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은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 북동부, 고센(Goshen)의 한 들판에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물들고, 서쪽 지평선 위로 떠오른 태양은 마치 하루의 마지막 장면을 아껴두기라도 한 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빛을 떨구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이따금 지나가는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저녁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 순간, 이곳이 단지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한때, 이곳은 성경 속 인물들이 실제로 걸었던 땅이었다. 요셉이 형제들을 이끌고 야곱을 모셔온 곳, 히브리인들이 처음 정착했던 땅. 바로 그곳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땅은 평평하고, 풀은 이미 추수된 듯 마른 밀 줄기만이 뿌리처럼 남아 있었다. 저 멀리에는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었고, 소떼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들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엔 몇 채의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가족 단위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마을이었다. 남자들은 염소를 돌보고 있었고, 여자들은 불을 지피며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앉아 낙엽과 짚단을 모아 장난을 치고 있었고, 그 사이를 작은 염소 한 마리가 폴짝거리며 뛰어다녔다.
내가 멀리서 사진을 찍자, 마을의 한 어른이 손짓을 하며 다가오라고 했다. 주저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환한 웃음과 함께 손에 쥔 빵을 내밀었다. 조금 있으니 열다섯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나를 맞아 주었다.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 입은 여자들과, 옥수수밭에서 막 돌아온 듯한 남자들, 그리고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웃는 아이들까지. 카메라를 들자 모두가 천진하게 포즈를 취했다. 마치 이 순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온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카지노 쿠폰의 천막 곁에 앉아 함께 차를 마셨다. 커다란 주전자에 민트잎을 가득 넣고 달인 차는 그 어떤 고급 카페의 음료보다 깊고 따뜻한 맛이었다. 모래바람이 살짝 불어오자, 아이들이 재빨리 천막의 모서리를 눌러 잡았고, 어른들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천 년 전, 이 땅에서 히브리인들도 이렇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흙을 밟으며 가축을 돌보고, 해가 질 때까지 카지노 쿠폰 일하고, 그날의 수고를 저녁식탁 위에서 나누며 하루를 마감하던 삶. 그들도 분명 이렇게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조상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땅을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갔단다."
"야곱은 밤새도록 씨름하며 축복을 구했지."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세우셨어."
그 이야기는 글이 아닌 기억으로, 종이 아닌 입술과 가슴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이어지고, 삶의 방식 속에 스며들며 하나의 정체성이 된다.
오늘의 이 고센 마을도 마찬가지다. 외부 문명으로부터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지혜와 공동체의 온기가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름 모를 여행자에게도 마음을 열고, 자랑스레 가족을 소개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기억들—세월을 견디게 해준 신념과 조상의 말들, 계절 따라 움직이는 삶의 리듬—그 모든 것이 이곳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나는 그들 속에 잠시 머물며 내 안의 기억도 꺼내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 나를 키워 준 목소리들, 내가 붙들고 살아온 믿음과 이야기들. 고센의 붉은 노을 아래에서 나는 나의 뿌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기억하며 사는지는 어쩌면 그런 아주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카지노 쿠폰는 어둠이 내렸다. 하늘엔 별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람들은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짐승들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들판 위에 남은 온기와 발자국은 여전히 이 땅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는 그렇게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늘도,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카지노 쿠폰 들판에서 만난 유목민 가족의 얼굴이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붉은 노을 아래 빙그레 웃던 그들의 모습은 단순한 환대 이상의 의미로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떠돌이였고, 정착하지 않은 자들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단단해 보였다. 눈빛엔 오랜 세월을 견딘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침묵과 확신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떠도는 사람들의 시간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가.
그 물음은 또 다른 이미지 하나로 나를 이끌었다. 바로 벽화였다. 오래된 벽면 위, 그을음과 풍화 속에서도 색이 남아 있는 선명한 장면. 사람들이 줄지어 선 채 짐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들, 화려한 문양의 옷을 입은 무리, 아이를 데리고 당나귀를 끄는 여인들… 그들은 분명히 ‘이집트 사람이 아닌 자들’이었다.
이 벽화는 ‘베니하산(Beni Hasan)’이라는 고대 이집트 귀족 무덤 안에 그려져 있다. 콘움호텝이라는 관료의 무덤 벽에, 이방인 무리들이 당나귀를 이끌고 이집트 관리 앞에 서는 장면. 학자들은 이들을 ‘히브리인들’로 추정한다. 어떤 이는 ‘아시아계 유목민’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이 장면이 담고 있는 정체성의 이야기다.
그들은 누군가의 초대에 따라 온 손님이었는지, 생계를 위해 들러야만 했던 상인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온 자들이었다는 점이다. 타지에서 온 이들, 이국의 옷과 언어를 지닌 자들. 그 벽화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집트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은 중요하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이름으로 불리지만, 가끔은 남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별명은,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반영된 이름일 때가 많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바로 그러했다.
‘히브리’는 성경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14장, 소돔 사람이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 부를 때였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이스라엘인들이 스스로를 부른 명칭이 아니라, 타인이 불러준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어감 속엔 은근한 거리감과 구분이 담겨 있었다. ‘주류’가 아닌 자, ‘정착하지 않은 자’, ‘경계 밖의 사람’. 말 그대로 ‘떠도는 자’ 혹은 ‘이방인’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나는 벽화 속 인물들을 바라보며 상상해본다.
그들은 몇 명의 가족이었을까? 떠나온 땅은 어디며, 이곳까지 오는 길은 얼마나 멀고 험했을까. 벽화에는 그들의 이름도, 말도, 기도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 안에 깃들어 있었을 기억의 깊이는 느껴졌다. 요셉 이전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그러했듯이, 그들도 아마 늘 떠나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시작은 민족이라 말하기 민망할 만큼 작고 흔들리는 공동체였다. 고정된 도시도, 정치적 힘도 없었다. 가축을 이끌며 장막을 옮기고, 우물을 파고 다시 흙을 덮는 삶. 하지만 그 가운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우리는 큰 민족이 될 것이다"라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며, 모든 민족이 그들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 삼대에 걸쳐 그 믿음 하나로 떠돌며 살아갔다.
만약 주변 국가들이 카지노 쿠폰을 바라보았다면, 아마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당신들이요?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 정착지도 없고, 성벽도 없고, 이름난 지도자도 없으면서 무슨 민족을 이룬다고?” 그리고 시간은 흘러, 카지노 쿠폰은 실제로 수백만 명의 인구가 되었지만, 여전히 애굽의 한쪽 구석에서 '외국인 노예'라 불리고 있었다.
베니하산의 벽화는 말없이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가?”
“너의 정체성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기억과 약속에 의해 세워지는가?”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아픔의 이름이었지만, 동시에 믿음의 씨앗이었다. 자신들의 언어로는 감히 말하지 않았던 그 별명이, 결국 그들을 다시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나그네였지만, 하나님은 그 나그네를 기억하셨고, 노예였지만, 하나님은 그 노예들을 자기 백성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이어가는 존재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름을 붙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하려 든다. 그러나 우리의 진짜 이름은, 기억 속 약속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야말로, 역사를 바꾸는 첫 걸음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노예의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말은 쉽지만, 그것은 단지 ‘힘든 노동’을 떠올리는 것 이상이었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것, 그것만이 노예의 고통은 아니었다. 가장 깊은 고통은, 언젠가부터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룩소르의 한 귀족 무덤, 라크미레의 무덤에 그려진 고대 벽화다. 수천 년 전의 이집트 노동 현장이 이토록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장면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햇볕 아래 끝없이 늘어선 진흙 벽돌들.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흙을 반죽하고 있다. 그의 손은 거칠고 빠르며, 그 뒤로는 벽돌이 마치 한 줄의 문장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다.
현대 이집트 남부, 엘리펀틴 섬.
그곳에서도 같은 장면을 만날 수 있다. 흙과 짚을 섞고, 틀에 넣고, 햇볕 아래 말리고, 쌓고, 다시 옮기는 일. 그 노동은 여전히 반복적이고, 무겁고, 단조롭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벽돌은 그렇게 만들어져 왔다.
성경은 말한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가장 심한 억압을 받았던 시절, 그들이 했던 일은 바로 이 ‘흙벽돌 굽기’였다고.
애굽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하던 어느 날부터(출 1:8), 히브리인은 환영받던 손님에서 국가 부역의 손으로, 곧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곡물 창고 도시인 비돔과 라암셋에서 카지노 쿠폰은 공공 노동에 동원되었고, 학대가 심해지자 물리적 수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농사와 흙 이기기, 벽돌 굽기까지 시켰다(출 1:11, 14).
하지만 억압할수록 카지노 쿠폰은 더욱 번성했다. 그래서 왕은 더 무거운 짐을 지웠다. 더 많은 벽돌을, 더 적은 재료로, 더 짧은 시간 안에 만들도록.
심지어 출애굽기 5장에서, 바로는 “이제 짚도 주지 말고, 벽돌은 예전처럼 채우라”고 명령한다. 짚 없이 진흙을 굽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건 단지 힘든 노동이 아니라, 희망을 꺾기 위한 고의적인 시도였다.
무릎을 꿇고 진흙을 덩어리째 퍼내는 남자. 그 손은 말이 없다. 그 표정은 묻지 않는다. 다만,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할 뿐이다.
노예의 삶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시간이 없다.
자신의 말이 없다.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마음은 점점 닫혀간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던 시절이 생각난다. 밤늦게까지 공장 기계 앞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그들의 모습. 기계처럼 움직이지만, 그 안에도 사람이 있었다. 한 젊은 근로자가 말했던 문장이 아직도 기억난다.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점점 생각이 없어져요. 머리가 멍해지고, 새로운 걸 떠올릴 수가 없어요.”
그 말은 현대 산업사회에서도 단순노동이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침묵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었다하물며, 수백 년을 이어 단절 없이 같은 노동을 하며 살아야 했던 고대 히브리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카지노 쿠폰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자녀에게 다른 삶을 꿈꾸게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조상의 믿음을 되새길 여유가 과연 남아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생존 그 자체였다. 정체성을 묻는 것조차 사치였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조차 숨을 골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건 희미한 이름 하나뿐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그러나 그 이름조차 이제는 전설처럼, 아주 오래된 노래처럼 들렸을 것이다. 히브리인은 그렇게,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 기억되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의 시작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카지노 쿠폰을 잊지 않으셨다.
무릎 꿇고 흙을 이기던 손들, 허리를 굽히며 짚을 섞던 등, 눈빛조차 흐려진 그 얼굴들을, 하나님은 기억하셨다.
흙먼지 속에 묻힌 시간들.
이방인이라는 이름, 노예라는 별명, 무릎 꿇은 노동의 자리에서 카지노 쿠폰은 점점 자신을 잃어갔다. 하나님을 부를 기력도, 자신의 이름을 되뇌일 여유도 카지노 쿠폰에겐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단 한 분은 카지노 쿠폰을 잊지 않으셨다. 성경은 아주 단순한 말로 그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카지노 쿠폰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카지노 쿠폰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카지노 쿠폰을 돌아보셨더라.”
(출애굽기 2:24–25)
사람이 기억을 잃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잊힌 이름, 눌린 정체성, 그 모든 것 너머에,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자기 백성’이라 부르신다. 히브리인의 이야기는 바로 거기서 다시 시작된다. 이제, 그 기억이 어떻게 움직이기 시작하는지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는 그 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