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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Jan 24. 2025

{나}의 과학 #2

"백수로 사는 일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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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백수로 사는 일은 가능한가?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백수로 살 수 없다면 우리는 뭐하러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뭐를 하며 살아야 할지를 고뇌한다. 뭐라도 하면서 살지 않으면 백수가 될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백수로 살 수 없어서 우리에게서는 뭐를 하러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즉, 우리는 실은 백수로 살지 못해서, 그렇게 백수를 잃었기에,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백수야말로 인간의 궁극, 인간이 인간인 이유, 우리가 우리 자신인 이유, 인간이라는 존재방식의 알파와 오메가인 까닭이다.


백수라는 것은 빈 손이라는 것. 떠올려보자. 우리가 종적으로나 개체적으로나 이제 막 직립보행에 성공했을 때 우리는 백수였다. 아무 것도 그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우리의 손은 세계를 향해 무한하고 자유롭게 열려 있었다.


그순간어쩌면손을채우고있던것이있었을지모른다. 그것은인간자신의상상력. 무한하자유롭게인간으로부터분출되고있던마법의. 상상력은지성최고의힘이다. 어쩌면지성의가장본원적기능일것이다.


이렇게 직립보행을 통해 빈 손으로 그의 삶을 시작한 이는 이제 '지혜로운 이[homo sapiens]'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간의 이름이며, 인간을 시작하는 이름이다. 그것은 단지 머리가 큰 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더 엄밀하게는 무한하고 자유로운 빈 손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기에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그 거룩한 가능성을.


인간은 공(空)하다. 우리는 이 불교적 표현을 다시 떠올린다. 인간은 백수라는 말과 같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란다. 인간이 백수인 것은 그가 돌아가게 될 바로 그 자리, 필연적 귀결. 백수는 이처럼 또한 인간을 완성하는 이름이다.


백수의 손이 비어있는 것은 그가 집착하며 어떤 것을 붙잡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것을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믿으며 강박적으로 무엇인가를 붙잡는다. 그렇게 죽지 않으려는 데만 초점을 맞추면 살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사는 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더 자유롭게 빈 손의 존재로 사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삶은 성대해진다.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삶의 성대한 이 만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귀하게 대접하며, 우리 자신을 위해 정성스레 식탁을 차린다. 건강과 복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의미,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움직인 그 순간부터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더 핵심적으로 파고 들어가보자.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실제적으로 종말이라고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닫힌 결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는 일을 싫게 만든다. 어느 날 문득 출근이나 통학을 하던 지하철에서 이대로 계속 살아갈 때 도달하게 될 뻔하디 뻔한 우리의 미래가 그려졌을 때, 아, 우리는 정말 살기 싫어졌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텐데, 커다란 회의와 절망 속에서 이 한숨이 토해졌다면 다행이다. 인간은 그러려고 태어난 것은 분명 아닌 까닭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이 손으로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일 중 하나를 한번 떠올려보자.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문을 연다.


그리고 문 너머의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선다.


이것은 아주 실증적인 창조의 일례다. 똑같은 물리적 조건 속에서도,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문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너머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똑같은 조건에서도 완전히 다른 결말에 도달한다. 그 전까지 없던 결말이 생겨난다. 그는 문의 창조자다. 그리고 그가 창조한 문을 열고 그는 입장한 것이다. 그가 그 자신을 위해 만든 가장 좋은 공간으로. 그 열린 공간으로. 새로운 미래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이 생각한 특정한 결말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뻔하디 뻔한 그 결말은 우리 자신이 집착하고 있기에 생겨난 것이다. 우리에게 종말을 예언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인 그 위대한 상상력으로 고작해야 우리를 감금할 감옥의 공간을 창조하는 일에만 쓰고 있던 것이다.


글을 쓸 때도 이와 같다. 좋은 글이 써질 때는 결말이 예단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떠한 결말을 생각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글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면서 반드시 그 결말은 바뀐다. 창조력을 집행하고 있는 작가라면 누구나 이러한 경험을 일상적으로 한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실제로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자신이 창조한 그 세계를 사랑해보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커져만 갈수록 결말은 더욱 열려간다. 사랑은 결코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될 수도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들이 자유롭기를 바라는 그 소망. 집착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글 자체가 생명을 갖고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은 글의 흐름에 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더는 고삐를 쥐고 있지 않으며 다만 글 자체에게 맡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글은 가장 멋지게 그 자신을 드러낸다.


이와 같다. 삶이란.


백수는 삶의 고삐를 쥐고 있지 않다. 그의 손은 열려 있다. 삶을 끌어안기 위해. 그리고 삶이 자신을 데려가주는 그 삶의 여행길에 다만 그 자신을 맡기기 위해. 그러면 삶은 백수를 위해 가장 멋진 현실을 드러내준다. 삶은 강물과 같아서 막히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러니 삶에게 맡기면 언제나 삶은 열리는 쪽으로만 간다. 우리에게 언제나 막힌 현실을 마법처럼 열어준다. 삶을 향한 백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 위대한 빈 손의 사랑이.


인간은 왜 가장 지혜로운 이름인가? 지혜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어떤 경우에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그 자리에서 다시 또, 언제라도, 반드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집착하며 더 많은 것을 그 손에 쥐고자 사용하게 되는 지성의 힘은 얕은 차원의 것이다. 이런 것을 도구적 지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장 깊은 차원의 지성은 사랑을 위해 쓰인다. 그런 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사랑과 지혜는 언제나 함께 간다. 사랑이 있어야 지혜가 작용한다.


지성 최고의 기능인 상상력도 동일하다. 인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보고파할 때 상상력은 작동한다. 그 상상력을 통해 인간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그의 주변에 더 가득 창조된다. 지혜로운 인간의 존재방식이다.


그러니 우리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창조하려 하지 않는가?


오히려 그 반대로 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자신에게 싫은 것들만을 그리도 가득히 카지노 게임 사이트 주변에 창조하고 있는가?


인간인데.


그럴 수 있는 인간이며, 그러라고 태어난 인간인데.


자유롭게 열린 미래로, 인간 자신이 행복할 그 공간으로 입장하라고,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인데.


우리 자신의 본래성이 백수라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했기 때문이던가.


떠올려보라. 나의 속성은 분명한 백수다. 관찰해보라. 나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마음이 다 한다. 삶이 다 가져다준다. 나는 마음이 하는 대로, 삶이 펼치는 대로, 그렇게 이동하며 또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다만 사랑만 한다.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며 그 모든 일을 새롭게 열린 시선으로 보려고만 하고 있을 뿐이다.


"좋다. 좋다."


이러한 동의의 감탄사가 나에게서 흘러나올 때 삶은 그 말을 알아듣는다. 나를 더욱 그 방향성으로 데리고 간다. 그 운동에 나를 맡겨 하나가 되면 일어나는 것이 창조다. 창조는 그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전하려고 하는 그 자신의 삶과 하나가 된 이의 표현양식이다. 그래서 창조의 일이 일어날 때면 인간은 늘 신이 난다. 아주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인 것이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선물 중 가장 귀한 선물,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선물이다.


유한자이면서 무한한 자유로 상상할 수 있는 또 창조할 수 있는 이 멋진 존재방식. 신비의 포장지로 감싸여진 {나}라는 이 귀한 선물.


내 자신이 바로 이 가장 큰 선물로 이 세상에 온 것이기에, 나는 어떤 선물도 붙잡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백수의 의미. 이 지구에 와서 행복하라고 선물된 존재방식이며, 그 이름이다. 바로 나의 이름이다.


인생사 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나의 운명에 대한 표현도 더는 막힌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지구에서의 시간 동안 계속 행복할 것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향해 그 표현은 열려 있다. 심지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갈 때도 빈 손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디로 가는지는 알 필요도 없어진다. 나는 거기에서도 백수일 것이니까. 또 문이 열린 것이다.


이 정도면 내가 영원한 백수라는 것은 과학이다.


나는 영원한 신비.


자신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탐구하고 이해해가는 그 삶은, 자신이 백수라는 사실을 그렇게 기쁨으로 누려가는 그 삶은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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