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 <얼음의 집
'황홀한 불꽃'을 해석해야 나아갈 수 있는 읽기
정찬의 <완전한 영혼에 실린 중편 소설 <얼음의 집은 하야시를 만나기 전 '나'의 짐승 같은 삶과 '나'의 스승이자 고문 기술자 하야시의 권력에 대한 독백에 가까운 말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해석과 사유가 중심 축이다.
짐승 같은 삶을 살던 조선인 화자 '나'는 관동 대지진과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살아남아 느낀 감정을 ‘황홀한 불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하야시는 그 불꽃을 ‘카지노 쿠폰의 욕망’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의아해하던 화자처럼 나도, 황홀한 불꽃이 어떻게 카지노 쿠폰이랑 연결이 되는지 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음의 집은 분명 카지노 쿠폰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시작은 화자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황홀한 불꽃’인데, 아주 중요한 상징인데, 이 지점부터 걸리니, 그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계속 질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질문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추상적이다.
두 번 읽고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세 번 읽었다. 그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급히 도서관에 가서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정희진)를 빌려, <얼음의 집에 대해 쓴 글도 읽었다. 역시 두 번 읽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카지노 쿠폰에 대한 나의 지식이 미천한 듯 해 <카지노 쿠폰이란 무엇인가(이수영)도 같이 빌렸다. 이건 설렁설렁 읽었다. 정과리의 평론도 읽었다. 그래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논문까지 찾아보려다 그만두었다. 소설도 그 소설에 대해 쓴 글도 모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뿌옇다.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에 끼어들 수가 없다. 끼고 싶어서 읽고 생각하고 쓰고 생각하고 또 읽다가 깨달았다. 독자讀者는 독자獨自다. 어디에 낄 필요가 없다.
나로 돌아왔다. 나의 좁고 한정적인 사유의 폭 안에서 이해해 보기로 한다. 그러자 조금 실마리가 풀렸다. ‘황홀한 불꽃’을 우월감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우월감은 요즘 내가 가장 몰두하고 있는 일상의 화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장 하층민인 화자가 살아남았고, 그로 인해 마음속에 우월감(황홀한 불꽃)이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짐승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짐승 같은 삶을 끝내기 위해 그는 천황을 죽이기로 한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던 이 극단적 결심도 우월감으로 해석하니 이해가 된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황을 없애는 일은 우월감을 완성시키는 행위가 분명하다. 고문 장소에서 느닷없이 천황을 살해하고자 했음을 자백하는 화자의 모습도 우월감으로 해석하니 역시 이해가 된다. 황홀한 불꽃을 카지노 쿠폰의 욕망이라고한 하야시의 해석도 납득이 된다.
["난 너에게 새로운 카지노 쿠폰의 불을 주겠다. 네가 여태껏 가졌던 카지노 쿠폰의 불과는 전혀 다른 불을” “그것은 내가 창조한 불이다.”]
하야시는 "카지노 쿠폰자의 쾌락은 카지노 쿠폰 대상자의 상처와 증오로 쌓인다며 그러지 않기 위해서 쾌락을 지우고 카지노 쿠폰의 얼굴을 지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문 대상자를 사물로 인식하고, 고문 기술자인 나는 카지노 쿠폰의 도구일 뿐이다라고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쾌락은 우월감에서 온다. 쾌락 없는 카지노 쿠폰을 우월감 없는 카지노 쿠폰이라고 읽으니, 또 조금 이해가 된다.
우월감이 제거된 카지노 쿠폰에 대한 소망 혹은 제안
작가가 '일본의 고문 기술자'를 등장시키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월감 없는, 우월감이 제거된 카지노 쿠폰에 대한 소망 혹은 제안이 아닐까. 그 어려운 것을 해내고자 사유하고, 부단히 실천한 고문 기술자 하야키가 화자에게 전하는 장황한 사설은, '우월감 없는 권력'에 대한 사유가 아닐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월감이 없는 권력이 가능할까?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 대상자에게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 게 쉬운가? 소설 속에서 나와 현실을 살피다가, 우월감으로 가득 찬 대통령과 영부인과 그 주변의 수많은 권력자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끝도 없이 떠오른다. 그만그만. 스탑. 우월감뿐인 권력이 잘못 작동했을 때의 부작용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만일 하야시만큼 권력에 대해 깊게 사유하는 사람이 권력자가 된다면 세상은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우월감 없는 권력에 대해 상상해 보니, 한없이 따뜻해서 어이없지만 눈물이 날뻔했다. 내 깜냥에 우월감 없는 권력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면 기꺼이 권력 대상자가 되겠다.
그리고 이는 정치 카지노 쿠폰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의 일상 속 화두는 '우월감'이다. 매사 우월감을 느끼지 않고자 애쓴다. 하지만 그건, 쉽게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옆 차선의 차를 힐난하면서도 우월감을 느끼고, 수영장에서 내 한참 뒤에 선 수강생을 돌아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자칭 우파들의 주장을 보면서도 우월감을 느낀다. 그런 나를 목격하는 건 매 순간 고통스럽다. <얼음의 집을 통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다시 살핀다. 이만큼 사유하게 한 소설은 처음이다. 그리고 사유는 이제 시작이다.
덧.
'우월감 없는 카지노 쿠폰'이라는 키워드로 하야시의 말들을 조금 이해해보긴 했지만, 하야시의 어떤 말들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종종 말장난이나 변명처럼 읽혀 듣고 있기 괴로웠다. 결국 고문 기술자이면서,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확신에 가득 차 쏟아내는 말들에 사실 화도 났다. 고문 대상자가 들으면 억울해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것은 죄가 아닌가? 죄가 아니다. 박해받는 자의 자리에 서지 않기 위해 선택한 행위가 어찌 죄인가? 무릎 꿇는 고통, 벌거벗는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은 약한 자로 지탄받을지언정 죄인으로 지탄받아서는 안된다.]
특히 반성이 설 자리가 없는 이 말이 턱 걸린다. 묻는다. 그것은 죄가 아닌가? 정말 그런가? 쾌락 없이 고문의 도구가 된다 한들, 그 경지에 어렵게 오른다 한들, 그렇다면, 카지노 쿠폰 대상자의 상처와 증오가 없을까? 고문을 행한 자로서 한 점 죄책감이 없어도 되는가? 여기서 같은 책에 수록된 <신성한 집을 떠올린다. <신성한 집에서 주인공은 재개발이 예정된 판자촌의 집을 구매하고 그 집을 팔 수밖에 없었던 청년의 적의를 만난다. 하지만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샀을 테니 위법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잊는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가? 시스템이 문제고 자본주의 세상이 문제라면 그 속에서 그런 선택을 한 나는 괜찮은가? 죄책감 없이 할 수 있는 선택인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덧2.
사실, 나는 우월감이 없는 카지노 쿠폰을 하나 알고 있다. 나에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얼음의 집의 단어로 말하자면 짐승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양이 화장실을 정리하고 고양이 물그릇 세 개와 밥그릇 두 개를 수거해 설거지한다. 깨끗한 그릇에 신선한 물과 바삭한 사료를 붓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이불속에 고양이가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굴 모양으로 이불 입구를 만든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 고양이는 새 물과 새 밥을 먹고, 깨끗한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 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 속에 들어가 점심때까지 깨지 않고 잔다. 내가 밥을 줘야 고양이는 밥을 먹고, 내가 물을 줘야 고양이는 물을 먹는다. 하지만 나의 행동은 순도 100% 집사의 그것이다. 카지노 쿠폰자는 고양이인가 나인가? 나일 수도, 고양이일 수도 있지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리 사이에 우월감은 없다. 내가 떠올리고 눈물이 날뻔한 우월감 없는 카지노 쿠폰은 이런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 (앗 고양이 가진 자의 우월감을 표출해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