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시골에서의 삶을 시작한 계기
아이와 캐나다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4년 전의 일이었다.
코로나19가 세상을 휩쓸었고 나와 우리 가족 역시 함께 휩쓸림을 당해다. 당시 5학년 카지노 게임교사였던 나는 꼼짝없이 집에 갇혔고, 당시 6살이었던 지노도 마찬가지였다. 1개월 반이나 늦어진 개학은 4월로 확정이 되었다. 세상은 새로운 바이러스로 공포에 떨고 있었고,교사인 나는 처음으로 해보는 온라인 수업에 치를 떨었다. 매주 기본적으로온라인에 올려줘야 하는 수업 영상을 준비하고, 매일 실시간 수업들을 해야 했다.그 와중에 남편은 사회복지사로 사회필수근무직종이라출근을 해야 했고, 6살 난 아이는 어린이집(7세까지 다니는 일반 어린이집을 다녔다.)에 가지 못하고 나와 함께 있어야 했다.
내가 실시간 수업을 하는 동안 아이는 오전 내내 별 수 없이 카지노 게임 DVD플레이어에 의지한 나날들이었다.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한 엄마표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영상과 카지노 게임 책을 함께 한글 책과 함께 노출했다.) 제법 카지노 게임와 한국어를 둘 다 능통하게 하는 아이로 성장 중이었는데, 많은 시간을 카지노 게임로만 떠들어대는 엄마랑만 보내야 한 데다가 어린이집에 간 날이 손에 꼽자 한국어보다는 카지노 게임로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나는 그런 아이의 변화에 신기해했고,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카지노 게임유치원을 보내지 않았어도원어민스러운 발음으로 현지인처럼 카지노 게임를 말하는아이가 나름 자랑스러워서 함께 초등학교 고학년수업 영상을 찍으면서 발음 부분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자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Mom, Nobody can speak English around me except you. I want to meet people who can speak English." (엄마, 엄마 말고는 내 주변에선 아무도 카지노 게임로 말을 못 해. 나는 카지노 게임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런 말이 한번뿐이면 화상카지노 게임를 시키고 넘어가지 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의 언어적 갈급함을 그때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린이집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Now, I can speak English with you!! Hooray!" (이제 엄마랑 카지노 게임로 말할 수 있다! 만세!)
아이는 그때 이후로 계속 카지노 게임 발화에 대한 욕구를 계속해서 드러냈다. 화상카지노 게임를 종종 시키긴 했지만, 아직 아이가 어린 터라 컴퓨터 앞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위한 대화는 쉽지 않았다. 같이 학교에서 일하는 원어민과 종종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면 그렇게도 좋아했다. 언젠가는 자기는 카지노 게임로 말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카지노 게임가 한국어 보다 더 편한데, 이곳은 한국어만 있어서 너무 불편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나는 왜 그리도 엄마표카지노 게임를 해서 애를 이 지경을 만든 것일까.
고민을 많이 했다. 당시 나는 화상카지노 게임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튜터 소개 란에 바이링구얼(이중언어자)로 되어있는 사람들을 예약해서 이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부분은 이렇게 말했다.
"학교 가면 크면 나아져! 오히려 카지노 게임를 잊을걸? 걱정하지 마."
지금은 카지노 게임가 더 편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카지노 게임를 잊을 거라는 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캐나다에서 홈스테이 하던 집은 한인교포였는데, 그중 막내였던 아이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어릴 때는 한국어를 더 편하게 했다는데, 학교를 다니자 한국어 쓰기 싫다면서 카지노 게임만 할 수 있는 아이로 컸다는 것이다. 지금은 카지노 게임가 더 편한 아이지만, 그 와중엔그만큼 모국어가 성장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불안했고, 커서는 결국은 카지노 게임를 잊고 모국어만 기억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카지노 게임학습에 관련된영상에서는 만 12세 이전에 언어를 노출하면 그 언어를 학습을 하는 게 아니라 습득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일종의 모국어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기도 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좀 나이를 먹어서 카지노 게임를 배운 나로서는 20년 넘게 카지노 게임공부에 매진했으나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는 점에서 확 와닿았다.
20여 년 전, 캐나다 어학연수를 갔다가 그 누구도 내 말을 알아먹지 못해서 막막하던, 이곳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일어나기가 무서웠던, 캐나다에 도착한 첫날의푸르른 새벽공기가 떠올랐다. 나는 무섭고 힘들었으나, 내 아이를 그곳에 데려다 두면 나랑 다른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 아이는 이미 Tooth fairy (이빨 요정)과 해치를 동시에 아는 아이로 자라나고 있었고, 이미 저 아이에게 두 종류의 문화적 배경을 어릴 적부터 선물하고 말았는데, 그곳에서 자란 아이는 더 큰 마음을 품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한국에서의 교육은 점점 힘들어지는 편이라서 초1 때 한글교육을 잡아주고 초2 때 캐나다에 다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4년간 열심히 돈을 모았고, 막판에는 대출까지 받았다. 집을 사는 것도 아니고, 차를 사는 것도 아닌데, 고작 캐나다행 1년을 위한 대출을 받으려니 손이 떨렸다. 거기에다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동행자가 생겼다.
당시 우리 엄마인 은순씨는10년 넘게 치매가 걸린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계시면서 일을 하셨는데, 은퇴를 하시고 나서 내가 느끼기엔 조금 우울한 느낌이 많이 나셨다. 원래 통이 크고 뒤끝 없는 분이셨는데, 어느 날부터는 감정조절을 힘들어하셨고, 작은 일로도 서운해하셨다. 엄마는 평생을 일하신 거나 마찬가지셨고 일을 그만두면서 갑자기 생긴 시간 공백이 엄마에게 힘든 일이었다. 엄마에게는 해외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가 있었고 나는 넌지시 "같이 캐나다에 갈래요?"라고 물었다. 엄마는 간다. 안 간다. 간다. 안 간다 하면서 6개월을 고민하셨다. 외할머니를 요양원이 보내기가 제일 겁이 나셨다고 하셨다. 본인 손으로 모시고 싶다는 마음과 엄마역시 노인이 되다 보니 신체적으로 힘든 시점에서 부모의 손을 놓아버리는 게 아닌가 싶으셨던 거 같다.비행기 표를 끊어하는 시점을 드리고 나자 그때 엄마는 할머니는 시설이 좋은 요양원에 1년만 맡기고 가시겠다고 결정하셨다.
나는 엄마가 인생 처음으로 본인을 위해서 시간을 내기로 결심하셨다고 나는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IMF때 실직하신 아빠를 대신해서 직장생활에 뛰어드신 엄마의 바쁜 삶으로 인해 중학교 때부터 혼자 밥 차려먹고 혼자 큰 딸내미가 외국에 간다고 하니 마지막으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동상이몽을 가지고2023년 1월 30일.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남편은 1년 동안 직장에서 도무지 휴직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관계로 5개월 뒤 여름에 방문하기로 했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는 것이 슬퍼서 공항에서 눈물을 쏟았다. 공항까지 따라오신 시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셨다.하지만 나는 눈물은커녕 땀만 났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그 전까지만 해도 캐나다에 간다는 것에 대해서 재미있을 것 같아! 하며 즐거워했던 나는 막상 공항에 도착하자 이제 어린이와 노약자를 모시고 무사히 캐나다로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목이 조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일방적인 한쪽만의 눈물을 뒤로하고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이는 조금 신나 하면서도 조금은 무서워했고, 승무원 누나에게 카지노 게임로 말을 걸면서 "카지노 게임로 말하니까 좋아!!" 하며 좋아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드는 생각은 나 자신을 향한 욕이었다.
"아... 내가 미쳤다고 왜 캐나다에 간다고 했지."
4년을 준비해 놓고도 막상 가려니 겁이 났다. 돈도 왕창 쓸 거고 아이가 가서 캐나다 학교생활을 잘 할지, 돌아와서 한국학교에 적응을 다시 잘 할지, 엄마는 괜찮으실지, 가서 병원은 잘 다닐 수 있을지, 가족이 심하게 아프면 어떡할지. 오만 생각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서 비자를 받을 일이 걱정되었다. 나는 학생비자, 지노는 동반비자, 엄마는 관광비자를 받아야해. 카지노 게임로 뭐라할지 잘 고민해보자. 사실 이미 비행기를 타버린 시점에는 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나의 복잡한 마음과 상관없이 비행기는 잘 날아서 캐나다로 향했다. 그것이 우리의 여정의 시작이었다.
참, 비자는 아주 잘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