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역사 2
한국 근대미술사 속의 여성들은 대부분 순정하고 우아하다. 포실한 소녀나 단아하고 순결한 처녀, 현숙하고 조신한 자태의 여인들이 등장하는 그림 속에 사회의 일원으로 고민하거나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윤두서, 나물 캐기, 모시에 수묵, 30.2x25.0cm, 18세기 초, 보물 제481-1호
공재 윤두서(1668-1715)는 윤선도의 증손이고 정약용의 외손이다.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공재는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기 급급한 시대에 나물 캐는 조선의 여인을 그렸다. 산비탈이 경사를 이루고 뒷 배경의 산은 아직도 중국의 산을 연상케 하지만 화면 가득히 채운 두 여인은 생활 속의 조선 여성이다. 조선의 풍속도는 윤두서가 창조하여 조영석에 이어졌지만 조영석의 그림 속에도 여성은 집안일하는 여성으로 제한된다. 걸출한 풍속화가 김홍도 신윤복 그림 속의 여성들도 <주막처럼 객줏집 여성을 제외하면 가내수공업을 하는 여성이 대부분이다. 당시 유교사회에서 기생이나 주막집 여자처럼 ‘내놓은’ 여성이 아닌 경우 그 시대의 제약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윤두서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일하는 여성 이미지는 영 정조 때 전개되는 풍속화 속에 잠깐 등장하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슬그머니 사라진다.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1887~1956)는 우리나라 풍광을 유럽에 알린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판화가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런던에서 자랐는데 정식 미술교육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유행이나 사조를 타지 않은 감각과 눈으로 망한 나라(주권을 빼앗겼으므로) 조선의 사람들과 풍광을 남길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도착한 날은 1919년 3월 28일로 3.1 만세운동의 여파가 한창일 때였다. 대영제국의 후광에서 자란 화가에게 한국은 미개한 식민국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호기심으로 방문한 나라에서 그녀는 한국인의 고결함과 강인함을 발견하였고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마저 바뀌게 되었다. 그녀는 "절도 있고 엄하고 부지런하며 싹싹한 일본이 한국을 문명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구는 일본을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라고 술회하였다. 화가의 눈에 비친 조선은 격조 높은 나라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망인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미망인, 1919
"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당시, 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무료 카지노 게임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에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3.1 운동에 적극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를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뻣뻣한 삼베였다. 북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 (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책과 함께. 2006) 중에서)
왼쪽 뺨과 목에 고문의 흔적이 선명한 이 여인의 의연함을 양반의 도도함이나 권위의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정신적 기품을 해방 후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게 이어왔을까. 이들에 대한 예우는 제대로 했는가. 이 그림을 보며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사회적으로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나라의 자긍심을 갖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해진다. 윗 세대의 위대한 유산은 바로 이런 정신의 집합이 아닐까.
3.1 운동이 역사적 위상은 이후 항일운동의 도도한 흐름에서 가치를 더한다. <미망인 모델 같은 많은 여성들은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다가 윤석남(1939- )의 그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2018년 윤석남 개인전이 학고재화랑에서 열려 " 14인의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이 전시될 때 여성사의 한 부분이 복원되는 감동을 받았다. 맨 처음 일제 강점기 때 고공농성을 한 여성노동자 강주룡의 면모가 들어왔다.
윤석남, <강주룡 초상, 한지 위에 분채, 47*35, 2020
강주룡은 1931년 5월 29일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 최초의 고공농성을 벌인 무료 카지노 게임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 무산자의 단결과 고용주의 무리를 타매하는 연설을 하였다”라고 시위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8시간 만에 일제경찰에 강제 끌려 내려져 옥중투쟁을 이어가면서 고무공장 노동자의 입금 삭감을 막았다. 54시간의 옥중 단식투쟁으로 쇠약해진 강주룡은 평양의 빈민굴에서 생을 마쳤다. 1930년 8월 국제고무공장을 시작으로 1천800명의 노동자가 싸운 임금투쟁은 별 성과 없이 끝났지만 무료 카지노 게임노동자들이 동맹파업과 항일민족운동으로 연결되는 의미를 갖게 해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 무료 카지노 게임이다.
잠녀는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무료 카지노 게임으로 해녀와 동의어다. 토양이 척박한 제주도에서 해안마을은 반농반어의 생활을 하였는데 해녀는 특히 제주도 동북 해안마을에 많았다. 일제가 만든 관제해녀조합의 수탈에 맞서 세화리 해녀 800여 명이 개선을 요구하며 시작한 이 투쟁은 인근 마을 오일장마다 연대투쟁으로 석 달 동안 1만 7천여 명이 궐기하여 1930년대 최대 무료 카지노 게임 인원이 참가했고 부분적 성취를 이뤄내었다. 그러나 부춘화(1908-1995)등 해녀 대표자들은 구속되어 형을 받았고 한 명은 옥중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30년 전 취재 때 만난 세화리 해녀할머니는
“ 일경을 피해 높은 돌담 위로 올라가 우리 권리를 외치던 춘화성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고 자긍심이 밴 회상 하셨다. 춘화성님(부춘화)은 하도리 출신 해녀로 잠녀투쟁의 대모역할을 하신 분이다. 지금도 제주도 해녀들의 긴 물속 잠수 노동시간은 세계적으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윤석남, <김명시장군 초상, 한지 채색, 210* 94, 2020
1923년 5월 1일, 마산 최초의 노동절 기념식을 마치고 “8시간 노동 쟁취하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깃발을 들고 마산 시내를 행진할 때 김명시는 16살이었다. 마산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김명시(1907-1949)는 어머니가 3.1 운동 때 희생되었다. 당시 12세였던 김명시는 마산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 배화여고보를 다니다 모스크바 유학을 떠난다. 김명시의 활동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30년 5월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 사건’으로 만주 항일무장투쟁 선봉대의 유일한 무료 카지노 게임이었다.
1932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7년 동안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고, 출소 후에는 일본군과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는 중국 팔로군에 종군했다. 3.1 운동의 경험 이후 항일투쟁은 무장투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믿었으므로 1942년 조선의용군 창군에 기여한다. 조선의용군은 무정(김병희)을 사령관으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유일한 군대로 알려졌다. 당시 조선의용군에는 수많은 무료 카지노 게임이 참여했지만, ‘장군’으로 불린 무료 카지노 게임 지휘관은 김명시가 유일하였다. 광복이 되자 김명시는 서울로 와서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과 함께 조선국군준비대 전국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다. 종로 거리 개선 행렬에서 김명시가 무정의 뒤를 따라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시민들이 “김명시 장군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다. 1946년 11월 21일 자 독립신보에 실린 김명시 인터뷰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고 혁명 그것인 듯 대담해 보였다.”
1947년 8월부터 1949년 10월 10일 그의 죽음이 발표되기까지 2년 3개월의 시간 동안 김명시의 구체적 행적은 모른다. 194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고 한 달 후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 부평서 유치장서 자살’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0월 10일 오전 5시 50분쯤 자기의 겉저고리를 찢어 유치장 안에 있는 약 3척 높이의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었다”는 게 당국의 발표였다. 하지만 고문치사인지 자살인지, 사인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때 나이는 42살이었다.
배운성, <윤을수 신부 무료 카지노 게임 초상, 캔버스에 유채, 35*27, 1930년대
자식을 위한 평생 기도를 바치는 검약이 몸에 밴 듯한 이 무료 카지노 게임은 일제 강점기 때 이국 만리 프랑스에서 사제 공부를 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다. 아들이 만인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어머니의 기도는 자식의 안위를 넘어 크고 넓은 파장을 이룰 것이다. 배운성 화가는 초상화를 부탁하는 아들의 마음과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마음까지 합쳐 두 장의 초상화로 표현하였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바쳐서 자식을 키우고 싶은 어머니 마음이 고결하고 결연하게 느껴진다. 사회에 쓰임이 많은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3대가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초상화다. 이 그림을 보면서 친정집 이웃이었던 훈이어머니가 생각났다. 야채행상을 하며 6남매를 훌륭히 키워낸 분, 아침이면 발소리도 없이 부엌으로 들어와 친정어머니께 푼돈을 빌려가던 모습도 잡힌다. 훈이어머니는 마른 체구에 입성이 깔끔했다. 야채 행상을 접고 날품을 팔러 다닐 때도 친지나 이웃 대소사에 소홀함이 없었고 집에 오실 때 맛난 음식을 내놓아도 성큼 드시는 일이 없었다. 간신히 맛만 보고 잘 먹었다고 하시던 분. 나는 그분에게서 가난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염치가 귀한 덕목이라는 것도 배웠다. 자식에게 엄하고 남에게는 너그럽던 이웃을 윤을수신부 어머니 초상에서 만난 것이다.
배운성(1910-1978)은 20세기 한국화가로는 드물게 서울, 동경, 베를린, 파리, 평양 등으로 현주소를 옮기며 활동했던 작가다. 1930년대 윤을수신부가 파리 고성의 학감으로 재직할 때 배운성은 독일어교사로 있었다. 윤신부는 고국에 계신 어머니 사진을 배운성에게 주며 초상화를 의뢰했다. 윤을수신부는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제로 국내외에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을 공유하는 ‘인보(隣保)’정신을 확산하고 실천한 영성가로 전해진다. 19년의 해외유학생활에서 배운성이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은 한국인의 근원 찾기였고 유럽에서 돌아온 후에는 초상화에 몰두했다고 한다. 해방 후 북쪽으로 간 많은 문화 예술인들은 사실주의 경향이 강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배운성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월북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윤신부 어머니의 모습과 엘리자스 키스의 미망인의 모습은 다르면서도 닮아있다.
변월용(1916-1990)의 그림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열린 전시에서 처음 접했다.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교육을 받았고, 레핀 예술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해, 화가이자 교육자로 일생을 보낸 고려인이다. 그의 삶과 예술은 일제강점, 분단, 전쟁, 이념대립이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뿐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과 1차, 2차 세계대전, 전체주의, 냉전, 개혁과 개방을 겪은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모두 관통했다. 전시를 기획한 관계자의 말을 옮긴다.
"역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변월룡의 디아스포라 적 삶과 예술은 민족, 국민 등 20세기 근대의 화두와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다층적 측면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근대 미술사에서 한국의 모던 회화, 근대성의 중요한 맥락과 더불어 전 세계 영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유라시아 미술의 큰 부분을 보여준다 “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규모는 컸다, 화가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200여 점의 회화 외에도 판화, 드로잉과 70여 점의 사진, 도록, 잡지 등 관련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전시에서 지워진 민족 정서의 한 부분을 만났고 동시에 그동안 접했던 근현대 역사 문화 예술 전반에 대한 지식이 5천 년의 역사를 공유한 북한의 역사를 도려낸 반쪽 지식과 정보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었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1950년대 초 북한의 풍경과 예술가 초상을 통해 분단의 역사를 보여주었고 난 누구에게 할 것 없이 분하고 억울한 느낌이었다. 변월용은 북에서도 숙청되어 평생 러시아에 살면서 동포들이 거주하는 연해주와 사할린을 자주 갔다고 한다.
변월용, <사회주의 노동영웅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 200*115, 캔버스에 유채, 1969
한 슈라(1906-88)는 연해주 마을 한인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1937년 소련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해 카자흐스탄에서 지내다 1947년 통역사 자격으로 사할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할린 한인들만의 어업단체를 만들어 한 슈라도 어부가 되었고 매해 250 -350% 초과달성을 하여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한 슈라는 모스크바로 이주(1970년), 어업기업 수석기술자로 일했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 슈라가 살던 사할린 체홉거리에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다부진 체구와 표정에서 자신의 일에 충만한 무료 카지노 게임의 자신감과 내면에 깃든 따스한 마음결이 우러난다. 아버지를 이어 화가의 길을 걷는 변월용의 딸, 펜 올가는 "아버지는 사물이나 인물을 묘사할 때 그 속에 드러나는 긍정적 이미지를 포착해 그렸다"라고 회고했다.
변월용, <무료 카지노 게임. 캔버스 유화, 119.5*72, 1985
여기 어머니가 있다. 회장이 긴 하얀 저고리에 진갈색의 치마를 입고 두 손을 맞잡은 노년의 어머니. 변월룡(1916-1990)은 그의 나이 서른에 타슈켄트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렸다. 스탈린정책으로 이주한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서 바람 잡아 집을 떠난 남편 역할까지 맡아 변월룡의 어머니는 러시아말도 모른 채 자식을 건사하며 살았다. 외아들 변월룡은 학업 등의 이유로 어머니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느라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평생 한으로 여겼다. 어머니 초상화를 그린 1985년은 뇌졸중등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투병 중에는 유년의 기억과 고국의 자연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고 한다. 돌아가신 지 40년 후에 그린 어머니 손은 솥뚜껑처럼 크고 투박하다. 얼굴에는 과장된 한이나 꾸밈이 없고 지난한 노동이 점철된 손과 짝짝이 눈에 삶의 내력이 드러나 있다. 숱이 적은 은발에 한쪽 눈이 거의 감긴 얼굴은 무심한 듯 담담하다. 이 눈을 그릴 때 화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귀한 외출복이었을 명주저고리에 비단치마의 어머니. 빡빡한 질감의 짙은 갈색의 치마는 고목 같기고 거대한 뿌리 같기도 하다. 어머니는 평생 식구들의 먹거리를 담았던 커다란 질항아리를 옆에 두고 있다. 그 질박함이 숭고미가 되어 가슴에 스민다. 그림 아래쪽 귀퉁이에는 단아한 글씨체로 어머니라고 쓰여 있다. 변월용의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고국에 대한 모든 애환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근현대사 화가들에게 포착된 여성의 화려한 외모나 상위 몇 프로의 사회 문화 경제적 배경을 가진 여성 모델에서 좀체 찾기 어려웠던 모습. 우리의 고단한 근현대사에서 위엄과 존엄으로 충만한 대지의 어머니를 변월룡의 <어머니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무료 카지노 게임 어디서 오는가.
참고자료: “김명시“(이춘, 산지니,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