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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Apr 17. 2025

'남북 전쟁'-카지노 쿠폰 갈등, 분열하는 미국

[1] 도덕과 경제의 정면충돌

카지노 쿠폰미국은 19세기 초부터 북부 자유주와 남부 노예주로 갈라져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美 카지노 쿠폰 갈등

미국은 19세기 초부터 양 진영으로 극명하게 나뉘기 시작했다. 노예제를 허용하는 주와 그렇지 않은 주였다. 후자인 북부주의 경우 농업보다 자유 임노동에 기반한 상공업이 발달했다. 주로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노동력이 형성돼 굳이 흑인 노예가 필요하지 않았다. 전자인 남부주의 경우는 달랐다. 여기선 면화 농장이 발달했으며, 노예를 동원한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조면기가 발명됨으로써 면화의 씨앗을 빼내는 과정이 수월해졌다. 이에 씨앗 제거에 종사하던 노예들을 대거 목화재배에 투입했고, 목화를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으면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노예들을 활용한 수익성이 입증된 만큼, 남부는 더욱 노예제에 집착하게 됐다.) 남부에게 있어 면화 산업은 핵심 기반이었고, 노예는 이를 지탱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남부에서의 노예 숫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나 수백 만 명에 이르렀다. 노예제를 둘러싼 북부와 남부의 대립, 갈등은 서서히 표출됐다. 기독교 신앙과 계몽주의, 독립선언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북부는 노예제를 사악한 것으로 규정했다. 노예라고 학대받는 이들도 최소한 자유와 생명,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대세를 형성했다. 이로 인해 북부는 미국의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남부는 독립 당시부터 유지해 온 생존권인 노예제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이런 가운데 1818년 서부의 미주리 준주가 노예주로 연방 가입을 신청했다. 이전까지 북부자유주와 남부 노예주의 수는 11대 11이었는데, 미주리가 노예주로 연방에 들어올 경우 이 균형이 깨질 판이었다. 이에 북부는 미주리의 연방 가입을 적극 반대했고, 남부는 적극 찬성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나마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이 등장해 '미주리 타협'을 이끌어내면서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됐다. 미주리를노예주로 연방에 가입시키는 대신 매사추세츠 북부를 메인주로 승격시켜 자유주의 숫자도 늘렸다. 아울러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얻은 지역들을 위도 36도 30분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자유주, 이남은 노예주로 삼기로 합의했다. 매우 절묘한 균형 맞추기가 이뤄진 셈이었다. 하지만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얻어진 영토를 둘러싸고 또다시 갈등이 발생했다. 북부는 신규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는 윌몬 법안을 제시했다. 더욱이 신규 영토 중의 하나였던 캘리포니아가 위도 36도 30분선 아래에 있었음에도 자유주가 되길 소망했다. 당황한 남부는 새로운 노예주를 찾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자칫 북부에게 밀리고 노예제 폐지 움직임이 확산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이번에도 헨리 클레이가 나섰다. 연방 붕괴를 걱정한 그는 중재안을 내놨다. 핵심은 캘리포니아는 자유주로 편입하되, 유타와 뉴멕시코를 주민투표에 근거해 노예주로 삼을지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클레이의 안은 의회에서 적잖은 진통을 겪었다. 가까스로 관련 법안이 통과된 뒤 미국은 아슬아슬한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껏 노예제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극적 타협으로 무마됐다. 다만 여전히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1854년 갈등을 격화시키는 사건,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제정이 이뤄졌다. 이는 준주에서 주로 승격될 캔자스의 주민들이 인민주권 원칙에 따라 노예제 존폐 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게 하자는 게 골자였다. 앞선 미주리 타협에 따르면 캔자스는 위도 36도 30분선 이북에 있었기 때문에 자유주가 되는 게 합당했다. 해당 법안은 이 타협을 무시하고 불투명한 상황에 처하게 했다. 이때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남부의 노예제 존속론자들이 대거 캔자스로 몰려들었다. 양 진영은 캔자스를 자신들이 선호하는 지역으로 만들려 했다. 저마다 중무장을 한 채 개표 조작과 무력 사용을 남발했다. 극심한 부정 선거가 이뤄진 가운데 캔자스는 노예주가 됐다. (추후 1861년에 캔자스는 자유주로 변경됐다.) 투표 이후에도 문제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일명 '유혈의 캔자스'였다. 노예제 존속론자들이 대표적인 자유주의 마을인 로렌스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에 급진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 등은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캔자스 프랭클린군의 포타와토미 골짜기에 거주하는 노예제 존속론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1859년 10월에는 결사대를 조직한 뒤 하퍼스 페리의 연방정부 무기창고를 급습했다. 이를 통해 노예들을 무장시킨 다음 노예제 존속론자들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무장투쟁 인원이 너무 적었고, 연방군의 신속한 반격으로 실패했다. 체포된 브라운은 재판 변론 과정에서 기독교 윤리에 입각한 도덕주의와 합리성에 기반해 노예제를 맹렬히 공격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 등이 브라운의 사면을 요구하거나 물리적으로 탈출시키려는 계획도 모색됐다. 브라운은 자신을 향한 우호적인 움직임들을 모두 사양하고 순순히 사형대로 걸어갔다. 북부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추앙했지만, 남부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뒤따랐다.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노예제 존속론자들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폭력과 분열의 양상이 나타났다. 특히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하원 의원이 북부 출신 의원인 찰스 섬너를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남부 출신 의원들은 이를 말리지 않고 크게 웃으며 즐겼다. 심지어 어떤 의원은 의회 안에 권총까지 들고 와 생각이 다른 의원들을 위협했다. 남부 출신 의원들은 의회에서 노예제에 관해 토론하는 것 자체를 막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즈음에 연방대법원이 갈등에 불을 지르는 판결도 했다. 흑인 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으며, 특정 지역에서 노예제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사실상 연방대법원이 미국은 전 근대적인 노예 국가라는 것을 인증한 셈이었다. 상황 개선의 실마리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 지속됐다. 이런 가운데 대망의 1860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노예제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었다. 북부와 남부는 그 어느 때보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링컨등장과 미국의 분열

당시 대선을 주도하는 정당은 공화당과 민주당이었다. 신생 정당이었던 공화당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이 뭉친 연립정당이나 다름없었다. 중앙정부가 이미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들을 간섭할 순 없지만, 아직 주 정부가 출범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현재의 노예주들이 스스로 노예제를 포기하도록 만든다는 목표도 세웠다. (북부) 민주당은 공화당과 다른 노선을 견지했다. 이들은 노예제를 소극적으로 지지하거나 현상유지를 택했다. 백인 우월주의를 공공연히 내세우기도 했다. 나아가 남부 민주당은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화당의 유력 주자로 떠오른 인물은 에이브러햄 링컨이고, 민주당 유력 주자는 스티븐 더글러스였다. 특히 링컨의 인생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는 실패와 슬픔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다. 켄터키주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뒤 우체국 직원, 뱃사공, 측량기사, 프로레슬러, 가게 점원 등 여러 직업들을 전전했다. 개인사업도 벌였지만 연이어 실패했다. 그 대가로 빚을 갚는 데에만 17년이 걸렸다. 1832년에는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출마해 13명 중 8위로 낙선했다. 힘들게 공부해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 재출마해 당선됐다.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개인사만큼이나 링컨의 정치 인생도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서 낙선했고, 1844년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했지만 공천 관문에서 좌절을 맛보았다. 1846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돼 워싱턴 중앙정치 무대에 간신히 등단했다. (20대 초반에 정계에 투신한 것 치고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1855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 3분의 1 정도의 지지만 받으며 낙선했다. 이때 링컨의 나이는 50대에 근접하고 있었다. 매번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링컨은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그는1858년 상원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해 더글러스와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비록 이 선거에서도 낙선했으나, 탁월한 언변으로 노예제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하며 국민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 링컨이 더글러스와 행한 세 차례의 노예제 관련 토론은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명토론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해당 토론과 더글러스와의 경쟁은 링컨의 대권가도를 활짝 열어주는 기적을 불러일으켰다.


공화당이 링컨을 중심으로 뭉친 반면 민주당은 북부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으로 분열돼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북부 민주당을 대표하는 더글러스를 남부 민주당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가 노예제를 명확히 지지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국 남부 민주당은 별도의 후보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링컨은 대선에서 어부지리 효과를 누릴 수 있었으며, 약 40%의 득표율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남부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노예제를 격렬히 반대하는 강경주의자와 그 세력이 백악관까지 점령했다고 판단했다. 링컨은 기본적으로 노예제를 혐오했고, 노예제 폐지라는 신념도 갖고 있었다. 한 연설에서 그는 "노예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만 급진적 폐지론자는 아니었으며, 점진적인 폐지를 추구했다. 이는 정치적 현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노예제 문제로 인해, 남부의 연방 탈퇴라는 불상사가 발생할 가능성을 극도로 우려했다. "누군가가 연방이 분열되는 한이 있더라도 노예제를 당장 폐지하자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다"라는 발언은 링컨의 현실 인식을 정확히 보여준다. 즉 개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 자유, 평등에 기반해 노예제 폐지를 적극 옹호했지만, 수많은 사안들을 감안해야 하는 공직자의 위치에서 개인적 신념을 함부로 내세울 수 없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남부에서는 링컨이 당선되자마자 연방 탈퇴론이 거세졌다. 입법부에서 아군인 민주당이 분열된 것에 더해 행정부까지 넘어간 이상, 연방 차원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확신했다. 노예제에 기반한 강고한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빼앗기는 일만 남았다는 위기감이 확산됐다. 급기야 1860년 12월부터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대표적인 남부 노예주인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이곳은 남부 극단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뒤이어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조지아, 앨라배마, 플로리다, 텍사스 등이 줄줄이 연방을 탈퇴했다. 또 다른 노예주인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는 연방에 남았다. 남부는 1861년 2월 제퍼슨 데이비스를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앨라배마의 몽고메리를 수도로 삼아 아메리카 연합국을 건국했다. (수도는 추후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로 이전했다.) 이들이 제정한 헌법을 살펴보면, 전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를 구하면서'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키는 조항도 추가됐다. 대통령은 개별조항 거부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를 통해 의회에서 제정한 법안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노예 가격이 낮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예수입 금지 조항도 넣었다.


같은 일들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이전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은 상당히 무능했기 때문에, 갈등을 조정하거나 남부의 준동을 조금도 막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남부의 연방 탈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그렇다고 무력을 사용해 강경 대응하겠다는 의지도 피력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다. 사실상 문제 해결을 차기 정부에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의 연방 탈퇴는 가속화했고, 연방정부 기관을 무력 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남부에 있는 연방정부 조폐국이 습격당해 금이 탈취됐다. 이는 추후의 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될 터였다. 아울러 연방군의 요새와 병기창 등이 무력 점령되기도 했다. 남부연합은 군사들까지 모집하며 노골적으로 전쟁 의지를 드러냈다. 링컨은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식 연설에서 "갈라진 집안은 올바로 설 수 없다"라며 연방의 유지를 강력히 역설했다. 그러면서 남부연합의 움직임을 명백한 '반란' 행위로 규정했고, 군사력을 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남부연합의 노예제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연방으로 돌아오라는 회유책도 병행했다. 링컨은 통합적인 내각 구성을 통해 국가의 분열상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표출했다. 국무장관에 정치적 라이벌인 윌리엄 수어드를, 전쟁장관에 민주당원인 에드윈 스탠턴등을 임명했다. 또한 열차를 타고 70여 개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분열이 아닌 통합을 강조하는 연설도 했다. 남부연합은 링컨의 메시지에 전혀 화답하지 않았다. 링컨의 연설에서 드러난 궁극적인 목표는 미국 영토 내에서 노예제의 완전 폐지라고 결론 내렸다. 남부연합은 링컨과 북부연방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파국적인 남북 전쟁의 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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