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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11. 2025

형상을 가소카지노 쿠폰 믿음, <메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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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한 세계를 밀고 간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영화가 자신이 보여주려는 것을 굳게 믿고 지지하는 일이다. 영화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들뢰즈의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세계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파괴되었다. 이제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다. […] 영화는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 한다. 이 믿음이 우리의 유일한 관계이다.“ 들뢰즈의 이 말은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정말로 ‘있다’고 보아야 하는 관객성을 가리킨다. 관객이 된다는 건 세계를 믿는다는 것이다. 영화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일단은 그곳에 세계가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려면 그 무언가를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영화에 ‘관해’ 말하고자 영화를 믿는다. 영화라는 게 정말로 실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가 보았던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설사 온 세상이 영화를 믿지 않더라도 자기만큼은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부정해버리면 영화에 한때를 보낸 자신의 일부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계에 대한 믿음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일정 정도 반영한다. 물론 자기를 조금 잃는다 한들 나 자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두려운 건 이 ‘세계’가 어디까지 상실을 버텨낼 수 있는지다. 이 ‘신체’가 언제까지 ‘자기’에 대한 형상을 잃지 않는지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겨 내듯, 한 세계가 세계로서 잔존할 수 있는 것은 한 개인의 믿음 덕분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믿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여전히 세계는 여기 이곳에 잠들어 빛날 테다.


다른 하나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그 움직임을 하나의 형상으로 직조해내는 일이다. ‘지지’는 단순히 한 대상이 하려는 일을 뒷받침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지지체는 한 존재의 행위 가능성을 위해 소모되는 몽타주의 총체다. 여기엔 무언가를 그려내려는 움직임이 포함된다. 어느 한 사람을 위한 응원, 혹은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은 표층화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영화적 ‘자기’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상실의 중심축이 되어준다. 중심이 있는 신체는 운동과 행위를 잃더라도 끝내 형상으로 빛난다. 들뢰즈는 사유와 감각을 구분 짓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신체’는 정신의 항상성을 대변하는 장치다. 특히 들뢰즈는 수축의 형상이 팽창에 연동된다면 인체의 폭발적인 가소(plasity)는 한 형상의 전체적인 외피를 이미지의 틀 안에 ‘응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변형 가능성은 어떠한 물리적인 법칙이나 정해진 형태를 이탈하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연동성을 갖고서 주어진 ‘형상’이다. 그렇다면 피겨 스케이트는 일종의 시네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피겨 스케이트는 음악에 따라 조형되는 스케이터의 움직임을 통칭한다. 피겨 스케이터는 음악에 따른 안무를 작성하거나 발레를 배워 손과 발을 조형하는 등 형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빙판 위를 달리는 스케이트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감각을 밀고 가는 신체의 유려한 조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체의 가소가 한 개인의 사유를 감각에 조응하게 하는 것, 형상(Figure)을 밀고 가는 일이다. 영화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 한다면 매한가지로 피겨 스케이트는 폭발하는 가소에서 자신의 형상을 찾는다. 사유하는 감각과 감각하는 사유란 바로 이런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란 이 세계에 대해 형상을 가소하는 믿음, 혹은 그런 활동의 총체이다.


우리는 영화로서 ‘그’를 대하고자 영화를 믿는다.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별반 개의치 않는다. 이 세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우리가 세계를 살아가려면 어떠한 것을 밀고 가야 하며 우리는 이를 두고서 ‘믿음’이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연상호의 <계시록은 일상에서 신의 계시를 발견하는 어느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의 주인공은 한 세계를 믿었다기보다 자신이 발견한 믿음을 하나의 세계로 확장하려 했다. 이때 영화는 그와 같은 믿음을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보여준다. 알폰소 쿠아론을 총괄 프로듀서로 선임하면서까지 장면 하나를 롱테이크로 구성한 건 분명 믿음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쿠아론의 카메라는 어떠한 목적지에 이르리라는 걸 마치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칠드런 오브 맨 같은 영화를 보면 이미 카메라가 처음에 바라본 목적지에 대한 믿음을 줄곧 밀고 나갈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인물을 넘어 하나의 전지적인 시점으로 구성된 이 카메라는 단순한 관찰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한 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개인의 사유를 감각에 조응하게 하는 것이 형상을 밀고 가는 일이라면,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이 세계에 형상이 하나의 시점으로 조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베를린 하늘을 활공하는 어느 외딴 천사의 믿음대로 우리에겐 그런 시선을 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믿음은 사유 이전의 문제라고 빔 벤더스는 말한다. 이후 그가 시간이 흘러 만든 <퍼펙트 데이즈는 주인공 야쿠쇼 코지가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끝난다. 나뭇잎 사이를 들추는 햇살은 직접 나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보통 관객이 주체로서 세계를 ‘엿본다’고 하는 것과는 달리 감각이 밀려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코지는 하늘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건 분명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은 아니었을 테다. <퍼펙트 데이즈는 정적인 영화지만 반대로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뒤따르기만 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개인이 한 세계에 보내는 동경을 그린다. 이른바 세계를 밀고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잃는다 한들, 우리는 그 몸부림이 자신의 믿음을 형상화하는 활동이라는 걸 염두에 둬야만 한다. 코지가 가족을 끌어안는 일은 가족관계이기에 언어로 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반대로 언어 이전의 문제를 사유하는 쪽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영화와 현실 간의 세계 유사성은, 눈에 비치는 곳이 아니라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그 진가가 있다. 연상호에게 세계는 그런 뜻에서 어떻게든 전진해야 하는 쪽에 가깝다. <반도나 <부산행처럼, 여기엔 믿음의 확증편향이 있다. 보들레르가 시선을 전하는 방법처럼 우리는 [영원]을 추구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그걸 동경할 수는 있다. 무언가를 동경한다는 건 그걸 목격하는 것도 아니고, 계시를 받는 것도 아니다. 동경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마법이다. 회수되지 않는 영원을 행복의 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건 카메라를 밀고 가는 시네마의 한 가지 기능성-가능성이다. 불행과 좌절은 아마도 죽음 충동에 빗대어질 수 있다. 인용하자면 불행은 행복의 정언명령이다. 행복을 이끄는 것은 카메라를 밀고 가는 강한 압력, 형상을 가소하는 믿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 세계-신체야말로 우리가 믿음을 밀고 가는 강한 압력이 되어주니까. 영화와 만화의 얽힘 중 하나는 비록 실패할지언정 사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게 만화적 신체의 형상이든, 아니면 소년만화의 풍부한 꿈이든 간에.


<메달리스트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닮은 만화다. 형상을 밀고 가는 시네마인 이 만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츠카사와 이노리, 두 사람이 서로의 꿈을 향해 간다는 짧은 플롯의 이야기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문해 빠르게 성장한다는 점이 만화적 허용으로 꼽히지만, 반대로 형상을 가소하는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기도 하다. 츠루마 이카다는 요네즈 켄시와의 대담에서 2권의 브로큰 레그 장면이 마음속에서 실질적인 ‘결말’이었다고 말한다. 이노리의 어머니는 이노리의 언니가 피겨를 중간에 그만둔 일을 떠올리며 이노리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이노리도 자신이 더 어린 나이에 입문해야 했었다는 말을 듣는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그만큼의 시간을 절대로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며. 이 간극은 영화를 빨리 감기 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시간의 고유 진동 계수를 오롯이 몸으로 체감하게끔 한다. 이노리가 경기 출전 전에 겪는 몸의 떨림은 타인과의 간극에서 오는 시간의 깊이를 파고로서 체감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신체의 떨림이 한 세계에 대한 신경감응으로 이어지는 일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기능이라고 믿었다. 이노리가 떨림을 극복하고 빙상에 오르는 건 한 존재의 가능성이 기지개를 켜는 과정이다. 연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1권을 염두에 뒀다는 <메달리스트의 서사는 이노리가 코치인 츠카사를 만나기까지의 이야기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1권에서 츠카사는 이노리를 보고서 ‘빠르다’고 감탄하며, 이는 이어지는 전개에서도 줄곧 이노리의 장점이 된다. 이노리의 경쟁자는 이노리를 보고서 성장 속도가 아니라 추월당하는 슬픔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의 삶을 초월한 적이 없다. 영화는 오직 관객의 신체를 가소하는 형상으로만 삶에 자리 잡는다. 중요한 건 고통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이 신체를, 멋진 세계를 믿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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