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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03. 2025

죽을 수 없는 몸, 무료 카지노 게임 수 없는 집

<무료 카지노 게임17(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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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은 적어도 <기생충보다는 호응을 얻고 있지 못한 듯 보인다. 봉준호의 다른 영화에 비해 뭐가 어떻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미키는 봉준호의 장편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니 영화에 평가가 엇갈린다면 봉준호가 말하는 해피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영화의 결말을 점검해보자.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가 새로운 시대의 문 앞에서 잠시 꿈을 꾸었을 때 영화는 잠깐의 악몽을 보여주지만, 그걸로 끝이다. 인체 프린터에 구시대의 망령이 프린팅되는 몽상이 잠시 깜빡이고 나면, 현실에 카메라가 롤아웃된다. 잠깐의 막간, 정신을 차린 미키 반스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펑’하고 폭발음이 들려온다. 미키와 여자친구를 포함한 청중 모두가 박수 치는 가운데 영화는 다시금 어둠으로 돌아간다. 이제 영화는 ‘끝’났다. 극장에 불이 켜지고 자리를 일어나며 우리는 그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깨어난 곳에 그런 독재자가 여전히 살아있지는 않을까 하고. 어쩌면 여태까지 우리가 보았던 모든 것이 미키가 꾸었던 찰나의 삶 같은 건 아니었을까. 영화에서 마샬(마크 러팔로)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현실에는 여전히 도날드 트럼프가 있다. 영화를 꿈이라 할 수 있다면, 이제는 다시 현실로 돌아갈 차례다. 그러니 여러분, 안녕들 하신가. 영화는 내내 미키에게 “죽음은 어때?”라고 묻는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는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서로에게 묻는 일처럼 보인다. 트럼프 재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떤가? 완전히 꿈을 꿀 수 없게 된다는 건 더는 영화가 아니게 되어버린 현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미키의 원작소설에는 테세우스의 배를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이 일화는 두 미키가 서로 같은 존재이면서 서로 다른 존재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게임 <사이버펑크 2077의 결말 중 하나에서는 “살기 위해서 원수의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뭐라고 할 거야?"라는 대사가 나온다. 미키의 관점으로 보면 익스펜더블 계약은 악마와의 거래와도 같았다. 미키의 몸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빛’에 내몰린 결과다. 계약을 맺고 나면 미키의 몸은 이제 더는 미키의 소유가 아니다. 미키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미키의 몸은 기업을 위해 항구적으로 일해야만 하는 환경을 제공했다. 즉 미키의 몸은 원수가 제공한 감옥과도 같았다.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 앞에서 차라리 영원히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키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여자친구인 나샤(나오미 애키)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 게임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은 “좋아,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잊지 마.”다. 미키에겐 자신이 집으로 돌아와야만 할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수차례의 죽음을 견딜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익스펜더블 기술이 정작 지구에서 윤리적인 이유로 금지됐다는 점이다. 집을 떠나 새 행성에 정착한다는 설정이지만 인간의 가치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다들 인간성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가운데 미키는 거의 유일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점이 <미키가 왜 봉준호 영화의 유일한 해피엔딩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단서다.


익스펜더블이 된 후 미키의 몸은 게임의 법칙을 따른다. 미키는 게임 캐릭터처럼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얼핏 보면 좋아 보이기만 하지만 영화는 그런 미키가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키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으므로 반대로 시작점으로의 기능을 잃는다. 육체가 기억의 시작점으로서 기능하지 않으니 굳이 몸에 중요성을 둘 필요가 없다. 이 점에서 미키는 집을 잃은 쪽에 가깝다. 현실에는 없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설정이라서 무언가 이입이 잘 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이 점이 관객이 영화에 이입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보는 미키의 모습은 소모품처럼 쓰고 버려지는 노동자의 면모다. 쓰레기 소각로에 버려지는 미키의 시신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마따나 ‘쓰레기가 되는 삶’을 연상케 한다.바우만은 “멈춘다는 것은 당신이 쓰레기가 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반문하자면 영화 또한 멈추면 쓰레기가 되는 부류에 속하지 않던가. 영화가 중간에 멈춰버리면 그건 있는 그대로의 ‘사고’가 된다. 기본적으로 ‘멈춤’은 열차가 말하는 ‘탈선’과도 같아서 중간에 멈춰버리면 뒤에 따라오는 모든 열차운행에 지장을 준다. 영화에서 미키가 쓰레기가 되는 순간이 그렇다. 멀티플이 되면 익스펜더블의 존재 자체를 말소해야만 한다. 멀티플이 되어 멈춰버린 두 존재는 더는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두 존재는 한 과거를 공유하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서로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미키17은 버튼을 누른 게 잘못이었다며 자책하지만, 미키18은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그러니 ‘괜찮다’고 말한다.


미키들이 두려워했던 건 그런 뜻에서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잊는 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런 전조 없이 여기 이곳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이 매번 수고롭게 기억을 새로 이식해주는 것엔 그런 이유도 있다. 아무런 연속 없이 바로 이곳에 등장한다면 그건 그냥 쓰레기에 불과하다. 이미 멈춘 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는 순간 쓰레기가 된다면 반대로 멈춤에서 출발하는 것도 쓰레기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여러 번의 탄생을 거치면서도 미키의 의식은 줄곧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영화의 속성이라는 게 그렇다. 봉준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영화는 결국 “시스템이 유지되고 인간이 대체되는” 일을 미키 혼자 수행하는 쪽에 가깝다. <설국의 주제의식을 반복하지만, <미키의 몸이 더 많은 이들을 포괄한다. <미키가 말하는 노동은 자본주의이기보다 포드주의적인 의미의 신체, ‘카메라를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에 더 가깝다. 전진기지의 최하층에 자리한 폐기물 처리로는 온갖 이미지를 재활용해 하나의 신체로 구성하는 영화의 속성을 연상케 한다. 즉 영화는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미키를 프린팅하는 재료는 우주선 안의 온갖 잡것들을 녹여서 재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점이 봉준호 영화의 색채라고 할만한 대목일 테다. 미키의 자리는 그 누구의 자리도 될 수 있다. 미키는 겉으로 보면 백인 30대 남성이지만, 도리어 어떤 것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봉준호 영화 중에서는 <미키가 그런 편에 속한다. 봉준호 영화에서 신체는 노동자와 하층민의 자리에 더 가까웠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재처럼 보였다. <기생충에서 박사장의 집이 그러했듯, 봉준호 영화들에서 집은 딱 잘라 정해진 게 아니라 언제든지 추락하거나 상승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설국열차에서처럼 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다. 이런 분석은 <미키를 봉준호 영화를 레퍼런스 삼은 무언가로만 바라보기에 내가 원하는 방향성은 아니다. 다만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이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오게 하려는 아들의 모습이었다는 걸 언급해두고 싶다. <괴물과 <마더에서도 등장인물의 목표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굳이 계급 추락이나 상승을 막는다기보다는 삶을 이어가는 일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봉준호의 영화가 사회비판적인 내용이 많다고 말하지만, 결국 봉준호의 관심사는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봉준호 영화가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냤느나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봉준호는 어딘가로 이동하려면 그곳에 본래 있던 것을 밀어내야만 한다고 믿었다. 등장인물이 항상 이동을 망설이거나 거부했던 건 그런 이유가 크다. 꼭 그 몸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은, 자신이 떠나온 바로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을 돕는다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미키18은 그걸 해낸다.


일단 마샬과 개척자 무리부터가 집으로 귀환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마샬이 지구를 떠난 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지구에는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으니 우주로 나간 건데, 마샬은 개척지의 왕이 되고 싶어 했으므로 그곳을 새집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이 모습은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에 확장되는 신체와 매체 분과를 상기시킨다. 인간과 영화를 정의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거의 모든 일에 시네마를 언급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 모습에 거부감이나 반대를 표하는 건 아니지만, 한때 서로를 적대했던 이들끼리 한솥밥을 먹는 일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강조하자면, 이런 일에서 중요한 건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걸 잊지 않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잊지만 않는다면 어딜 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미키17이 사건을 겪고 살아 돌아오게 되는 순간 이 공식이 깨지고야 만다. 미키17과 18은 출발점이 같지만 서로 다른 도착점에 있다. 미키는 몸을 되돌릴 수 있지만 기억을 되돌릴 수는 없다. 미키는 자신의 기억에서 잘못된 게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어 미키에게 성교는 자신의 몸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주지하는 역할을 한다. 나샤도 그걸 은근히 즐겨서, 매 프린팅 동안 미키의 성격이 각양각색이라는 점을 언급한다. 이는 기억을 있는 그대로 내려받지만 반대로 각각의 육체가 개별성을 지닌 존재임을 말해준다. 미키는 항상 같은 몸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도리어 영화의 물성에 가장 근접해있다. 항상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말해준다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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