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것은 뭔가?
질문에 부여하는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답변들을 내놓을 수 있다. '살아있음'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하고 한계 짓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접근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매몰되지 말고 가장 근원적인 접근인 생물학적으로 들여다보자. 왜 먹는지, 사는 게 뭔지에 대한 에너지적 관점의 접근말이다.
생명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먹고, 자손을 남기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자손을 남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진화의 계보에서 끊긴다.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철학, 종교, 정치, 예술 같은 문화적 산물들은 이 본질적 과업의 지류일 뿐, 중심은 아니다. 생명이란 결국 자기를 유지하고 복제하는 유기체의 연속적 투쟁이다. 생명체는 에너지와 유전자의 흐름 속에서 존재할 뿐이며, 그 안에서 ‘늙음’이라는 현상도 이 원리의 부차적 결과로 나타나는 산물이다.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성적 능력의 쇠퇴 과정이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로 접어들면 남성과 여성 모두 생식 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며, 자연스럽게 성적 욕망도 감퇴된다. 더 이상 번식의 능동적 참여자로 기능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성스럽고 고상하고 고고한 인간은 아주 희귀한 별종일 뿐이다. 인간의 선조가 모두 그렇게 고상했다면 이미 멸종했을 것이 틀림없다. 너무 단순화시켜 생명을 바라보는 듯 하나, 그것이 본질이다.
나머지, 문화나 도덕, 사회적 활동 등은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생존을 위한 직접적인 전략은 아니다. 공동체를 유지해 생존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되는 전술일 뿐이다.
하지만 진화는 항상 간접적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직접 자손을 낳는 것뿐 아니라, 그 자손이 더 잘 살아남도록 돕는 행위 역시 진화적으로 선택될 수 있기 때문이다.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 이후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중요한 진화를 제시했다. 그는 개체 단위의 경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집단 수준의 자연선택’을 이타성의 진화적 기제로 주장했다. 개체 간 경쟁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이 유리할 수 있으나, 집단 간 경쟁에서는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개체들이 많은 집단이 결국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오늘날 ‘집단 선택(group selection)’ 이론으로 정립되었고, 인간 사회의 도덕성이나 협동 같은 개념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성 곤충에서 이타성은 특히 극적으로 나타난다. 일개미는 생식 능력을 포기하고 여왕개미의 번식을 돕는다. 이처럼 놀라운 희생은 ‘혈연선택 이론(kin selection)’으로 설명된다. 자매 개미들은 유전자의 75%를 공유하므로, 자식을 낳는 것(50%의 유전자 공유)보다 여왕개미를 돕는 편이 유전적 이익이 더 크다. 생물학은 이렇게 숫자로 계산되는 유전적 이득에 따라 희생과 협력을 설계해 낸다.
그러나 이타성만이 생명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반대편에는 과시와 경쟁이 있다. 특히 수컷들은 번식을 위해 자신의 유전적 우수성을 드러내야 했다. 수사자의 갈기, 공작의 꼬리, 수사슴의 뿔 등은 모두 ‘값비싼 신호(honest signal)’로서의 역할을 한다.이는 쉽게 모방할 수 없고 생존에 불리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진짜 강자라는 신호이기에 암컷에게 선택받는다.
인간 사회온라인 카지노 게임도 이는 유사하게 작동한다. 과학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노벨상, 정치적 권력, 부의 축적 등은 일종의 ‘공작의 꼬리’ 일 수 있다. 뽐내고 싶은 생물학적 경쟁이 문화라는 형식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가까이는 옷을 멋지고 예쁘게 입고 화장을 하고 헤어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유명 브랜드의 가방과 신발을 신어 자신을 표현하고 감추는 이유의 배경이다.
결국 우리는 먹고, 번식하며, 유전자를 보호하는 존재다. 그 과정에서 때론 희생하고, 때론 과시하며, 협동하고 경쟁한다. 도덕은 진화의 부산물이지만, 그 부산물이 생명의 연속성을 유지시키는 데 유용했기에 살아남았다. 생명은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고상한 것들’ 또한 진화의 한 조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