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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홍수정 Apr 01. 2025

'카지노 게임' , 한발 더 내딛은 연상호의 세계

※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카지노 게임<카지노 게임 스틸컷

최근 넷플릭스가 공개한 <계시록은 연상호 감독과 최규석 작가가 손잡고, <로마(2018)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알폰소 쿠아론까지 프로듀싱한 작품이다. 하지만 큰 기대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건 연상호에 대한 인상 때문이었다.


처음 연상호는 내게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등으로 독특한 세계관을 선보인 흥미로운 감독으로 다가왔다. 그의 사회비판적 시선과 강렬한 감정은 꽤나 날카롭지만, 애니메이션의 투박한 작화와 만나 중화되며 어딘가 모를 세련된 감성을 풍겼다. 하지만 <부산행(2016)을 기점으로 본격 실사 영화를 내놓으며 연상호는 늘 약간의 감정 과잉과 지나치게 어두운 톤을 머금고 디스토피아적 작업에 몰두하는 감독으로 보였다.


하지만 <계시록은 상상과 달랐다. 이 작품은 내가 올 상반기에 본 영화 중에 가장 크게 예상을 빗나간다. <계시록은 연상호의 연출이 가장 세련되게 제련된 작품이다. 감정은 정제되고 영화 리듬에는 여유가 생겼다. 이리저리 분출되는 마그마 같은 감정은 이제 꾹 눌린 채로 수면 아래를 흐르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런 결과에는 알폰소 쿠아론의 영향도 없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계시록이 연상호의 필모에서 의미 있는 수작인 이유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이 영화는 범죄와 종교를 소재로 하지만, 그것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 거기에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 그곳으로 달려가고 도망치고 제자리에 얼어붙은 가엾은 인간 군상이 엿보인다. 아래부터 <카지노 게임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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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신기루다. 혹은 유령, 환상, 광기, 그 무엇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손에 닿지 않고 입증할 수도 없으나,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것. 나에게만 보이는 그것. 신기루에 닿지 못해 같은 곳을 맴돌고 헤메는 인간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개척 교회 담임목사 성민찬(류준열)은 우연히 권양래(신민재)를 성도로 받아들이지만, 곧 그가 성폭력 전과자임을 알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날 민찬의 아이가 사라지고, 그는 곧바로 양래를 의심한다. 이어지는 어설픈 추적과 예상치 못한 사고. 민찬은 사건을 수습할 방법을 고심한다. 하지만 그 즈음, 공교롭게도 민찬은 주변에 새로 짓는 큰 교회의 담임 목사 자리에 낙점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 그는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며, 필사적으로 과오를 지우려 든다.


<카지노 게임의 탁월한 점은 인물들이 마주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켜켜이 섬세하게 쌓아두었다는 점이다. 민찬은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고 싶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고 싶다. 그는 이 믿음을 관철하기 위해 주변의 희생도 불사한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그에게서 신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종교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연희(신현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양래한테 희생된 성폭행 피해자의 언니이며, 동시에 형사이다. 형사는 개인적 감정보다 법의 질서를 우선해야 하지만,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비하여 너무 미지근한 법과, 그런 딜레마를 눈치채고 낄낄대는 양래를 보며 흔들린다. 여기에 명쾌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은 없다. 뿌연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는 가엾은 인간만이 떠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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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서사 측면에서 중요하지 않지만 강렬한 장면. 민찬은 아내 시영(문주연)이 외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느 날 민찬은 그녀에게 묻는다. 내게 말할 것 없냐고. 시영은 시치미를 뗀다. 그때 민찬이 말한다. 우리가 새 교회에 가기 위해서는 모든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하느님 앞에서 죄를 고하라는 벼락같은 고함에 시영은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토해낸다.


이 장면은 괴이하다. 아내로서 잘못을 빌어야 할 시점에 자기 참회에 취한 시영의 모습이 그렇다. 하지만 이상하기로 민찬도 만만치 않다. 그는 자신의 충격과 분노를 숨기고, 이것을 신의 언명으로 둔갑시킨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위치에 앉힌 다음 시영을 심판하고 또 용서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시영을 통해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회개하며 간구를 원한다"라는 기도는 시영보다 민찬에게 더 어울린다. 이 장면에서 그는 남편이자, 목사이자, 신이고, 또 죄인이다. 하지만 여러 자리를 불안하게 맴도는 그는 결국 어느 곳에도 고정되지 못한 채로 부유할 따름이다. 민찬의 파편화 된 모습은 그가 마치 신기루처럼 텅 비고 허한 인간임을 직감하게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장면이 있다. 연희의 방 시퀀스. 그녀는 홀로 침대에 누워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카지노 게임 작품에 잘 없었던 카메라 무빙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마치 연희 앞에 같이 누운 것처럼 그녀를 아이레벨에서 조용히 응시한다. 유령 같은 이 시선은 적막한 공포를 일으킨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작 유령은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 이 장면의 엇갈린 시선들은 기묘하다. 연희 쪽을 향해 있는 유령과, 그 유령이 보이는 듯 의식하고 있지만 다른 곳을 쳐다보는 연희와, 이들을 동시에 지켜보는 카메라까지. 정체 모를 세 개의 시선이 이 장면에서 이리저리 교차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느 시선 하나 또렷한 것이 없다. 그 시선들은 모두 모호하며 어디를 보는 건지 알 수 없다. 기이하게 교직하는 세 개의 시선 중심에는 핏기 없는 얼굴로 이 순간을 간신히 견디는 연희가 있다. 이 공간, 그리고 이곳에 머무는 연희야말로 유령 같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기루를 좇다가 그 안에 갇힌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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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에서 가장 강력한 환상에 씐 인물은 양래다. 너무 큰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그의 사연은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민찬, 연희, 그리고 양래까지 3인은 삼각형을 그리며 대결 구도를 그린다. 이들은 영화 스토리상 충돌할 뿐 아니라, <계시록의 테마인 신기루에 대한 태도도 달리한다.


민찬은 환상을 쫓아가며, 연희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지만 붙잡혔고, 양래는 그것에 먹혀 버렸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이 단순히 신기루 앞을 맴도는 불쌍한 인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연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녀는 과거와 유사한 상황에서 힘껏 몸을 던져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오랜 감옥에서 벗어난다.


실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주요한 테마는 연상호의 전작 <사이비에 이미 나온 바 있다. 그럼에도 둘은 분명 다른 작품으로 느껴진다. <사이비가 종교를 소재로 인간 내면의 폭력성을 폭로한다면, <계시록은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이 영화는 간절함을 품은 인물과,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모호하고 기이하며 종국에는 허망한 그 왕복 운동은 신기루 곁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을 닮았다. 강렬한 비주얼로 시선을 현혹하던 연상호의 영화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깊고 풍부한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원문https://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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