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향한 여정
백년전쟁 이후 영국카지노 게임 추천는 장미전쟁이라는 지옥 같은 전쟁 상태가 재연되었다. 세상은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 끝에 권력을 쟁취하는 막장의 무대로 변했다. 리처드 3세는 가장 악마 같은 싸움꾼으로 기억되는데, 셰익스피어가 제시한 ‘악마의 무대의 광대’라는 이미지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피렌체는 가장 치열한 정치 투쟁 무대 중 하나로서, 메디치 가문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실 사이에 벌어진 암살 사건들은 실로 교묘하여 500년이나 어둠에 파묻혀 있다가 최근에야 진실이 밝혀지기도 했고,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도 이반 뇌제의 사례에서 보듯 극도로 잔혹한 전제정치가 발전해 갔다.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은 이제 내부의 발전을 넘어 바깥의 드넓은 세계를 조망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 중 하나가 세계의 형상을 표현하는 세계지도, 곧 마파문디이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프라 마우로가 제작한 마파문디는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담아 비교적 정확한 세계의 모습을 제공한다. 근대의 문턱에 와 있는 유럽은 오랜 기간의 준비를 마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리처드 3세,
지옥의 싸움판에 핀 흰 장미
장미전쟁(1455~1485)은 이름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사건이 아니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온 전사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다시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다 자멸한 말세의 전쟁이라는 평가가 실상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처드 3세(재위 1483~1485)는 지옥 같은 막장 정치판에서 악마의 광대 노릇을 하다가 처참하게 몰락한 인물이다.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랭커스터 가문 출신 국왕 헨리 6세(재위 1422~1461, 1470~1471)다.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국왕의 정신병이 크게 악화카지노 게임 추천.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국왕의 조카뻘 되는 요크 공작이 국왕을 보호하는 척하다가 그 자신이 왕위를 탐하면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과 요크 가문(흰 장미)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고 전쟁 중 사망한 요크 공작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왕위에 올랐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두 아들은 열두 살과 아홉 살 어린아이였다. 이 중 장남 에드워드 5세가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카지노 게임 추천 두 달 후 런던탑에 갇혔고,왕위는 선왕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가 차지카지노 게임 추천.
선왕의 장례식 후리처드는 홀로 섭정(Lord Protector)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곧 반대파 인사들을 체포하여 살해하더니, 어린 국왕과 그의 동생을 런던탑에 유폐시켰다. 곧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사방카지노 게임 추천 리처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주도자 버킹엄 공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제안했다.
튜더 가문의 헨리는 혈통상으로 랭커스터 왕실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에 피신해 있던 그는 무명의 존재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는 보스워스 벌판카지노 게임 추천 리처드 3세의 군과 최후 결전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는 마지막 전투카지노 게임 추천결국 전사했다.
승리를 거둔 튜더의 헨리7세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원수 가문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새 왕조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사카지노 게임 추천 통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튜더왕조의 시작이다.
리처드 3세는 당대에 이미 폭군 소리를 들었다. 특히 다음 왕조카지노 게임 추천 활약한 셰익스피어(1564~1616)에 의해 최악의 인간 말종으로 묘사되었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 그려진 리처드는 발을 심하게 저는 꼽추로서, 친형 클래런스 경을 모함하여 런던탑에 가두고 부하들을 시켜 포도주 통에 밀어 넣어 익사시킨 것을 비롯해 수많은 정적들을 무참하게 죽인 악인이다.
[왕의 유골]
최근 역사학계의 놀라운 사건 중 하나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견된 일이다. 2012년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런던에서 북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진 레 스터Leicester시의 시내 주차장 바닥을 조사하여 유골을 찾아냈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DNA 테스트를 통해 이 유골이 리처드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가 전사한 후 묻힌 교회가 무너지는 바람에 왕의 유골도 땅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유골을 살펴본 결과, 전체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묘사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카지노 게임 추천. 왕은 척추측만증으로 몸통이 크게 휘어 있었고, 두개골을 스캐닝해서 재현한 얼굴은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있는 사악한 모습의 초상화와 꽤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무엇보다 그의 두개골에 나 있는 11곳의 칼자국, 특히 후두부의 두개골 일부를 깨뜨릴 정도의 강력한 칼자국은 마지막에 그가 죽을 때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전혀 받지 못카지노 게임 추천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관도 없이 묻혔다가 유골마저 유실되었던 이 불행한 국왕은 500년이 지나서 다시 정중하게 재매장되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하여 레스터 대성당에 시신이 다시 묻힐 때,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영국 계관 시인 캐럴 앤더피의 시를 낭독카지노 게임 추천. "이 유골을 축복하라. 끊어진 끈을 다시 잇고/ 내 죽 었을 때 잘려 나간 표상 십자가를/ 거기에 다시 꿰는 것을 상상하라. .." 영국 역사학자들은 시를 낭독한 컴버배치가 리처드 3세의 먼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500년 만에 밝혀진
메디치가 청부 살인 사건의 비밀
1548년 2월 26일 아침, 베네치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피렌체 귀족 로렌치노 데 메디치(Lorenzino de’ Medici)가 삼촌과 함께 산 폴로(San Polo) 교회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무심히 길을 가던 중 갑자기 괴한 둘의 습격을 받았다. 삼촌은 재빨리 도주하여 겨우 화를 면했으나, 단도로 머리를 가격당한 로렌치노는 땅에 쓰러져 결국 목숨을 잃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로렌치노는그 자신이 과거 피렌체에서 있었던 암살 사건의 범인이었다. 11년 전인 1537년, 같은 메디치 가문 내 사촌 형제이며 피렌체의 지배자였던 알레산드로(Alessandro) 공작을 자기 집으로 유인한 후 하인과 함께 칼로 공격하여 살해한 것이다. 두 사촌 형제는재산 상속 문제로 다투던 중이어서 이것이 살해 원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로렌치노는독재자로부터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고 이후 베네치아로 도피했다.
알레산드로 공작의 죽음으로 메디치 가문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가문의 방계로서 당시 17세였던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였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도주한 암살범 로렌치노를 붙잡아 처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여러 증거로 보건대1548년 베네치아카지노 게임 추천 벌어진 로렌치노 암살 사건은 코시모가 10년 이상 기다린 끝에 복수를 행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500년 세월이 흐른 후 새로운 증거들이 나오면서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임이 밝혀졌다. 살해 동기는,1537년 로렌치노에게 암살당한 알레산드로가 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사생아 딸 파르마의 마가레트는 그 전 해에 알레산드로와 결혼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14세의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 증거는 이탈리아카지노 게임 추천 멀리 떨어진 에스파냐의 시망카스(Simancas) 문서보관소에서 나왔다. 시망카스에는 카를 5세 궁정에서 주고받은 암호화된 문서들이 있다. 이 문서들을 보면 실제 암살 사건의 집행인은밀라노 공작 페란테 곤차가(Ferrante Gonzaga)였다. 황제의 충직한 수하인 그는 피렌체 공작 코시모 측과 접촉하여 로렌치노의 머리에 걸린 상금을 실제 지불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확약을 받았다.
이제 밀라노 공작 곤차가는 킬러 두 명을 고용하여 암살을 지시했고, 이런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카지노 게임 추천.베네치아카지노 게임 추천는 황제 대사인 멘도사라는 인물이 이들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줄곧 로렌치노의 행적을 추적해 오고 있었다. 황제는 멘도사에게 로렌치노를 비밀리에 살해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멘도사는 에스파냐인 암살범을 고용하면 쉽게 눈에 띄므로 이탈리아인들을 써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최종적으로 1548년 1월 11일, 황제는 로렌치노 살해 계획을 실행에 옮기라고 지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제 킬러들이 행동에 돌입하여 2월 26일 암살에 성공했다. 그 후 베네치아 주재 제국 대사관에서 킬러들을 비밀리에 보호했고, 이들을 피렌체 인근의 피사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와서 약속한 보수를 받도록 조치했다.
이반 뇌제,
무자비한 폭력으로 신성한 국가를 만들다
차르 이반 4세(재위 1533~1584)의 별칭은 뇌제(雷帝,Ivan the Terrible)다. 벼락 치듯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위엄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지배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로즈니’라는 이 말이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어서, 대국을 통치하는 지배자라면 의당 갖추어야 할 자질로 친다.
부친 모스크바 공국의 바실리 3세가 사망했을 때 이반은 고작 세 살이었다. 섭정을 맡았던 어머니도 몇 년 후 사망했다. 귀족들이 독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상황카지노 게임 추천 이반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지 스스로 터득해 갔다. 그는 15세에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자들의 혀를 뽑고 목을 베면서 처음으로 ‘통치 행위’를 시작했다고 후일 회고한 바 있다.
1547년 17세의 나이에 이반은 차르라는 이름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차르로서 대관식을 한 것은 이반이 처음이다. 로마제국 황제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원래 비잔티움제국 황제나 몽골의 칸을 가리킬 때 쓰던 말이다. 이로써 이반은 자신이 지상신국(地上神國)을 통치하는 황제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그의 통치 전반기는현명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서구 국가들의 신분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한 데다가 군대 조직도 훌륭하게 재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화된 행정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카잔과 아스트라한 등 몽골 세력의 마지막 보루들을 점령하여 볼가강의 접근로를 확보했다. 이제 이 나라는 '러시아'라고 불리며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치 후반기 이반은 광기 어린 잔혹한 전제군주로 바뀌어 갔다.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신하들이 보인 불충의 자세 등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 많은 측근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카지노 게임 추천. 차르는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카지노 게임 추천.
이때 만든 강력한 기구가 ‘오프리치니키’라는 러시아 최초의 비밀경찰 조직이다. 처음에 1,000명으로 출범했다가 나중에 6,000명으로 늘어난 이 기구는 차르의 적을 잡아 파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개 대가리와 빗자루를 매단 검은 말을 타고 다녔다. 차르의 적을 개처럼 물어뜯고 쓸어버린다는 의미다. 본격적인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반의 희생자 중에는 친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임신한 며느리의 옷이 단정하지 않다고 꾸짖고 있는데 아들이 끼어들자 쇠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제일 든든한 후계자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1584년 이반은 54세에 갑자기 사망했다. 그 역시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오래 못 가 류리크왕조는 단절되고, 1613년 로마노프왕조가 들어섰다. 로마노프 시대는 20세기 러시아혁명 시기까지 300년 넘게 지속된다.
활력 넘치는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인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의 한 도시에 최고의 창의적 천재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그렇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자,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같은 문인, 피디아스와 폴리클레이토스 같은 조각가 등역사상 두 번 다시 찾아보기 힘든 높은 수준의 거장들이 활약하며 그야말로 서구 문명의 기초를 만들어냈다.
아바스왕조의 바그다드 또한 유사한 사례다.칼리프 알만수르(재위 754~775)는 ‘지혜의 전당’이라는 기관을 설립하였다. 여기서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 《알마게스트》, 유클리드의 수학서 《원론》, 플라톤의 철학서 《티마이오스》, 인도학자 브라마굽타의 천문학·수학서 《브라마시단타》 같은 고전들을 아랍어로 번역한 다음 일급 학자들이 주해하고 심층 연구를 카지노 게임 추천.
13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대략 3세기 동안의 피렌체 또한 유사한 사례다. 보카치오부터 브루넬레스키까지, 토리첼리부터 갈릴레이까지, 조토부터 미켈란젤로까지, 단테부터 마키아벨리까지 회화, 조각, 건축, 문학, 과학, 정치학 등 광범위한 부문에서 천재들이 나타나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신기원을 이루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천재들의 활동 무대는 실로 매우 좁은 공간이다. 서쪽의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부터 동쪽의 산타크로체 교회까지 그리고 북쪽의 산마르코 수도원부터 남쪽의 로마나 성문까지 피렌체 구도심은 동서 간 1.5킬로미터, 남북 간 1.5킬로미터에 불과하다.
피렌체는 여러 장점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밀, 올리브, 포도주를 제공하는 풍요로운 주변 농촌을 들 수 있다. 우선 먹고살 만한 안정적인 물질적 기반을 갖추어야 문화 역량의 발전을 기할 수 있다. 그보다는 상업과 공업, 은행업이 더 중요한 요소다. 직물업을 통해 점차 큰돈을 벌고, 전 유럽의 대상인과 군주 및 귀족 들을 대상으로 금융 거래를 하여 큰 부를 쌓아갔다.
14세기에 이르면 피렌체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력 있는 대도시로 성장한다. 이런 과정에서 부유한 대가문들이 성장했고, 스피니, 프레스코발디 같은 1세대 가문에 이어 바르디, 페루치 같은 2세대 가문들이 성장하고, 이들이 쇠락하면 다시 메디치, 스트로치 같은 3세대 가문들이 융성했다.
이 사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황당과 황제당이라는 파당들 간 싸움, 치옴피의 난(1378)이라 일컬어지는 노동자 봉기를 야기한 극심한 계급 갈등 등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국가가 붕괴에 이를 정도로 방치하지는 않았다. 페스트의 위기 또한 잘 극복했다. 위기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피렌체 시민의 정체성이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고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
르네상스 예술은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에서 꽃피었다. 이제 시민들의 삶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며 발전해 갔다. 무엇보다 피렌체는 모뉴먼트, 궁정, 교회, 수도원 건물 등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스스로를 장식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다름 아닌 두오모(Duomo) 성당의 재건축이다. 원래 산타 레파라타(Santa Reparata)라 불리는 작은 규모의 성당이 시내 한복판에 있었는데, 1294년 이 성당을 크게 재건축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시 조례를 보면 “다른 그 누구도 더 이상 장대하고 화려하게 지을 수 없도록 최대한 웅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대인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100년 이상 끈질기게 수작업 방식으로 돌을 다듬어 거대한 성당을 지어나갔다.
한 세기 반이 지나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가 거대한 이중 구조의 돔을 올리는 난공사를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1469년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와 그의 제자 다빈치가 돔 위에 거대한 황금색 구球와 십자가를 얹음으로써 마침내 ‘꽃의 성모’라고도 불리는 성당을 완공카지노 게임 추천.
이 시기에 이르면 이제 피렌체는 예술과 과학, 철학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는 단계로 들어간다. 부호들은 예술가들의 메세나가 되어 자신의 가문을 찬미하는 작품을 만들도록 했고, 길드는 능력 있는 예술가를 고용하여 자기 단체의 수호성인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산마르코 수도원의 수사들이 거주하는 방마다 성스러운 그림들을 그려주었고, 보티첼리는 신비로운 이교 신들의 축제를 표현했으며, 도나텔로는 걸작 다비드상을 완성했다. 철학자들은 플라톤 아카데미카지노 게임 추천 고대 철학을 연구하고 기독교와 고대 이교 문명의 융합이라는 고난도의 이상을 추구했다.
고통 속카지노 게임 추천 빛을 명상하는
미켈란젤로의 세 피에타
피에타(Pièta)란 십자가카지노 게임 추천 내린 그리스도의 시신을 두고 성모가 애도하는 주제의 작품을 말한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피에타 세 작품을 남겼다. 24세에 완성한 바티칸 피에타, 75세에 이르러 자신의 묘소에 설치하려고 만든 반디니(Bandini) 피에타, 그리고 미켈란젤로 최후의 작품 론다니니(Rondanini) 피에타이다. 세 작품을 보면 거장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영적 성숙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는 1475년 3월 6일 피렌체 인근의 카프레세Caprese에서 태어났다. 미켈란젤로는 13세에 기를란다요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서 각종 기예를 익혔다. 곧 당대 최고 권력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의 눈에 들어 그의 후원을 받으며 일취월장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1492년 후원자 로렌초가 사망한 후젊은 예술가 또한 굴곡진 삶을 살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최상의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 특히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작품이 바티칸 피에타다.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 빌레르(Jean Bilhères de Lagraulas)추기경이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묘소를 장식할 작품을 주문한 것이다. 완성한 작품은 그야말로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사실 너무 아름답게 묘사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이 피에타는 완벽한 피라미드 구도이고, 그리스도는 고대 그리스 신상神像카지노 게임 추천 볼 수 있는 멋진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성모는 앳돼 보이는 얼굴에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다. 슬픔과 고뇌보다는 고상한 젊은 남녀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자의 아름다움은 육체적인 게 아니고 순결과 성스러움카지노 게임 추천 오는 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바티칸 피에타는 작품 완성 직후부터 원작자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이처럼 아름다운 작품을 애송이 조각가가 만들었을 리가 없으며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돌자, 미켈란젤로는 분개하여 성모의 옷깃 부분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미켈란젤로가 서명을 남긴 유일한 사례인데, 그는 곧 이렇게 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고 한다.
반디니 피에타
그가 다시 피에타 작품을 만든 것은 50년이 흐른 뒤다. 그의 나이 75세에,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예술을 수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묘소를 장식할 작품으로 반디니 피에타를 제작했다. 미완 상태로 남아 있던 이 작품은 후일 조수 칼가니(Tiberio Calgani)가 완성했고, 오랫동안 몬테카발로(Montecavallo)의 반디니 빌라에 있던 것을 메디치 3세가 구입하여 피렌체로 가지고 왔다.
네 인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대리석 조각 하나로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다. 작품 분위기는 이전 피에타와는 완전히 달라서 깊은 비애감을 자아낸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완벽한 육체가 아니라 축 처져 있으며, 성모의 몸짓과 표정은 크나큰 고통을 드러내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이 세 인물을 마치 품에 안듯이 위카지노 게임 추천 굽어보는 니코데모는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바리새파 지도층 인사였던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인물로 성경에 나온다.
론다니니 피에타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오랜 예술적 여정의 도달점이라 할 만하다. 그는 1552년경 작업을 시작하여 죽기 사흘 전까지 이 작품을 다듬었다고 한다. 환영같이 가늘고 긴 모습의 그리스도와 성모는 거의 땅카지노 게임 추천 떨어져 나와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이들의 헐벗은 신체는 이목구비가 거의 없고, 형상을 잃은 듯 추상화되어 있으며, 고통과 슬픔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발이 꺾여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가까스로 서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든다.
성모가 죽은 그리스도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걸까(논리상으로는 그래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그리스도가 성모를 업고 있는 걸까? 그리스도가 자신의 어깨에 얹혀 있는 성모의 손을 느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물어진 걸까?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현대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는 이 피에타야말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며, 미켈란젤로 89년의 삶이 온전히 녹아 있다고 말카지노 게임 추천.
프라 마우로 지도,
아시아 항해를 예고하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15세기 중엽이 되면 새로운 세계 인식을 담아내는 혁신적인 지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베네치아의 수사 프라 마우로(Fra Mauro)가 제작한 지도가 대표적이다.
1450년경 베네치아카지노 게임 추천 제작된 이 명품 지도는 한 변 223센티미터의 정사각형 안에 지름 196센티미터의 원형 세계지도를 그려 넣었고, 이 안에 3,000개가 넘는 캡션과 100여 개의 그림으로 풍부한 정보를 담아냈다. 도시, 사원, 도로, 국경, 특산물, 항해, 교역 등 중요한 사항들이 지도 전면에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지도는 기존 지도와는 여러 측면에서 다른 면모를 보인다. 우선 이전의 마파문디에서는 에덴동산이 아시아 동쪽 끝에 실재하는 지역인 양 그렸지만, 여기에서는 세계지도 바깥 부분에 따로 그려서 배치했다. 에덴동산이 이 세상과 ‘영적’으로 연결되기는 하지만‘실재성’은 완화시킨 것이다. 예루살렘의 위치도 변경했다.마우로는 세계 각 대륙의 실제 비중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예루살렘의 위치를 약간 서쪽으로 옮겼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아시아에 관한 정보는 주로 마르코 폴로의 책에서 얻은 것이다. 예컨대 중국 관련 정보의 90퍼센트 정도가 폴로의 책에 나오는 내용이고, 여기에 더해 니콜로 데 콘티, 오도리코 다포르데노네 등 다른 저자들을 부차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이 ‘심팡구 섬(Ixola de Cimpangu)’으로 표기되었는데, 마르코 폴로가 시팡구(Cipangu) 혹은 지팡구(Zipangu)로 표기한 것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본이 유럽의 지도에 처음 등장한 사례다(한반도는 아직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았다).
이전의 많은 문헌과 지도는 유럽에서 인도양까지 가는 항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남쪽에는 바다가 끓어오를 정도로 더워서 통과가 거의 불가능한 열대지역이 있을 뿐 아니라, 혹시 그곳을 지나간다 해도 미지의 대륙(terra incognita)이 막고 있어서 아시아의 바다로 항해해 갈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프라 마우로는 이와 다른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인도양이 더 큰 대양에 열려 있어서 그곳으로 항해해 가는 게 가능하며, 언젠가 아라비아해카지노 게임 추천 향신료를 실은 배 두 척이 실제 유럽까지 온 적이 있다는 기록을 과거 문헌 중카지노 게임 추천 찾아 제시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근거는 이 지도를 제작하기 수십 년 전인 1420년경 실제로 인도양카지노 게임 추천 대서양으로 항해해 온 선박에 관한 정보다.
“나는 믿을 만한 사람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인도 배를 타고 가다가 인도양카지노 게임 추천 40일 동안 거친 폭풍우로 인해 소팔라 곶과 ‘녹색섬’카지노 게임 추천 인도양을 넘어 서남서 방향으로 밀려갔다. 이들은 2,000마일이나 항해했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중요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양카지노 게임 추천 희망봉을 넘어 대서양으로 항해해 왔다가 되돌아간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마찬가지로 대서양카지노 게임 추천 항해하여 인도양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만일 이 항로가 열리면 힘겨운 육로 운송 대신 해로를 이용해 더 빨리 아시아로 갈 수 있다. 지중해 대서양에서 출항한 배가 아덴, 호르무즈, 그리고 더 멀리 자바, 일본 혹은 중국까지도 갔다 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지도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나 바스쿠 다가마가 실제로 수행하게 될 대양 항해를 수십 년 전에 예측한 셈이다.
[혼일혼일강리역대구도지도]
프라 마우로 지도가 제작되기 약 50년 전인 1402년(태종 2년) 조선카지노 게임 추천 세계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가 만들어졌다. 조선 전기의 문신 김사형·이무·이회가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포함하여 당대 알려진 세계 지리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당대 세계지도의 정확도를 파악하는 한 가지 기준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그리느냐인데, 이 지도는 아프리카 남단을 상당히 정확한 모양으로 나타냈고, 또 인도양과 대서양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그렸다.
아마도 중국의 고지도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일본 지도를 더하고 여기에 우리나라 지도 내용을 넣어 편집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해 있던 아랍의 지리 지식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5세기에는 유라시아대륙 전반에 걸쳐 수준 높은 지 식과 정보가 유통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의 일각과 조선에서 걸작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대 세계는 실제 만나기 이전에 정신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지도의 이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온 세상의 영토와 역대 왕조의 수도를 한데 그려 넣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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