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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Feb 19. 2025

서른 중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

누구의 인생도 아닌 바로 내 인생을 찾아서.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과 출산으로 아이들만 보고 살았던 십여 년의 세월만에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하룻밤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여름밤의 꿈'처럼 내 안에 아로새겨져 흐르는 시간만큼은 천일의 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울림을 남겼다.


아이들의 보챔과 닦달, 요구와 짜증으로부터 벗어나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 시간은 무척 달콤했다. 누구에게 맞출 필요 없이, 성인 여자 둘의 비슷한 취향만을 고려해 동선을 짜고 움직였다. 집에서 고작 차로 30분 거리의 카라반에서 친구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소금빵과 육쪽 마늘빵을 사고 무알콜 와인과 과일로 분위기를 냈다.


그곳에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 서른 중반의 어른이 아니라 열일곱에 만났던 소녀였다. 별 일 아닌 일에 크게 웃고, 작은 일에 환호성을 지르고, 가만히 앉아 창 밖만 바라봐도 위로가 됐다.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운 잔잔한 팝송을 틀고 셀카봉을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 댔다. 카메라의 필터 기능을 이용하며 "정말 이렇게 생겼으면 좋겠다" 하고 깔깔 거리며얼굴에 드리운 세월의 흔적을 지웠다. 카메라 필터의 세계는 무궁무진해서 무료 기능만 이용해도 턱은 브이라인, 얼굴은 광채 피부, 눈은 솔방울만 하게 커졌다.


체육복 바지에 흰 티를 입고 밤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친구와 나는, 카라반에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고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는 모두 비슷한 인생을 살 것 같았는데 이젠 따로 연락하지 않으면 지나가다 마주쳐도 알아보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다.나는 일찍 결혼해 아이 둘의 엄마가 되었고, 친구는 인생의 짝을 기다리며 새로운 직장에 이직했다. 마주 앉은 대척점의 의자처럼 서로 막연하게 불안해하고, 동경하던 마음을 나눴다.


이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다고 생각되자 십여 년 만에 나의 삶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때로 끈끈이에 달라붙은 파리가 버둥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것처럼, 내 인생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벗어나기 힘든 답답한 결계 속에 갇혀 버린 기분이다. 서른 중반의 나이가 무엇을 시작하기엔 늦은 것 같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이른 것 같다. 십여 년의 시간은 나를 잡아먹고 이전의 기억을 전부 지워버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드라마에서처럼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도 아닌데 바로 어제의 일도 잘 기억나지 않고, 기억난다 해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밋밋한 날들이다. 자라 가는 것은 아이들이요, 내가 얻는 것은 노화뿐이 아닌가 하고억울한 생각마저 든다.


한 때의 잘 나가던 기억들은 소실되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누군가 들으면 하품을 터뜨리며 "라테 이야기는 재미없어"온라인 카지노 게임 귀를 닫아버리고 말 것이다. 이젠 드라마의 단역처럼 조명도 잘 들지 않는 구석에 앉아 주연 배우들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면 맡은 역이 끝나는, 어중간한 입장에 처했다. 페이는 열정페이, 요구받는 건 불타는 열정!


친구는 경력 단절 없이 자신의 분야에서 꾸준히 일한 덕에 시간의 탑 끝에 오르고 있다. 중간 관리자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상사와 어린 직원들을 연결한다. 더 개발해야 할 분야에 과감하게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커리어 우먼다운 트렌디한 옷차림을 하고 피부과에서 맞춤 처방된 관리를 받는다. 이상형의 남자를 찾아 소개팅을 하고, 취향에 맞는 데이트를 즐긴다. 주말에나 공휴일에는 멀리까지 나가 다양한 장소에서 추억을 쌓는다.


나는 친구를 보고, 친구는 나를 보며 궁금한 곳에 주문을 걸어 보여주는 수정구슬을 쳐다보듯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친구가 육아 중이라면 아마 저런 삶을 살고 있겠지 하며 상상해 본다. 가보지 않은 길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각자의 고민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부러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친구는 자신이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드는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아이를 낳기엔 점점 많아지는 나이를 보며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집을 구할 때도, 직장을 새로 구할 때도 어느 곳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부모님이 나이가 드는 것도 무섭고 친구들의 결혼이나 출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아득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내가 이룬 것이 부럽다는 친구의 고백이 믿기지 않았다.


아이들에 치여서 변변한 옷 한 벌 사기 어렵고, 외출이라고 해봐야 기껏 헬스장에 가는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전부인 내가 부럽다고? PT 결제를 할 땐,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 남편의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 유의하게 되고 이깟 돈 나도 벌면 되지 뭐, 혼자 생각했다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들을 보면 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이런 구질구질한 인생을 알고나 하는 말일까?


여자에게 결혼과 출산, 육아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생에 한 번쯤 이뤄야 하는, 그것도 되도록 몸이 젊고 건강할 때 해결해야 하는 필수불가결의 과제인 것처럼 가까운 사람들은 말하지만 진짜 그것을 이루고 나면 먼 인간관계의, 대체로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과 관련된 여건에서 쳐다보는 이들은 고개를 내젓고 마는 '노키즈 존'같은 존재 아닌가?


친구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차 과거의 추억 이야기에서 현재의 이야기로 옮겨왔다. 추억 여행에서 지금의 고민으로 이어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우리들. 남편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뻬고 나면 나에게 남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친구는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다시 돌아가는 그 말소리의 끝에 진짜 관심사가 담겨있다. 친구는 내가 십여 년 만에 홀로 시간을 내어하는 운동이 마칙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집 밖에 나가 어린이집에 가는 모습 같다고 말했다. 남들에겐 별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그 행위가 주는 의미가 무척 커 보인다고 분석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아이들 없이 혼자 외출하는 그 시간이 나에게 너무 특별하다. 그 한 시간이 하루의 중심이고, 전부이고, 숨 쉴 틈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한 시간의 외출로 인한 여파가 너무 크다. 헬스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여전히 운동이 어색하고 근육통을 달고 산다. 체력은 도통 언제 느는 건지 피곤함이 가시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첫째의 공부를 봐주는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공부뿐 아니라 늘 24시간 품에 끼고 있던 첫째의 스케줄로부터 멀어졌다.


그랬더니 첫째의 숙제가 밀리기 시작했다. 영어선생님의 경고를 받았고, 엄마인 나에게도 더 챙겨줄 것을 당부했다. 엄마의 관심과 독촉이 아이의 공부에 큰 밑거름이 된다고 했다. 여전히 엄마가 필요한 아이에게 내가 운동을 한다고 너무 빨리 벗어나 버린 것은 아닐까? 죄책감이 밀려왔다. 옆에 끼고 앉아 숙제를 챙기고, 시간표를 독촉해야 하는 것이 아직 나의 임무인 걸까? 그렇다고 나를 위해 그 한 시간도 쓸 수 없는 게 '엄마'란 걸까?


친정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자 "너도 이제 쭉정이야. 아기가 알맹이지"하고 말했다. 아기의 침이 질질 묻고 아무 간도 되어 있지 않은, 남은 이유식이나 잔반을 먹지 않으면 돈을 낭비하고 모성애가 없는 나쁜 엄마인 것처럼 치부했다. 시어머니는 아기가 울거나 다쳤을 때 내가큰일이 난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지 않고, 너무 침착하다며 "넌 아기가 아파도 아무렇지도 않지?"하고 생채기를 내는 말을 해댔다. 여자에게 '아이'는 절대적 헌신의 존재이자 온 인생을 다 받쳐야 하는 숭배의 대상쯤 되어야 하는 걸까?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죄악인 걸까?


친구와 떠난 만 24시간의 여행, 매일 혼자 떨어져 운동하는 한 시간이 내 머릿속에서 엄청난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수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쓸려 나간다. 나와 아이들은 한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현실감,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불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애타는 목마름이 소용돌이친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다, 아니 다시 나를 만들어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나를 '나쁜 엄마'라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다. 머릿속에 거대한 혜성 충돌이 일어나고, 십여 년을 갖고 살았던 고정관념이라는 거대한 암석들이 깎여져 나간다.


호주에서 한 달 여를 지냈던 적이 있다. 그때 '열두 사도 바위'라는 곳을 갔었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를 드라이브하면 만날 수 있는 거대한 바윗 덩어리들이다. 절벽도 아니고, 섬도 아닌 채 바다와 육지 가까운 곳 사이에 우뚝 올라서 있다. 파도에 의해 지금도 여전히 모양이 바뀌고 있다는데, 그 경치가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그 모양 분석을 통해해적 활동의 연구 자료로서 큰 쓰임새가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쓸모없는 바윗 덩어리에 '열도 사도'라는 위대한 이름을 붙이고, 가만히 서서 깎이고 부서지는 모습을 추적해바다를 알아간다니! 내 인생과 사고에도 끊임없이 바람이 불고 파도가 몰아쳐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도 그 변해가는 모습 자체가 아름다운 것 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유명한 책을 낸 20세기의 사상가이자 정신 의학자인'빅터 프랭클'은 인생이 너무 힘들 땐, 지금이 두 번째 인생이라고 생각하라고 권했다. 이미 망가지고 후회되는 지점에 서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전생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고이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여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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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생을 알고 있는 채 환생해서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어떤 선택을 했을까? 고민과 번뇌가 몰아치는 이 시간을 가두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 했을까? 아마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끝까지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무엇이 더 나은 인생인지 자로 재보고 저울로 달아보며 최적의 레시피를 찾아 계량했을 것이다.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그것을 명확온라인 카지노 게임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라고 말했다.


나에게 찾아온 고통스러운 감정은 나에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라고 동시에 한 걸음 물러서 더 큰 그림을 찾아보라고, 분명 극단의 하나가 아니라 균형 잡힌 원의 중심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다정하게 채근한다. 이제 일어나 원의 중심을 가늠해 본다. 누구의 인생도 아닌, 내 인생의 중심을 찾아 향로를 끊임없이 수정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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