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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27. 2025

멜랑콜리의 후계자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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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에서 실패에 기반한 멜랑콜리의 후계자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

-강덕구의 책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에 대한 출판사 서언.


기가차드 밈은 남성형 페르소나의 긍정적인 면을 모아 만든 무언가다. 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를 믿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떠오르는 장르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피폐물이다. 우선 전자를 두고서 다음처럼 정의하자. 어떤 형태로든 긍정을 끌어내는 화법은 도리어 부정적인 것이 여기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부정성을 긍정으로 덮으려 한다는 점에서, 전긍정의 시도는 아무리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부정성이 있음을 전제한다. 누군가의 이별을 경험할 때 애써 밝은 얼굴로 “안녕”이라고 말하듯, 피할 수 없는 것에 대응하는 법은 그냥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쉽게 말해 전긍정은 우리가 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반대로 한 세계가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전긍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바꿀 수 없는 한 존재의 배후일 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 점에서 전긍정은 피폐물을 떠올리게 한다. 왜냐하면 피폐물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맞서 싸워야 할 세상이 도리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이겨버리는 일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인체로 치면 병원균을 무찌르지 못하고 그냥 죽어버린다고나 할까. 이미 현실이 한계로서 주어진 상황에서는, 차라리 그와 같은 한계를 인정하는 것만이 안락삶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도리어 그런 현실을 발판 삼아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더 낫다. 앞을 향해가는 길에 큰 바위가 하나 있다면, 이를 치우려 하기보다 차라리 그 위에 올라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일이 더 낫다. 말하자면 전긍정은 불행을 공리 삼아 작동하는 한 세계의 법칙을 보여준다.


피폐물도 불행을 공리 삼아 작동하는 한 세계를 보여준다. 피폐물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역경과 고난을 겪더라도 인물이 끝내 그에 굴복한다는 점이다. 피폐물은 마치 액션게임의 튜토리얼처럼 “세계의 조작방식을 알려주기 위해 패배가 곧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발동조건이 되는 보스전”을 설계한다. 이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어른의 눈길을 하고서 독자를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 나쁨이 피폐물의 주된 정서를 이룬다. 이를 따라 피폐물에 가해지는 비판은 다음과 같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있었는가 하면, 바로 그게 매체가 작품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답한다. 무언가를 주절주절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연출로서 자연스럽게 이 세계의 구성과 의사를 표현하는 게 바로 예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불행은 공리로서 한 세계에 새겨진 법칙이 되어, 창작이 고통의 연속이라면 고통받아야 창작할 수 있다는 논리에 소모된다. 인간은 고통 없이 아무런 것도 해낼 수 없다고, 왜냐하면 매일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창작의 연속이니까.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기본은 고통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그런 고통을 예견하는 일일 테다. 인간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내일이 고통으로 얼룩질 것을 알면서도 이를 [각오]한다. 이를 따라 인간 존재가 고통에 굴복하는 일은 무언가 거대하고 막연한 무언가를 상대한다기보다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현재를 따라 한 걸음을 내딛을 뿐이라는 점에서 ‘창작’과 ‘진보’에도 비견될 수 있다. 분명 총체로서의 삶은 거대하고 막막해서 뭘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를 알 수 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막연함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미래를 제 손으로 끝내는 부류가 될 수는 없다. 각오한 자는 행복하다.


불행을 공리 삼아 작동하는 세계는 어쩌면 폐허의 속성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끝’은 과거에 비하면 비교적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과거에 끝이라는 말이 모든 것의 소멸, 대멸종을 가리켰다면 반대로 오늘날에 ‘끝’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앞서 지속할 것이라는 어느 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죽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계속될 것이다. 폐허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해왔고, 우리가 죽은 이후로도 계속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언가 ‘시작된다’고 말하기가 힘든데, 왜냐하면 시작은 이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항상 끝과 한쌍을 이루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어딘가에 있을 끝을 찾아 헤매게 된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인간 존재가 이미 시작 지점에서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끝’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탄생에 관해서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무언가다. 그로 인해 존재는 이미 그와 같은 ‘끝’을 삶의 공리 삼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랭 바디우는 시작한다는 것은 무한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시작이 끝과 한쌍을 이루므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순간, 이곳에는 끝이 전제된다. 단지 시작이라고만 선언하지 않으면 아무런 것도 끝나지 않으며, 그래서 시간은 무한하고, 또 영원해진다. 결과적으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서 어떠한 종결점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밟을 만한 문턱을 모조리 제거해버리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절을 제거하는 일은 시간의 영속성에서 벗어나는 일, 아무런 것도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항상 무한에 열어두려함이다.


알렉세이 유르착은 구소련의 붕괴를 두고서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라는 명문을 남겼다. 이를 따른다면, 일반적으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무한에 열어두려는 시도가 도리어 아무런 것도 아닌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공리로 삼는다는 점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자기’는 끝이 없는 무한의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사유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기이므로, ‘자기’의 상실은 곧 무한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살아가는 세상도 끝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것도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사이도 벌어지지 않으니 틈새를 메울 필요도 없다. 틈새가 없으니 구덩이에 빠지거나 다리가 걸려 넘어질 이유도 없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지키고 싶다. 그렇게 하려면 이 세상이 시작되지 않도록, 시작이 있어서 끝이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무한에 열어두어야만 한다. 전긍정과 피폐는 이 대목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두 가지 사례에 해당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저 한 세계를 믿기를 택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아무것도 아니니까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같은 말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귀결이 다르다. 사람들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살아가는 곳이 너무나 소중해서 자기상실을 택한다. 자기를 지워 이 세계를 무한에 열어두면, 다시금 기회를 얻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즉,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대신해서 이 세계가 살아가기를 바란다. 한 세계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사람들은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고야 만다.


한 세계 앞에 놓인 개인이 있다. 그가 살아가는 세계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무한하다. 이 앞에서 그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아무런 것도 시작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아무런 시작도 끝도 될 수 없는 것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아무런 존재도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한없이 아름다운 세계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따라서 전긍정과 피폐는 세계에 개입하거나 바꾸려는 시도가 좌절될 때 벌어질 수 있는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아무런 것도 바꿀 수 없음에 좌절하기보다, 아무런 것도 아닌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바로 그 세계 안에서 인정받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자기를 합리화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시작이 없어서 이 세상이 무한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생각하는 일도 가능하다. 아무리 해도 이 세상이 끝나지 않으니까, 전쟁과 슬픔, 비애극으로 가득 찬 매스미디어의 횡포를 견디기 힘드니까 차라리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무언가로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정의한다는 건, 그 이름이 남긴 유산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례에 관한 다양한 관점의 분석과 연구가 있다. 첫 번째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끝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승리한 체제라고 말했던 관점인 가속주의가 있다. 세계의 가속은 모든 것을 평탄화함으로써 세계를 무로 되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무 안에서는 영원을 획득한 이들이 아무런 시작도, 아무런 것도 끝내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것과 이유 없이 불행하기만 하는 것에 딴죽을 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전긍정과 피폐는 그런 점에서 재난의 속성을 따라간다. 재난의 정의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초과해 존재하는 사건이라면 그렇다. 이미 한 세계에 내재해있던 재난은, 그 시작이 이미 정해졌기에 자연스레 끝을 파생하며 여기서 무한은 자기에 관한다. 세상이 망해버릴 것을 모두가 다 알고 있다면 여기서 고통받는 건 무한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다. 세계가 무한하지 않다면, 세계가 끝나는 순간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삶이 더 영속하기 때문에 자기는 스스로를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 중간에 의식을 두절할 수도, 마음을 단념할 수도 없어서 매끄러운 순간 모두를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모든 것을 살아 목격하는 것, 재난의 속성은 우리가 이를 직접 경험하고 목격하는 것만이 아니라 탈출구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되어버린 방위에 있다. 재난은 주체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내부로 축소하거나 외부를 배제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이때 주체는 몸을 웅크려 앉아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그런 상황 밖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없으므로 도리어 이 세계가 완벽할 수 있다는 상상은, 세계의 완고함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해가 되리라는 생각이 아니라 무한이라는 생각에 대응하는 한 가지 영역을 전개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긍정과 피폐의 사이에서 개인은 그 무엇으로도 곱해지지 않는다.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이라 하더라도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내면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그것들이 한 세계에만 속해있기에 한 세계에 추방된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속해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전긍정과 피폐는 마음의 재난을 겪는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없음의 굳건한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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