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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Feb 12. 2025

6755호실 (끝)

다시 엉기다 - 남은 자들

눈이 엄청나게 내리던 날이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빙수기가 끊임없이 얼음을 돌려대는 것 같았다. 습설인 데다 워낙 많은 양이 내리다 보니 사람들은 눈 치우기를 포기했다. 작업실이 있는 골목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골목의 상인들은 대개 노인들이었다.


“그래도 현관 앞은 쓸었네. 금방 또 쌓이긴 했지만.”

쌓인 눈 때문에 문이 잘 열리지 않자 국일이 쓰레받기를 가져다 다시 눈을 밀어냈다. 작업실엔 이미 젠과 율이 있었고 방금 싱이 들어오는 참이었다.


“말도 마. 젠하고 율이 계속 쓸었는데 역부족이더라고. 포기했어.”

카지노 쿠폰이 젖은 손을 난로 앞에서 흔들어 말리고, 싱은 눈이 수북한 모자와 외투를 벗어 문 밖에서 털어냈다.


“이런 눈 처음인 듯. 그렇죠?”

율이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잔뜩 실린 어투로 물었다.


“그러게.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마음엔 구멍이 뻥뻥 뚫린 것 같아.”

카지노 쿠폰의 말에 율이 중얼거렸다.

뭐야, 이 멋진 라임.

그러나 율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래도 전시회를 한 번은 하고 끝내도 끝내야 하겠지. 생각이 어때?”

젠이 제안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난 깨달았다. 드디어 이들이 헤어지려나. 코로나 이후로 이전의 분위기가 회복되지도 않았고, 수가 사라진 다음부터는 급격하게 에너지가 떨어졌다. 어쩌다 작업실에 와도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잠깐씩 한숨만 쉬다 간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작업실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그들을 나는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다. 시계의 주제를 넘는 것이지만.

그런데 모든 인원이 다 참석한 오늘의 모임은 어떤 식이든 결말을 위한 것이 맞을 것이다.


“글쎄...... 전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든, 않든 끝은 같을 텐데.”

카지노 쿠폰이 잔뜩 힘을 주어 말했으나 소리는 한없이 약했다.


“수 오빠는 지금 어느 하늘 밑에 있으려나. 참 하릴없다. 인생이.”

한쪽 이젤에 그대로 걸려있는 수의 그림을 보며 젠이 중얼거렸다.


수의 남아 있는 그림을 가져갈 거냐고 물었을 때 수의 부인은 고개를 저었었다. 아뇨.

그 짧은 대답의 적막함을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뇨.


“자, 찢어질 때 찢어지더라도 따끈한 커피 한 잔씩 합시다. 뭐 이렇게 처져 있어요? 눈에 묻혀서 집에 못 갈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냥 살아야지 뭐. 여기서.”

율의 농담 끝이 흐려지면서 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너, 왜 그래? 잘 오지도 않았으면서.”

싱이 눈을 흘기며 율에게 핀잔했다. 그러면서도 율을 따라 커피를 타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렘넌트. 남은 자 사상이라고 들어봤지? 그냥 문 닫는 것으로 삼십 년을 끝낼 일은 아니라고 생각돼. 우리가 남은 사람들이잖아.”

카지노 쿠폰의 이야기는 대개 좀 어려웠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커피를 들고 나오던 율이 물었다. 그게 뭔데요?


“말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도모한다는 거지 뭐. 싱은 신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겠지? 남은 자를 통해 구원이 시작된다는 하나님의 섭리, 뭐 그런 거?”


카지노 쿠폰의 말에 한 모금 커피를 들이켜던 싱은 커피를 뿜었다. 뭐래? 사레들린 싱의 등을 젠이 두드리고 카지노 쿠폰은 재빨리 티슈를 건넸다.

사래를 수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늙으니까 사래도 잘 들어. 회복도 느리고.

비로소 제 숨을 찾은 싱이 중얼거렸다. 싱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가 본래의 피부톤을 찾아가고 있었다.


“렘넌트?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글쎄, 우리한테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떤지.”

싱의 말에 젠과 율은 생각에 잠겼다. 남은 사람들이라.

카지노 쿠폰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는 데 집중했다. 잠시 후 젠이 낮고 느리게 말했다.


“스무 명 남짓 시작했는데 지금 넷이 남았으니 남은 자들이긴 하지. 우리가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삼십 년 세월에 네 명이 남았으니 승률은 괜찮지 않나?”


“맞아, 학교에서 쫓겨 나왔을 때,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갔을 때, IMF로 젠이 멈췄을 때, 밍이 유학 가고 결국 우리 팀과 결별했을 때, 코로나 기간, 국이의 죽음. 결국 수 오빠의 탈출까지. 그렇다 정말.”

젠의 말을 받아 카지노 쿠폰 또한 천천히 읊조리듯 하는 얘기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수의 탈출이라는 데서 웃음이 터졌다. 탈출이 뭐야. 그럼 가출이야, 출가야? 어쨌든 벗어났지, 우리를.


“그렇게 하나씩 사라지는 이 모임을 과연 우리 넷이서 지켜낼 수 있을까? 당장 율은 제대로 오지도 않지. 국일은 재혼한 남편의 집이 너무 멀고, 젠은 입양한 강아지로 정신이 없잖아? 나도 이젠 몸이 많이 피곤하고.”

싱의 말에 아무도 의견을 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끄덕이지도 않았다.

나만 카지노 쿠폰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흩어지려는가.


“잠깐, 좀 정리해 보자고.”

침묵을 깬 것은 젠이었다. 젠은 일어서서 작업실 안을 서성거렸다.


“자신 있어? 자신 있냐고?”

젠의 느닷없는 질문에 모두들 젠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시선을 커피잔으로 돌렸다.


“난 자신 없어. 이 모임을 깨고 홀로 남는다는 그 현실이 너무 싫어. 노력할 거야. 강아지는 데려올게. 아직 어리니까 가방에 담아 오면 돼.”

젠의 이야기를 카지노 쿠폰이 받았다.

“내가 멀어서 못 온다는 얘긴 안 했는데? 왜 미리 걱정을 해 주지? 물론 그동안 좀 뜸하긴 했지만. 서울 안에서 한 시간 거리는 개 껌이지. 노 프라블럼이야.”

카지노 쿠폰의 이야기에 그들은 또 잠깐 웃었다. 율이 문제야. 쟤는 왜 안 오는 거야? 오늘은 어쩐 일이고?


“오늘이야 모임이 찢어지네, 끝내네 해서 왔죠. 남은 자인지 뭔지 그런 거 떠나서 저는 그냥 남을 거예요. 나라가 좀 제대로 되어가는 모양을 봐야겠지만. 결석이 많다고 해서 떠나는 건 아니라고요. 잠깐만 시간을 줘요. 다시 열심히 올 거니까.”

율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길게 말을 했다. 어쨌든 율이 떠나지 않겠다는 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지노 쿠폰을 다 좋아하지만 율은 내게 조금 더 특별했으니까. 그러나 그 발언으로 그녀는 집중포화를 맞았다.


“야, 네가 걱정한다고 나라가 굴러가고, 걱정 안 한다고 나라가 멈춰 서냐?.”


“그래도 맘이 편치 않아서 못 오는 거예요. 편안히 그림을 그릴 상황이 저는 안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네가 있는 곳은 맘이 편해? 어디에 있어야 맘이 편한 거야? 어차피 온 국민이 다 맘이 불편해요. 그냥 오면 되는 거야.”


“하여간 꼰대들하곤 말이 안 통한다니까.”


“아휴 지가 젊은 줄 아네. 우리보다야 젊지만 너도 곧 환갑인데 정신 차리세요. 율.”


“알았어요. 조금만 더 있다가요. 봄엔 뭔가 달라지겠죠.”


“달라지긴 개뿔. 정치인들 다 거기서 거기야. 기대하는 네가 갸륵하다만 글쎄다.”


“온다니까요. 어쨌든 이 모임을 헤치진 말아요.”


“그럼 전시회도 하겠네? 4인 4색?”


“그건 다른 문제죠? 그림을 그려야 전시회를 하죠.”


“내 말이. 그러니까 그림 그리러 오시라는 겁니다.”

그들은 율과 제법 긴 시간 농담 같은 말씨름을 했다. 물론 가장 젊은 율이 할 수 있는 말은 제한적이었지만 젠이나 카지노 쿠폰, 싱은 마음대로 떠들었다. 나는 그 모습이 좋았다. 평소의 그들다웠으니까.


“수 오빠가 끝까지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참 배신감 느껴요.”

설전 끝에 율이 하는 말에 싱이 웃었다.


“그 배신감이 사모님보다 더할까? 그런데 밍처럼 떠나거나, 국이처럼 죽거나, 수오빠처럼 사라지거나 마찬가지야. 하여튼 남은 사람들에겐 슬픈 엔딩이지. 그런데 결국 다 잊히는 거잖아. 그러니 잊자. 자기 길을 간 거니까. 우린 우리 길을 가고.”

국이나 수의 이야기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침체되는 분위기였지만 카지노 쿠폰은 애써서 웃으려고 했다. 그렇지. 맞아.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데 처음으로 봄이 빨리 왔으면 싶더라고.”


“카지노 쿠폰은 봄 싫어하지 않았나? 그 생동감 때문에 맥 빠진다고. 내 기억엔 그런데?”

싱이 봄을 기다린다는 카지노 쿠폰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랬지. 처음이야. 봄을 기다리는 게. 늙었나 봐. 춥고 싸늘한 게 싫어. 따스하고 밝은 곳에서 그냥 편안히 차를 마시는 상상을 한다니까.”

카지노 쿠폰이 하는 이야기는 잔잔했다. 그러나 그 울림이 모두에게 전해진 듯 정말 따스한 곳에서 볕을 즐기는 듯한 표정이 보였다. 그들 모두 이젠 온기가 그리운 황혼이었다.


“아이, 뭐야. 이 노인정 분위기. 눈이 더 쏟아지는데 계속 있을 거예요?”

율이 현관문을 발로 밀며 물었다. 현관문은 또다시 눈에 갇혀 밖으로 열리지 않았다.


“집에 못 가겠는데? 문이 안 열려서.”

젠이 끙끙대는 율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안으로 열면 되죠. 내가 밖으로 열려고 했을 뿐이지.”

율의 발은 여전히 문을 밖으로 밀고 있었다.


“그러게. 안으로 열면 되는데 왜 그러고 있어?”


“안으로 열고 싶지 않아요.”

율의 목소리는 울먹였다. 율을 바라보는 시선들도 그랬다.


“우리 그냥 그대로 있어요. 그림을 안 그려도, 전시회 못해도 그냥 있어요. 여기.”

율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그녀를 둘러싼 싱과 젠, 카지노 쿠폰이 서로의 무릎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온기를 전하려는 듯.

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렸고, 작업실 안에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잔잔했다.

오래된 라디오가 한 번 지지직하더니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래전에 함께 듣던 노래가

발걸음을 다시 멈춰 서게 해

이 거리에서 너를 느낄 수 있어.

이곳에서 꼭 다시 만날 것 같아......¹⁾


말없이 노래를 듣던 카지노 쿠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얘기 같아. 좀 슬프지만.”

카지노 쿠폰의 이야기에 율이 벌떡 일어서며 흥분해서 말했다.


“뭐가요? 우린 아직 헤어진 게 아닌데. 지금 만나고 있잖아요? 라디오 꺼 버려.”

어머, 쟤 왜 저러니? 제일 결석 많은 애가 가장 열성 멤버 같은 이 발언은 뭐지?

드디어 율이 철이 드는 거야?

율이 말하니까 낯설긴 하지만 동의하는 거?


싱이 라디오의 코드를 빼서 율에게 장난치듯 건네줬다. 뭐예요?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카지노 쿠폰의 웃음소리에 난 가슴이 벅찼다. 다시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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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스탠딩 에그’의 <오래된 노래 중 일부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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