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직장을 그만두고 우발적으로 떠난 카지노 게임. 성한 곳이라고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부실한 몸뚱이를 이끌고, 어쩌자고 그토록 긴 여정을 떠날 마음을 먹었던 것일까? 생각이 많았다면 떠날 수 없었을 카지노 게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길 위에서 병은 온데간데없었다. 여행은 내 등을 떠밀었다. 아침에 일어나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걷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떤 날은 3만보를 걸었다. 패딩점퍼 하나 없이 북부 고산지대 만년설산을 다니면서도, 매년 한 번쯤 심하게 앓던 그 흔한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나를 치유했다.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방랑객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저마다의 시련과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 각자의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삶은 경쟁이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위험은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험은 내 안에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이 펼쳐졌다. 권유로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게는 큰 도전이었다. 잊기 전에 기록하려고 스스로를 채근하며 썼다. 친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처럼 쉽게 쓰고자 했다. 80일간의 여행기를 쓰는 데 80일이 꼬박 걸렸다. “글을 쓰는 일을 정말 좋아해서, 글 쓰는 순간 그 자체가 이미 제겐 보상이예요.” 어느 작가의 말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글쓰기가 제일 어려운데.’ 그 어려운 길을 통과해, 꼬박 1년 만에 내 생각을 말하고 쓸 수 있는 나를 회복했다. 어디라도 가야했던 그 때, 죽기 싫어 도망갔던 여행이 내게는 구원이 되었다. ‘쓸 만한 카지노 게임’이 되었다.
여행만큼 그 사람을 잘 설명해주는 것은 없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자고, 무엇을 구입할지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결과는 지극히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다. 무작정 쏘다녔다 생각했던 여정에서 나의 경험과 관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행기로 묶고 나니 비밀 일기장을 들킨 것 같은 당혹감이 들기도 한다. 정치로부터 도망갔던 여행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은 온통 정치적인 것이었다.이 책은 어느 정치 덕후가 애정을 갖고, 그러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근접 관찰한 오늘의 중국 이야기로 이해해주어도 좋겠다.
신세지지않고살았다고생각했다. 그러나카지노 게임기에담긴주제는그간만났던사람들로부터영향을받은것이분명한분야로가득하다. 호도협트래킹을하면서는스페인산티아고순례길을걷고나서고향제주에올레길을개척한서명숙이사장을떠올렸다. 뎬웨철로를보면서는철도덕후로여러권의책을낸현직기관사박흥수선생이생각났다. 식물학자조셉록에주목하게된것은아마도따뜻한시선으로식물과세상을바라보는식물세밀화가이소영작가의영향이리라. 이브런치북에는그간많이소개된소수민족이야기보다신이민자이야기를많이넣었다. 1990년대부터수차례중국서부를답사하고윈난소수민족과자연에대한글을썼던사진가이상엽선생같은분이있었기에나는그다음걸음으로나아갈수있었다.
윈난에서만나고보고듣고느낀모든것을담지는못했다. 여기에 싣지못한이야기거리는언젠가를위해남겨두려한다. 팬더믹이 끝나고나면사람들과마주앉아신나게수다를떨모험담이될까? 함께배낭을메고그곳에가게된다면, 동행들에게들려줄한정판가이드가될지도모르겠다. 그때까지모두의안녕을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