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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하이 빵변 Feb 17. 2025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추억

설마 그렇게 금방 잊혀지나

나의 상하이 생활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전 상하이 생활을 통틀어서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이벤트가 되었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을 소환해본다.


대략 2022년 3월경부터 6월경까지,중국 정부는 상하이 중심에 있는 황푸강을 기준으로 푸동 & 푸시 지역에 순차적으로 강력한온라인 카지노 게임 정책을 실시하였다.


- 상하이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양상: 몇 일이 지나면 금방 풀어준다고 했다가, 몇 달을 넘기게 되었다.


한국에서 칭다오 공항으로 도착한 후, 한 무리의 사람들과 정처 없이 버스에 실려가다가, 칭다오에서 한, 두 시간정도 떨어진 어느 한 도시에 도달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도시의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실상은 호텔이라고 말하기에 좀 그런..)에서 2주 간의 격리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일이 지나 상하이 봉쇄 정책으로 재차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초반에는 현관문 밖으로는 전혀 나갈 수 없었다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자 단지 안에서는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집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실내에서 째간째간 움직이기만 해서 몸이 상당히 찌뿌둥 했는데, 바깥 공기를 쐬며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리 기쁜 순간이 따로 없었다(감옥에 있는 수감자에게 하루 일정 시간의 운동 시간이 주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냉장고나 찬장 속 손이 닿지 않는 공간에 꽁꽁 숨겨져있던 꽁치캔까지도 꺼내서 속칭 '냉장고 파먹기'를 실천하고 있었는데, 참기름이나 고춧가루 같은 기본적인 조미료부터 급속도로 바닥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냉장고 파먹기'와 공동 배급품을 받아 생활하다가 외부로부터 배달 주문이 가능해지게 된 것은 봉쇄 생활 중에 일어난 큰 변화였다.

나중에 위챗(한국의 카카오톡 같은 중국 플랫폼)에서는 공구(공동구매)를 모집하였는데, 마치 대학교 때 수강신청을 하는 것처럼 일분 / 일초를 다투는 광클 전쟁이 벌어졌다(아무리 어려운 시기에도 '블로우션 기회'는 있는 법인가...공구방에서 큰 이익을 본 상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요리에는 잼병인 내 쿠킹 실력도 많이 향상되었는데, 외식을 전혀 할 수 없었으므로 하루 세끼 집밥은 기본이었다.

위챗방에 있는 단지에 사는 이웃과 식재료 품앗이를 하는 훈훈한 광경도 펼쳐졌다(eg. 집에 감자가 다 떨어졌는데 감자 있으신 분? 혹시 마요네즈 있는 분이 있으면 저희집에 있는 샐러드 드레싱이랑 교환하실래요? ... )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서 같은 기간에 주방 집기를 두드리는 난타 시위? 일종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 항의를 하는 듯한 움직임이 있어서 참으로 놀라웠다. 주방 집기를 두드리는 걸 보아하니, 더 이상 배고픔을 참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의 마음 속 외침이 드디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와 관련된 정치적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단지 내에서 드론을 날리는 쇼가 있었다. 누가 주최했지알 수 없는 봉쇄 기간을 버텨내는 주민들에게 '일종의 화이팅' 메시지를 주는 소소한 공연이었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지만 지루한 봉쇄 생활 중에 단비와 같았다.

봉쇄 생활은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공동감옥 생활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었으므로 그나마 럭셔리하고 안락한(?) 감옥 생활이랄까, 답답한 집 안에서 봉쇄와 관련된 뉴스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형편이었다.

회사 오피스를 당장 떠날 수 없었던 어느 열혈 직원들은 회사에 숙식하면서 회사 일을 하면서 일정 기간 동안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간을 버텨냈다고 한다. 음식(냉장고? 배달음식?)이나 빨래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중국에 있는 한국 유학생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고 들었다. 비교적 열악한 환경의 기숙사 시설에서 버텨낸 한국 유학생들이 너무 대견스럽고 대단한 거 같다.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어린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뇌까지 찌르는 느낌을 주는 코로나 검사는 한동안 지루한 루틴이 되었다. 코로나 검사소는 동 바로 앞에서부터, 단지 안(서문이나 동문 게이트 쪽), 그리고 단지 밖에도 길을 건너면 있었다. 검사 가능한 시간에는 무슨 일이든 제치고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 걸어야 하는, 강제운동 시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단지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한데 모이기도 쉽지 않은데, 일정 시간에 나와서 긴 줄을 서며 아는 사람끼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이 광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절대 그립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 해 6월 경부터 봉쇄조치가 점차적으로 해제되었다. 즉, 바깥 출입이 서서히 허용되며 학교나 회사 생활이 정상화되기 시작하였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살면서 배급을 받아 보신 적이 있나요?! (귀중한 야채였지만 이 중이에는 처치 곤란도 있었습니다)



코로나 기간을 버텨낸 '생존자'라고 주어지는 보상 같은 건 땡전 한 푼도 없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간을 버텨냈다고 수고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다만, 재택근무가 상대적으로 편했으며, 회사 측 사정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직장에서 코로나로 인하여 짤리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안을 건넬 뿐이었다.

일률적으로 시행된 온라인 카지노 게임기간 동안 사업하는 사람들은 영업 이익 / 직원 비용 / 임대료 등 크고 작은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임대인은 임차인의 사정을 배려하여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간 동안에 전부 또는 일부 임차료를 감면해주었고, 중국 정부에서 임차료를 감면한 임대인에게 일정한 조건 하에서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이들이 받은 사업상 손실을 전부 배상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코로나 기간을 버텨내지 못한 수많은 사업장은 하는 폐업 경로를 밟기도 하였는데, 그에 따르는 막대한 손실을 과연 누구로부터 보상받았을지.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간 중에 일부 근로자는해고되어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거나, 봉쇄 기간 동안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생활에 지장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작은 사업장일수록 이러한 피해는 더욱 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에서 제기된 각종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코로나가 '불가항력적인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하여치열한 법정 공방과 쟁점 다툼이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로 부쳐둬야 할까.


몇 달이 지나고 다시 밟게 된 땅은 아주 어색하게 느껴졌다. 거리는 마치 좀비 세상처럼 휑하였고, 나는 마치 막 출소한 장기 수감자처럼 한동안 되찾은 자유가 익숙하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괜찮은거야?)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풀린 초기에는 병원이나 관공서, 공공장소(백화점 몰이나 마트 등)에 대한 출입 제한이 엄격했고, 늘상 가져다녀야 하는 젠캉마(健康码, QR 건강코드 / 음성 판정은 초록색, 밀접 접촉자는 노란색, 양성 판정 받은 확진자는 빨간색으로 분류)상 초록색 표시가 아니면 이동에 제한을 받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오래 간만에 만난 지인들과 봉쇄 기간 동안의 안부를 물으면서 신기하게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 생활을 이어갔고 극심한 봉쇄를 겪었던 기억은 빛의 속도로 잊혀졌다. 그렇지만 뇌리에 각인되어 도저히 잊혀질 수 없는 봉쇄의 순간들은 남아있다.


-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걸려있던 시기


안타깝게도 한국인 주재원 한 분이 상하이에서 봉쇄 기간 중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집 안에 혼자서 계시다가 적절한 응급 조치를 받지 못하고 화를 당하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중국 한 젊은이는 봉쇄 기간 중에 거의 전 재산을 투자한 주식이 폭락하는 바람에 그로 인한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장기간 갇혀있어서 심리 상태가 더 불안정해졌던 건 아니었을까. 혹시 봉쇄 기간이 아니었다면 그 젊은이의 선택이 달라졌을까.?


- 공포심이 극에 달했던 순간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간 중에 가졌던 제일 큰 걱정거리는 1) 아파서 응급 병원(응급 조치)에 가야하는 상황과 2) 임시격리시설인 팡창(方舱)에 끌려가는 것이었다.

1_ 중국의 어떤 아파트에는 아예 못나가도록 철문을 설치했는데, 큰 화재가 났는데도 바깥으로 탈출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여럿 숨졌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문이었다. 응급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할지 걱정이 앞섰다.

2_ 일단 팡창에 가게 되면 모르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공동 생활을 해야 하는데, 거기서 새로운 병을 얻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누가 보든 안보든 / 숨 쉬는 데 방해가 되든 안되든) '감염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마스크를 열심히 착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거 같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코로나는 지울 수 없는트라우마를 남겼다. 어떤 이에게는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코로나 감염이나 백신 부작용으로 인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루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정책은 달랐으며, 중국 상하이에서 시행된 봉쇄 강도는 그 중에서도 강력했다(매운맛 봉쇄!!). 코로나 봉쇄 이후에는 탈중국 행렬이 눈에 띄게끔 지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상하이에 머물고 있다. 30대 중반임에도 철이 덜 들었는지, 여전히 가끔씩 "왜 코로나로 주식이 한창 곤두박질 쳤을 때 과감하게 줍줍하지 못했을까, 크게 인생 한탕을 노릴 수 있는 다시 오지 않을 대박 기회였는데..."라고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OTL. (심지어 그 때는 주식을 시작하기 전이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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