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을 연습하다
잊을만하면 연락 오는 카지노 게임가 있다.
알게 된 지 오래됐지만 언젠가부터자주 보기에는 내 멘탈이 강하지 못해 접촉을 줄이기로 했다. 걸핏하면 손절하는 내게 이 언니만큼은 손절로 관계를 끊어내기보다 '거리두기'를 연습하는 중이다.
그녀와 거리 두기를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연락이 오면'아니 넌 내가 전화 안 하면 먼저 안 해?'라고 시작해서통화를 하면 한 시간이다.
통화의 내용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근황까지 빗대서 자기 하소연이다. 보통 친정엄마와의 관계에서 이런 습관을 괴로워하는 딸이 많던데, 이 언니와 나 사이가 마치 그런 사이가 된 것 같다.
시작은 이랬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이는 자리였고, 유독 대화가 잘 통한다 싶었다. 그러다 단 둘이서 연락하는 일이 좀 있었고, 늘 듣는 쪽이던 나는 그 카지노 게임의 모든 이야기를 다 알게 됐다.
어쩌다 내 이야기를 할라치면 자기가 다 노선정리한다. 하물며 내가 만나야 되는 약속마저도 '나가라 마라'를 결정하곤 했다. 그렇다고 그 카지노 게임 말을 곧이곧대로 다 듣는 것도 아니다.
함께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그 카지노 게임를 너무 받아주지 말라고도 일렀지만 결국 그 친구가 모임에서 빠지게 되면서 내가 그 카지노 게임의 공식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았다. 나도 자주 지쳤고, 피로가 쌓였다.
여러 궁리 끝에 그 카지노 게임가 전화 오면 바로 받지 않기를 선택했다.
내가 받을만한 상황일 때만 받는다. 그리고 가끔은 콜백도 놓친다. 첨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전화를 못 받은 이유를 설명하며 콜백 해야만 마음이 편했는데, 그 카지노 게임를 통해 연습하다 보니 정말 바쁜 사람은 알아서 다시 연락이 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 카지노 게임 역시 내가 반드시 콜백 하지 않아도 되는 급한 용건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마음이 편했다.
친분이 많지 않은 사람들과는 통화도 길지 않고, 용건만 간단히 한다거나, 메시지로 간략하게 주고받는 게 대부분이다. 아니 친한 친구와도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조절이 어려운 그 카지노 게임를 경험하다 보니 '내가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내 나름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 카지노 게임 역시 속사정은 여리고 착하더라며 이해하다 보니 더욱 거절이 어려운 게다.
그렇다고 나만 탓하기에는 그 카지노 게임도 역대급 예민녀다. 조금만 수틀리면 바로바로 표현해 버리니 그 말을 듣기 참 거북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 자기는 곧바로'그렇다고 꼭 나한테 다 맞추란 건 아니니까!'라며 말을 정정하지만, 대부분은 속엣말을 담아두지 못하고 서운하다거나 오해하는 걸 그대로 다 드러내는 편이다.
만약 내가 전화기를 못 봐서 전화 온 지도 모르고 있다가 다시 온 전화를 받게 되면
'넌 다른 사람들한테는 바로 전화 다 해주면서 나만 일부러 안 하는 거야? 뭐 그렇다고 나 손절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라며 자기 하소연이 이어진다. 그럼 나는 앞에 말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한 채 하소연에 리액션하면서 내 마음은 찜찜해한다.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내가 하던 일이 있었다고 말할 틈을 안주네.'
내쪽에서 그 언니와 나의 관계를 먼저 정의하고 살펴보니 상대방에 끌려다니는 나도 이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그 언니도 이해가 됐다.
어쩌면 우린 똑같이'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나, 버림받고 싶지 않은 나'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나니 '어떤 상황에서 수 틀려서 버려지는 일이 생기면 그냥 상대방 뜻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자'로 마음을 먹었다.
카지노 게임가 여행 선물을 준다고 나오라는 말에 반갑게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통화가 길어지는 순간 깨달았다. 이 약속에 나가면 나는 나한테 실망할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번 약속은 내가 먼저 취소해 보자. 그다음에 내 마음이 감당할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한결 가벼워졌다. 몇번 연습 후 전화를 다시 걸었다.
'카지노 게임. 우리 만나자고 했던 점심 말이에요. 그날 좀 미뤄요. 내가 요즘 사람을 만나고 나면 집에 와서 좀 지쳐요. 신경 쓸 것도 많고 상황이 좀 그래요. 담에 시간 넉넉할 때 그때 편하게 봐요.'라고 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럼 선물 집으로 보낼까? 아니 내가 잠시 들려서 놓고만 올게.'
'아니에요. 굳이 보내거나 오 실 필요까진 없어요. 먹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럼 번거롭겠지만 다음번에 만날 때 주세요.'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탐내면 어쩌려고?'
'그럼 갖고 싶어 하시는 분 계심 그분 주셔도 되고요~'
내가 이렇게 거절을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어쩐 일인지 카지노 게임도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좀처럼 이런 반응을 하지 않는 나라며 오히려 다음에 편할 때 보자고 한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지며 괜히 웃음이 난다.
'이게 이렇게 되는 거라고?'
잘했다. 그 카지노 게임를 다시는 안 봐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 때 일어난 용기였는데, 의외로 더 편하게 봐도 될 것 같은 안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