 마라. 지금 딱 좋다~"
다이어트한다는 며느리를 만날 때마다 어머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봐도 살이 쪘는데 어머님 앞에만 가면 저는 세상 연약하고 마른 며느리가 됩니다. 지난 설 때는 떡국을 먹고 있는 제 앞에 새로 뜬 떡국을 두 그릇이나 더 갖다 주시지 뭡니까. 잘 먹어야 한다, 살 빼면 나이 들어서 고생한다, 네가 어디 살이 쪘다고 그러냐 하시는 어머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그런가? 나, 안 쪘나?' 하며 방심하게 됩니다.
어머님의 체구는 보통인데, 손은 유난히 작습니다. 손가락도 가느다랗습니다. 크고 두툼한 저의 손과는 대비됩니다. 그러니 어머님의 반지가 제 손에 맞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몇 달 전, 유난히 제 눈에 들어오는 어머님의 반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애교나 아양과는 거리가 먼 성격인 데다가 제 손에는 맞을 턱이 없으니 "어머니~~ 그 반지 저한테 주시면 안돼용~???"하며 알랑방귀를 뀔 수는 없었지만, "그 반지 참 예뻐요~"라는 말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습니다. "나중에 나 죽으면 이건 너 가져라."라는 어머님 말씀에, "제 손가락에는 맞지도 않을 텐데요 뭘." 하며 아쉬움 가득한 사양을 해야 했습니다. 비슷한 반지를 사볼 요량으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얼마 전, 함께 식사하던 어머님께서 끼고 있던 반지를 쓱 빼더니 제게 건네셨습니다.
"생일 선물이야. 금은방 가면 네 손가락에 맞게 늘려줄 거야. 나도 아끼지 않고 막 끼던 거니까, 너도 그렇게 끼고 다녀라. 설거지할 때도 끼고 집안일할 때도 껴."
몇 달 전 지나가는 말로 그저 예쁘다고 했을 뿐인데, 어머님은 며느리의 말을 내내 마음에 두고 계셨었나 봅니다. 식사 내내 테이블 밑에서 여러 번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다가 결심한 듯 빼 주신 그 반지, 그 마음에 잠시동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감사하다는 말과는 다른 결, 감동이라는 말보다는 더 높은 수준, 너무 좋아요라는 말보다는 더 깊은 말이 필요한데 빈곤한 저의 사전에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냉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 손을 눈으로 가져가 잠시 두드렸다가, 테이블 위로 내렸다가, 다시 손을 내밀기를 방정맞게 반복했습니다.
제 손가락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반지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드럽게 쏙, 제 주인을 만난 듯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심호흡을 한 뒤, 손가락에 비누칠을 충분히 하고, 단단한 중간 마디뼈를 통과시킨 뒤, 볼에 너트를 끼우듯 통통한 살을 빙빙 돌아 약지 끝으로 보내주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꽉 조이지 않았고 되레 여유 있어 보였습니다. 끼고 있는 내내 몇 번이고 손을 허공에 올려, 보고 또 보곤 했습니다. 한번 껴보고 싶으니 빼보라는 지인의 말이 당혹스러울 만큼 반지를 빼는 것은 끼는 것만큼이나 진땀을 빼야 하는 일이지만, 아무튼 이제 제 소유가 된 어머님의 반지.
금인지 은인지, 다이아몬드인지 큐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세대가 저물고 다른 세대가 이어진다는 것의 표상이자, 점점 쇠락해져 가는 어머님이 서서히 내려놓는 것들 중의 하나같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며느리가 한 명이라서 다행이라는 실없는 농담을 남편에게 던졌지만, 이제야 비로소 어머님의 마음에 제가, 제 마음에 어머님이 온전히 안착했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함부로 막 끼고 다니라고 하신 어머님의 요청에 따르지 못했습니다. 여기저기 치이다 행여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더군요. 겨우 자리 잡은 지 며칠도 안된 반지를, 다시 심호흡을 하고 비누칠을 해서 어렵사리 빼서는 서랍 안에 잘 두었습니다. 잘 아껴두었다가 어머님을 뵈러 갈 때만 끼려 합니다.
먼 훗날, 어머님 반지가 예쁘다는 사람이 제 앞에도 나타나고, 그 이가 손에 있던 반지를 냉큼 빼서 건네주고 싶을 만큼 예쁜 사람일 때까지 곱게 곱게 간직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