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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량 Jan 14. 2025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독서모임은 작년 4월에 했는데,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껴안고만 있다가 뒤늦게 공개한다.





어려운 책이었다. 내가 이 책을 100% 이해하고 쓰는 독후감이 아님을 고백한다. 독서가 꼭 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주장하며…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흘려 보냈고, 대신 온전히 이해가 되고 감동을 주는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이렇게 읽어도 이 책에는 강렬하고 전복적인 내용이 넘쳐 났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책 설명을 읽자마자 무조건 읽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책을 독서모임에 가져가면 무조건 발탁되리라는 확신도 생겼다(우리는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가져오고, 투표로 결정한다). 아니나 다를까, 서문의 한 단락을 읽어주었을 뿐인데 모두가 환호했다. 가장 근간이 되는 문제의식은 바로 다음과 같다. 미국이 9.11 테러에 대응하는 방법이 꼭 폭력이어야 했을까? 폭력에 폭력으로 응수하지 않고, 왜 폭력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며,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와 화합을 고민하는 밑거름으로 삼을 수는 없었을까? 왜 우리는 “폭력의 완화에 관심이 없”는가? 애도라는 일상적인 개념을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장시켜 논의하는 방식이 놀랍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현대 국제 정치에 만연한 폭력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9.11 이외에도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공동체의 위태로움을 다룬다.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지금 필요한 책이다.



애도의 이름을 가진 폭력

그렇게 저자는 9.11 이후 애도의 기간이 얼마나 짧았는지, 애도를 종료하고 그 자리를 채운 보복이 어떻게 미국의 패권을 유지 또는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 살펴본다. 9.11 이후, 미국은 반격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침공… 미국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고, 9.11로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는 전쟁에 대한 지지로 포장되었다.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위를 강화하는 과정이었다.


낙인은 폭력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미국이 겪은 아픔으로 인해 폭력은 정당해졌으며,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은 비난 받았다. 저자는 여기서 논의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문제로 확장한다. 평화와 반전과 용서를 말하는 존재가 ‘반미’로 연결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폭력을 비난하는 것은 반유대주의로 연결되는 것이다. 반미 또는 반유대주의와 같이 쉽게 붙여지는 낙인은 지속적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피해를 입은 집단을 비판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의식까지 나아간다. 언뜻 보면 비논리적인 것 같지만 집단의 뭉툭한 움직임은 뾰족한 논리로 설명되는 것 같지 않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미국의 폭력이 가진 잔혹함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미국의 폭력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얼굴들은 언론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에 대한 개념이 인상 깊은데, 레비나스를 인용하며 얼굴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얼굴의 효과를 국가가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국가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얼굴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지울 수도 있다. 빈 라덴이라는 구체적인 적의 얼굴은 사람들의 적개심을 키우고, 괴물 같은 존재로 타자화되면서나 전쟁에 대한 반발의 가능성을 제거했다. 이렇게 폭력은 반격으로서의 정당성을 얻는다.


우리나라 역시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얼마나 쉽게 휘두를 수 있는 통치의 도구였는지 알 수 있다. 툭하면 ‘종북’을 호명하는 정치인의 발언을 보라. 사람들의 적대감은 활용하기 너무 쉽다. 증오해야 할 대상을 정하고 얼굴을 돌리면 시선이 쏠린다. 9.11의 복수가 곧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연결되었듯, 분단 국가라는 현실은 정치인과 정당이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설파하고 상대를 비난하는 데 이용되었지 않은가.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 3월호,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것인가" 편과 함께 듣고 읽길 권장한다. 전쟁 이야기는 선동에 이용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위태로운 삶”이란 결국 공동체의 위태로움이다.



취약성에 주목하기


버틀러는 9.11 이후 미국이 상황의 인과에 대한 사유가 부족했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제국주의가 미국에 대한 공격의 필요조건이며, 그 공격은 제국주의의 지평 안에서 일어나고, 제국주의의 지평이 없다면 그런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9.11 이후에 이런 자기성찰적 태도가 자리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 라덴을 규탄하면서도 빈 라덴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기꺼이 묻”는 태도를 가리킨다(39쪽).


주디스 버틀러의 논문 중 <취약성을 재사유하기라는 글이 있다. 그는 여기서 취약성은 그 자체로 저항이 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행위뿐만이 아니라, 취약성을 지니고 있는 상태 자체로 저항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존성이 우리를 결속하고, 그런 의존성에서 우리의 사유와 친화력이, 우리의 취약성과 친화력과 집단적 저항의 토대가 나온”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국의 취약성이 드러난 사건이 세계 모든 국가의 취약성을 이해카지노 쿠폰 계기, 미국이 독점카지노 쿠폰 세계의 위계질서를 내려놓고 다른 국가와 공존카지노 쿠폰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약성, 의존성, 공존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내용이 많았다. 버틀러는 양면적인 세상의 법칙을 꿰뚫어본다. 타인과 분리될 수 없고, ‘사회적 존재’라는 표현으로 설명되는 우리의 의존성은 우리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연결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의존성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에서 함께 살기 위한 법이다. 취약성을 계기로 전환하고, 작은 지역의 평화를 세계의 평화와 병치하는 확장적인 사고가 필요함을 느낀다. 『지구 거버넌스와 NGO』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한반도 평화의 유지 문제를 동북아의 지역 패권 차원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평화와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훨씬 더 용이하게 문제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 한반도 평화의 유지 문제가 이 시대 지구촌 전체의 윤리적 책무라는 인식을 범지구적으로 확산하고 공유하는 일의 중요성에 눈뜨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지구촌 차원의 반인류적 범죄로 자리매김하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오늘의 이스라엘 건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반도 평화의 유지가 지구촌 최대의 윤리적 현안이라는 인식을 범지구적으로 확산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평화를 우리가 지켜내는 데 있어 핵심 과제라는 인식을 보다 더 확고히 다져야 하는 이유다.”


*


이 책은 2004년에 출간되어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렇게 우리 주변의 이슈들을 설명해준다. 폭력과 갈등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상황을 떠올렸다. 분단국가의 현실뿐만이 아니라 식민 지배를 받았던 고통의 역사. 특히 일본군 ‘위안부’를 떠올렸다. 우리의 애도 방식에 대해, 그리고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무엇을 막았는지에 대해. 마침 <정희진의 공부 3월호는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서도 다룬 참이었다. 일본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 그리고 왜 한국인 ‘위안부’ 운동이 그들과 연대하지 못했는지, 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인정한 고노 담화가 ‘위안부’ 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지 못했는지, 고노 담화가 있기까지 일본 내에서 이루어졌던 시민 운동과 국내의 ‘위안부’ 운동이 연결되지 못했는지. 우리는 기억과 학습으로 이어진 고통, 적대감을 껴안고 일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배회하고만 있는 괴로운 질문이다.


그리고 <삶의 발명이라는 책도 자주 언급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이 애도카지노 쿠폰 방식은 복수가 아닌 예방과 치유였다. 원망을 삼키고 또 다른 고통을 막기 위한 이들의 행동과 그 감동... 또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의 얼굴도 언급되었다. 적대감으로 얼룩져 중요한 논의를 꺼내기 쉽지 않은 상황. 갈등은 언제나 나타나지만, 갈등을 심화카지노 쿠폰 것은 적을 구성카지노 쿠폰 얼굴과 낙인, 그리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카지노 쿠폰 수사들이다…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조차 근본적인 고민을 해결해주진 못했다. 요즘 시대에 자본이나 패권보다 평화와 비폭력을 추구하는 일이 지나치게 순진하고 낭만적이라는 고민이다.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이 책의 근간이자 전제가 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전제 위에서 지적 논의를 펼친다. 국가는 비극적인 사건을 공동체를 위해 고민할 기회로 활용해야 하고, 인간의 존재를 가리지 않아야 하며, 타 집단을 배제하는 이기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폭력에 반대해야 한다고... 하지만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가치보다 국가의 패권이 더 중요하다고 답하면, 어떻게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공존과 사랑이 순진한 가치가 아님을, 누구나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물음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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