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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 Mar 01. 2025

봄에서 배우고 봄으로 카지노 게임친다

[THE 좋아지리] 01

나는 지리선생이다. 스물일곱 해 동안 지리 선생으로 살고 있다. 너무나도 잘게 쪼개진 세상에서 살아온 탓이라고 에둘러 핑계를 갖다 붙이더라도선생 앞에 붙은 '지리'라는 세부 교과목을 지워내면인간적으로선생이라 불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선생은 '먼저 살아봐 지극히 어른스러운' 사람에게 세상이 붙여주는 존칭이기때문이다.


세상은 지금 미디어와 에듀테크 기술의 발달, AI의 급성장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해졌다. 마음을 먹지 않아도 감각만 열려 있으면 온갖 지식들이 날아다니는 세상이 되었다. 궁금한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묵혀 두지 않고 찾아낼 수 있다. 오히려 지식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어 자기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개인이 역량이 진짜 지식으로 요구되고 있다.


새로운 지성 Intelligence이 등장한 것이다. 지성은 정보를 습득하고 분석하며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역량이다. 결국,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론만 다양해졌을 뿐분석을 통해 논리적으로 사고하여 맞닿뜨린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은 별게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교육의 본질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앞선 세대의 시행착오와 문화를 공유하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가르치고 배운다'는 교육 행위의 절대적 가치가현실적으로 요구되는 대목이다. '먼저 살아낸' 이들과 후세대의 활발한 교류가 필요한 영역이다. 지도 없이 낯선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만들면서 헤쳐나가야 하는 구조적 취약성을 극복하게 지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들 모두 각자의 영역 내에서'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한다. 가르치는 이들은 세분화된 분과의 교과목으로 나뉘어 서로의 장벽이 높은 지 오래다. 배우는 이들은 정보의 습득 수준에 머물면서 문제 해결로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지금의 교육에서는'돌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작동해야 한다. 이는 근대 교육이 시작된 이래 문화적 경계와 무관했던 본질이다.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의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일정한 시간 동안 보호나 감독을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가르치는 테크닉이 중요하진 않지만 테크닉에만 매몰되어 '돌봄'의 질적 평가는 배제된 채 배움의 결과를 결정지으면 안 된다.우리가 서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일상의 실천적 행위 속에서 이렇게 우리의 머리와 가슴은 분리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머리와 가슴의 경계는 어디인가? 그 경계는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의 기준으로 작동하는가?


머리와 가슴은 원래 경계가 없다. 하나의 맥락으로이어져 있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이가 배우는 이에게 배울 수 있는 게 있고, 배우는 이 역시가르치는 이에게 공유할 수 있는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실천적으로 받아들인다면가르치는 이는 가르치는 말만 내뱉지 않고 들으려 할 것이고, 배우는 이는 들으려고만 하지 않고 말을 내뱉어 묻게 될 것이다.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에 서로 더 가까이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라야 진정한 의미의 '돌봄'이 시작된다. 제도적으로, 현실적으로 분리되어야만 했던 머리와 가슴이라면 그 경계만큼 벌어진 틈을 '돌봄'을 통해 메울 수 있다.'돌봄'의 첫 번째 정체성은 '함께하는 성장'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가르치고, 배우지만 이미 알고 있다. '학교 다닐 때의 성적으로 살지 않는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말이 성적이 좋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아서 가져다 쓰는 핑계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뿐만 아니라 '선생'인우리 스스로가 이미 삶으로증명하고 있다.


진정한 배움은 서로 적극적인 '돌봄'에서 얻어진다. 그렇게 얻은 배움은 겨울에도 봄처럼 살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왜냐하면 '돌봄'의 두 번째 정체성이'봄'이기 때문이다. 깨어남이고, 도전이고, 희망이며, 연대이고, 환대이며 생명인 것이 곧 봄의 정체성인 이유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봄'을 많이 경험한 서로는 어둡고 추운 한겨울을 만나더라도 봄처럼 살아낼 수 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움츠린 몸을 끌고, 같은 장소에서, 익숙한 이들 사이에서 하루를 채우는 일상은 봄이 오는 것을 알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나와 아이들의 '봄'을 위해 나는 지리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지리는 내가 아니어도 가르칠 이들이 넘친다. 그럼, 나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그건 지리라는 교과목을 도구 삼아 아이들의 자기 봄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의지를 심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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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지혜'다. 지혜 Wisdom는 거듭되는 사유를 통해 내 것이 된다. 이것을 위해 단지, 가르치는 이에게는 용기가 필요하고, 배우는 이에게는 존중이 필요할 뿐이다. 용기는 지성이 감성의 문을, 존중은 마음의 문을 여는데필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파머의 조언처럼 공과 사의 교차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이 카지노 게임침*이고 배움이다.

*파커 파머, 카지노 게임칠 수 있는 용기, 2007, 한문화, p.115


이미 봄이다. 얼었던 산야와 대지가 촉촉해진다. 움츠렸던 나무들이 촉촉함을 마음껏 빨아올리느라 중력을 거스르는 찬란한 소리들이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도 같이 녹아내린다. 물결이 되어 3월에 만난다. 봄은 학교 안으로 서로의 돌봄 기회를 가져다 놓는다.그러는 동안 학부모에게는 진짜 자기 돌봄의 기회가 생긴다.


이제 우리는 봄을 핑계 삼아 서로의 돌봄 기회를 마음껏 누리기만 하면 된다. 기회를 누리다 보면일상이기에 낯설었던 '사유'의 틈이 조금 더 벌어질 테다. 이때는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사이에덕성 Virtue이 시작되는길목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가르치는 이이면서 배우는 이다. 이 진리를 수용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덕성은 자라기 시작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우리 모두의 일상은 지금보다 조금씩, 조금씩 맛있어지리라, 더 좋아지리라.3월이어서, 봄이어서!!







[지담_글 발행 요일]

.......아빠의 유산

.......문장유람(人터뷰)

.......문장유람(제다이)

,....잘 놀줄 아는 사람

.......모든 게 괜찮아질 당신

......금주의 영단어/THE좋아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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