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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3. 2025

린치와 카지노 쿠폰: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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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는 그런 장면이 나온다. 죽은 사람의 눈이 아무런 초점 없이 하늘을 향해있는 동안, 카메라가 하늘을 날아 시체의 시선을 대변한다. 이 장면을 놓고 보면 시신이 무언가 증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는 하나의 인격체인 듯한 느낌마저 들지만, 영화 내적으로 무언가 이를 중요하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정황상 탕웨이가 남편을 살해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런 느낌을 위한 느낌으로서만 이 장면은 소비될 뿐이다. 쉽게 말해 이 장면은 맥거핀이다. 세간의 농담을 따르자면 미장센이 “무언가 있어 보이는 것”이라면 맥거핀은 “무언가 있어 보이는 데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영화에서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이 세계에서 ‘아무런 것도 아닌 채로’만 있기 때문에 도리어 의미를 얻는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데, 단지 그것만으로 특별하게 여겨지는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제대로 수행하려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야 칭찬받는다면, 여기서 구태여 앞에 나서려는 사람은 없을 테다. 이 점에서 맥거핀을 영화의 결을 거슬러 존재하는 어느 한 용기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혹자는 이 용기를 두고서, 어차피 모든 것이 정해진 순리라면 영화에서 맥거핀의 역할은 그저 형식을 위한 배치에만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맥거핀은 그저 어떠한 의미를 증명하기 위한 반례로서만 ‘가능’하다고, 맥거핀은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의미가 된다고. 그래서 맥거핀은 자기 자신이 별다른 내용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무언가를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맥거핀은 그 스스로가 존재를 포기하더라도 도리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존재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이 모습은 얼마나 숭고한가.


영화에서 맥거핀은 마치 이물질과도 같다. 그냥 자기만으로는 인체와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지만, 주변조직에 염증 같은 영향을 미치며 심한 경우는 암과 같은 질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인체와 높은 친밀도를 갖고서 조직에 적절히 유착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어서, 대개는 영화가 자체적인 활동을 갖고서 무한히 변형되는 일에 도움을 준다. 영화는 정해진 길이를 갖고서 한정된 내용물을 작업한다는 게 업계의 표준적인 가정이지만, 맥거핀을 통해서 영화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며 이 점에서 맥거핀은 영화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맥거핀은 영화에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지만, 반대로 아무런 이유 없이 거기 그곳에 있기 때문에 영화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형식이 된다. 이 점에서 맥거핀은 영화를 보는 한 개인의 삶을 생각해보게 한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는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운명을 목격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 경우 관객으로서의 지위는 위태로워진다. 어떻게 해도 영화의 내용을 바꿀 수 없으므로 그저 화면을 바라만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 시네필은 자신이 세계를 바꿀 수 없으므로 반대로 그걸 바라보는 법을 배우려 하며, 영화를 소위 해석하는 일이 신탁을 내려받는 일과 같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영화에서 진리인 것은, 시간의 무게를 견뎌낸 대가가 고작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라는 허탈감이다. 당신이 목격했던 그 무언가가 끝나버린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목격한 건 한 세계의 끝일까, 아니면 그런 것들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일까? 영화에서 지속은 이야기를 선보임으로써 약속을 이행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지속은 오직 풀려남의 순간을 위해, 그 최후를 마주함에 의미가 있다.


영화는 그게 끝난 이후에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신이 죽어야만 신을 말할 수 있듯이 영화에 관한 발언권을 얻게 되는 건 영화가 끝난 이후다. 이와 유사하게 맥거핀은 영화 안에서 의미적으로 무언가를 품고 있지 않고, 항상 의미의 최전선에 있기에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즉 맥거핀을 두고서는 영화의 작은 죽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맥거핀은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한 최후를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다소 이례적인 상황을 만든다. 맥거핀은 영화가 한 의미의 후미를 쫓으며 결말을 향하는 과정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전개를 돕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결말에 도달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로 이를 관객에게 그럴듯하게 속이는 것뿐이다. 이 사실을 관객은 영화가 다 끝난 후에야 알아챈다. 분하지만 맥거핀이 맥거핀이라는 점이 밝혀지는 건 영화가 다 끝난 후에, 자리를 일어서면서 “아니 그럼, 그건 대체 뭐였는데?”하고 화를 낼 때뿐이다. 결국 맥거핀은 마치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 현세의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며 다음 생을 기약할 뿐인 종교의 논리와 비슷하게 되어버려서 영화의 논리에 자체적으로 복속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맥거핀은 관객에 종사하지 않는다. 맥거핀은 전적으로 영화의 편에 서 있기에 도리어 관객이 적대해야 할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맥거핀이 영화를 구성하는 한 존재로서 의미를 얻는 건 우리가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도입부이자, 암벽을 등반해가는 일에 뭉툭한 손잡이가 되어주면서, 자기 존재를 상실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맥거핀은 그 자체로 관객의 지위를 대변하기에 맥거핀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일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맥거핀은 원리적으로만 보면 무언가 있는 것처럼 기대하게 하다가 이를 ‘배반’하기 때문에 비교적 괘씸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맥거핀은 관객과 마찬가지로 한 영화에 제대로 소속되어 있지 않다. 관객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단지 영화를 목격하기 위한 존재일 뿐이듯이, 맥거핀은 한 영화가 자신의 결말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다. 맥거핀은 단순히 영화가 관객에 제공하는 기만전술이기보다 한 삶을 완주하도록 관객을 응원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맥거핀은 구태여 무언가이기를 택하기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인 게 아닐까. 한 개인의 삶에서 개인은 주인공이지만, 정작 자신이 그 모든 일을 보고, 듣고, 선택해야 하는 일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자신이 없어도 결국 세상이 잘 돌아갈 뿐임을 깨닫고 나면, 앞에 나서 일감을 진두지휘하는 건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게 된다. 이 세계가 나의 세상이 아니라 반대로 한세상에 있는 작은 존재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을 때 삶은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뿐인 공간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반문해보자. 영화는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영화를 보는 사람은 영화 안에서 아무런 것도 가져올 수 없다. 단지 보고 들은 것을 최대한 잊지 않는 것만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찾지 못한 채,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최대한 마주하고, 또 보존하려 든다. 이른바 우리는 자신이 잊고 싶지 않은 것들마저 잊으면서 살게 된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하는 건 그와 같은 공포심이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일이 자신이 잊고 싶은 무언가를 대신해주는 건 아닐까 하고, 이른바 영화가 제공하는 마취의 기능이 불구라는 최악의 부작용으로 나타나진 않을까 하고.



맥거핀이 운명을 속이며 거짓을 전할 뿐이라는 점이 밝혀지더라도, 그것만으로도 한 영화를 충실히 따라가며 이해했다면 그것으로 족한 건 아닐까? 자신이 사는 곳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일 뿐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맥거핀은 존재의 소외감을 비교적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이 [각본]에서는 결국 주어진 역할과 정해진 결말을 마주하는 게 등장인물의 순리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또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개인의 몫이다. 맥거핀은 회수되지 않기에 반대로 되감아 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맥거핀은 우리가 어딘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래서 맥거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만약 자유라는 말이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음을 뜻한다면, 영화에서 홀로 동떨어진 형태로 존속하는 맥거핀은 그 자체로 자유를 실현한다고 볼 수 있을 테다. 혹자는 영화가 관객의 삶을 안으로 포섭해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바깥’은 대안이 될 수 없어서 반대로 관객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다. 영화가 대안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한세상의 막다른 골목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이때 맥거핀은 관객이 한 세계를 살아가는 플레이어가 될 수 있게 해준다. 너무 큰 압력을 받은 나머지 삶이 터져버리지 않게끔 세계에 구멍을 낸다. 그렇다면 맥거핀은 짚고 넘어가지 않은 것뿐이지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린치의 영화에는 수도 없이 많은 맥거핀이 등장한다. 린치의 영화를 볼 때면, 무언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들에 불만족이 있었다기보다 삶에서 보고 들었던 자신의 많은 면들을 생각해보게 됐다. 린치의 영화를 분석한 많은 정신분석 논문들이 말했듯, 린치의 영화는 삶의 많은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줬다. 린치의 자리는 아마도 영구적인 맥거핀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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