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환기 카지노 게임을 다녀와서
위 작품은 국내 작가 중 가장 비싸게 거래된 김환기의 '우주'로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되었다. 바로 전 해 그의 '빨간 점화'가 85억 원에 낙찰되어 최고가를 기록했었는데 일 년 만에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운 셈이다. 경매 시장에선 김환기의 라이벌은 김환기밖에 없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우주는 두폭화로 254*127 크기의 그림이 두 개가 붙어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일단 크기에 압도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두 개의 블랙홀에 빠져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 같은 이 그림에 각각의 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작품엔 파란색이 많고 그의 파랑을 특정해 '환기블루'라고 하는데 왜 그는 유독 파란 색을 많이 썼을까?
내가 미술 강연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국내 화가 역시 김환기다. 그는 추상미술을 국내에 들여온 1세대 추상화가로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는데, 나는 그의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의 아내 김향안에게도 깊이 감동한다. 두 사람 관계는 내게 사랑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 카지노 게임이 있다. 2024년 2월 1일부터 리뉴얼에 들어갔던 환기 카지노 게임은 12월6일 새 단장을 마치고 <영원한 것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2025년 7월 7일까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를 따라가 보자.
김환기(1913~1974)는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하얀 손수건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바다가 넘실대는 신안군 기좌도(현재 안좌도)카지노 게임 태어났다. 늘 파란색을 보고 자랐기에 그에 대한 남다른 감각이 DNA에 새겨졌고, 그러니 파란색이 들어간 그림을 많이 그렸을 것이다. 섬카지노 게임 육지로 가는 배를 바라보던 소년의 마음에 새겨진 파랑에 꿈과 동경이 더해져 그만의 서정미 물씬 풍기는 '환기블루'가 탄생했다.
천석지기 집안에 금수저로 태어난 그는 화가가 되기 위해 1933년, 일본 니혼대학 미술부에 입학한다. 화가가 되려면 일본카지노 게임 주최하는 공모전에 당선돼야 했는데,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로써는 한국인이 당선되기 쉽지 않았다.
3학년에 비로소 참가 자격을 얻은 그는 '종달새 노래할 때'라는 작품을 내고 당당히 입선,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아쉽게도 그 카지노 게임은 도판만 있을 뿐 실제 카지노 게임은 남아있지 않다).
이 작품은 그가 25살에 그린 '론도'인데, 카지노 게임 추상미술 1호로 지정되어 국가 등록 문화재로 기재된 작품이다. 론도란 '같은 주제가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뜻하는 음악 용어로 첼로 같기도 하고 사람의 형상 같기도 한 형체가 반복되어 그려졌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늘 음악을 켜 놓고 작업하곤 했는데, 어느 날 어린 두 딸이(5살과 두 살) 작업실에 들어와 축음기에서 나오는 론도 음악에 따라 고개를 흔들며 리듬을 탔다.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모티브로 '론도'가 그려졌다.
1942년, 부친이 사망하자 그는 아내에게 한 살림을 떼어주고 이혼했다. 그때 관습에 따라 집안카지노 게임 미리 정한 여자와 일찍이 결혼했었지만, 여러 가지로 맞지 않았다. 부친의 유산을 정리하던 그는 소작민들의 빚문서를 발견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당사자들에게 모두 되돌려 줘버렸다.
부잣집 도련님의 세상 물정 모르는 판단이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렵게 사는 소작민들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유산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벌어서 살고 싶어서였다.
서울과 고향 집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의 글을 쓰는 신여성이었다. 스무 살에 천재 시인 이상과 결혼했다가 몇 개월 만에 이상이 결핵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여자. 한 생애에 두 명의 천재와 부부의 연이 닿았던 여자, 변동림(1916~2004).
김환기는 명랑하고 지적인 변동림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애가 셋 딸린 처지라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편지로만 교신했다. 변동림이 그와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녀의 집안도 발칵 뒤집혔다. 첫 번째 결혼도 마음대로 하더니 이번엔 애가 셋이나 딸린 이혼남이랑 결혼하겠다니 난리가 났다.
집안의 극심함 반대에 부딪힌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개명하고 그에게로 간다. 김은 김환기의 성을 딴 것이고 향안은 그의 아호(雅號)였다. 그녀는 김향안이 됨으로써 또 다른 그가 된 것이다. 아내에게 아호를 준 김환기는 수화(樹話)라는 새로운 아호를 짓는다.
1944년, 김향안과 결혼하고 고향의 전답을 팔아 성북동에 거처를 마련한 그는 둘의 보금자리를 수향산방이라고 칭했다. '수화'와 '향안'에서 따온 이름이었고, 현재 환기 카지노 게임 달관의 별칭도 바로 수향산방이다.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아내는 글을 쓰는 공간, 수향산방. 향안은 수화의 세 딸을 친딸처럼 키우고 시어머니도 극진히 모셨다.
해방 이후 그는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작품활동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종군 화가로 지원한 그는 '피난 열차'와 '판자촌' 같은 피난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의 그림은 불행했던 시기에도 따뜻하게 그려진 특징이 있다. 아마 그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 삭막한 세상 속에서도 마음만은 따뜻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끝나고 어느 날 저녁, 수화는 술 한 잔 걸치고 들어와 아내에게 한숨처럼 내뱉었다. 대체 자신의 카지노 게임 수준이 세계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는 한탄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향안은 당장 프랑스 대사관으로 달려가 비자를 신청하고 혼자 파리로 날아갔다. 당장 둘이 함께 갈 형편은 안 되었기에 먼저 가서 준비할 요량이었다.
향안은 파리에서 프랑스어와 미술 평론을 공부하며 남편 내조에만 그치지 않고 자기 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떨어져 지내는 사이 두 사람은 편지로 소통하며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늘 함께였다. 일 년 후 그가 파리에 도착했다. 전시며 아틀리에며 모든 준비는 아내가 다 해 놓았으니, 그는 그림만 그리면 되었다. 향안은 '사랑'에 관해 그의 저서 <월하의 마음에 이렇게 썼다.
"사랑이란 지성이다. 지성으로 이해하고 지성으로 교류하며 지성으로 믿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함께 성장해야 함부로 시들지 않습니다.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을 이끌고 그의 성장이 또 나를 성장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잘 맞는 반쪽이 되어가는 일. 사랑이란 함께 성장하는 일입니다."
여성의 희생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함께 성장'을 생각했다는 게 놀랍다. 사실 둘의 파리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한때는 천석지기였으나 남은 건 성북동 집 한 채가 전부였는데, 그나마 파리에 올 경비를 마련하느라 집을 팔았다. 집 판 돈 일부는 서울에 남은 가족들이 살 전셋집을 구하고 남은 돈으로 체류 비용을 써야 했다. 그렇게 무리해서라도 파리에 온 이유는 그만큼 예술에 대한 열정이 컸기 때문이었다.
파리카지노 게임 향안은 수화의 아내이자 매니저, 통역관이자 비평가였다. 수화는 치열하게 작업했고, 3년 동안 5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 당시 파리를 휩쓴 작가의 작품을(피카소나 마티즈 같은) 직관하고 탐구하면서 자기만의 예술 감각을 키워나갔다.
이 카지노 게임은 그가 파리 생활(1956~1959)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 홍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린 '달 두 개'라는 작품이다. 달 속엔 산도 보이고 강도 흐르는 것 같다. 달 두 개는 왠지 자신과 아내의 모습처럼 보인다. 한곳을 바라보는 크기도 모양도 동등한 존재. 파리 생활을 통해 수화가 느낀 건 세계적이 되려면 가장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미술 수집가였던 그는 특히 전통 항아리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껴 돈만 생기면 달항아리를 사 모았다. 그가 그리는 모든 곡선은 이 항아리카지노 게임 나왔다고 할 만큼 항아리를 애정했다. 50년대 초부터 달항아리와 매화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런 그의 화풍은 파리를 거치면서 더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해 회화 부분 명예상을 받은 그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미국카지노 게임 1년 동안 작품 할 수 있는 지원을 부상으로 받는다. 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다 버리고 50의 나이에 미지의 땅으로 떠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한국에선 명망 있는 작가지만, 미국카지노 게임 그는 변방의 나라카지노 게임 온 이름 없는 예술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교수직을 내려놓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번엔 아내 없이 혼자다. 아내가 뉴욕으로 오기까지 8개월 동안 그는 스케치북에 아내를 생각하며 카지노 게임을 그렸고, 제목을 '향안에게'라고 붙였다.
1년의 지원 기간이 끝나고,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아야 했는데, 변방의 작가 그림은 쉬 팔리지 않았고,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비싼 의료보험을 감당할 수 없어 가입하지 못했기에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고, 향안이 백화점카지노 게임 일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갔다.
정이 많았던 그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짙어졌다. 무엇보다 사람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돌아가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즈음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이 열렸고, 참가 의뢰를 받는다.
얼마 전 친구였던 김광섭이 죽었다는 오보를 접하고 놀란 마음을 쓸었었는데, 그 순간 김광섭의 시 '저녁에'가 떠올랐다. 시의 마지막 구절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제목으로 정하고 점을 찍기 시작했다. 점 하나에 친구 한 명, 죽어버린 친구들, 소식이 끊긴 친구들, 사무치게 그리운 인연들을 생각하며 점으로 캔버스에 카지노 게임 메웠다. 그리고 대상 수상, 그의 전면 점화가 본격적으로 탄생한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갔을까. 내가 그리는 점, 저 총총한 밤하늘 별만큼이나 할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 (수화의 일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안고 쉼 없이 작업하던 그는 1974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뉴욕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김향안은 전 세계를 다니며 그의 그림을 알리는데 남은 인생 30여 년을 모두 썼다. 그리고 사비를 털어 부암동에 환기 카지노 게임을 지었다. 그가 그리울 때면 그가 남긴 스케치북 '향안에게'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 아무래도 달래지지 않는 날엔 일기를 썼다.
"아무것도 맛있는 것이 없다. 너는 정말 죽은 것인가? 55년에, 또 64년에 나는 혼자 혼자를 만나러 오던 길, 신나게 비행기를 탔었는데, 인생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책 ‘월하의 마음’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