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터널 (2016)
애써 붙잡은 희망의 감촉마저 희미해져 갈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붕괴된 터널, 그 좁고 어두운 공간에 홀로 남겨진 자동차 영업사원 정수의 이야기는 단순한 재난극의 외피를 쓰고 우리에게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하정우라는 걸출한 배우의 절박한 연기는, 스크린 너머의 관객마저 질식할 듯한 고립감 속으로 밀어 넣는다.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에 매달려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나약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는 생의 의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주유소에서 무심코 건네받은 생수 두 병은 이미 오래전에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 그는 자신의 존엄마저 내려놓고 구조대장의 냉정한 충고, 즉 소변을 받아 마시는 행위마저 고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함께 고립되었던 또 다른 생존자 미나의 죽음은, 그나마 카지노 게임 사이트하게나마 기댈 수 있었던 인간적인 연대의 가능성마저 산산이 부숴버린다. 이제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미나가 남긴 작은 강아지 ‘댕이’뿐이다.
일주일이면 닿을 것이라 믿었던 구조의 손길은 보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고, 심지어 그 희망마저 부실 공사로 인한 설계 변경이라는 허망한 진실 앞에서 무참히 꺾여버린다. 분노와 절망, 그리고 서서히 잦아드는 핸드폰 배터리의 불안감 속에서, 바깥세상의 소식은 희미하게 잡히는 클래식 라디오 주파수만이 유일한 연결고리다. 과연 그는 이 절망적인 고립을 뚫고 기적처럼 생환할 수 있을까. 그의 간절한 외침, “나… 살아 있는데…”는,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아래 묻힌 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절규처럼 묵직하게 다가온다.
재난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재난의 시대
영화 <터널의 이야기는 얼핏 단순해 보인다.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널이 붕괴되고, 그 안에 한 사람이 갇힌다. 그리고 그를 구출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온갖 부조리와 무능함이 드러난다. 그러나 김성훈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이 단순한 플롯 속에 깊숙한 사회적 함의를 숨겨놓는다. 터널 붕괴의 원인을 파고들면, ‘FM대로 하는 공사가 어디 있느냐’는 냉소적인 인터뷰처럼,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회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과 부실한 시스템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붕괴 직후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실 담당자의 안일한 태도, 최신 매뉴얼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구조대의 허술함, 그리고 한 명의 국민을 구출하겠다면서도 홍보용 사진 촬영에 여념 없는 관료들의 위선적인 모습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익숙하게 목도해 온 현실의 축소판이다. 심지어 언론마저도 희생자의 고통보다는 ‘뉴스거리’에 혈안이 되어 무모한 통화를 시도하거나, 특종을 놓친 ‘기록’에 아쉬워하는 냉정한 시선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이 익숙한 풍경 앞에서 씁쓸한 자조를 금할 수 없다. 영화 <터널을 보며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11년 전 차가운 바닷속에 수장된 어린 영혼들, ‘세월호’의 비극을 떠올리는 것을 넘어, 이제는 10.29 이태원 참사라는 또 다른 거대한 슬픔을 덧붙여 기억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끔찍한 사건들의 희생자들의 고통보다는, 그러한 비극을 야기한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에 더욱 깊은 분노와 냉소를 느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우리를 짓누른다.
영화 곳곳에 삽입된 유머 코드들은, 어쩌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보이는 생존 본능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좁은 차 안에서 물 한 모금, 음식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수의 모습은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웃음은 동시에 불편함을 동반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만, 비극과 희극이 이토록 기묘하게 공존하는 광경은 우리에게 깊은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터널 붕괴의 원인과 구조 과정의 부조리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질 수 있다.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그 웃음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 <터널을 이야기하며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참사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 안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부끄러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신형철 평론가는 재난 서사를 “개인의 파국적 경험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의미화되고 기억되는가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영화 <터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터널이라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한 개인의 절망적인 사투는, 단순히 개인적인 불운이나 극복의 서사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곧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회의 안전 불감증, 부실한 시스템, 그리고 재난 상황에 대한 무능한 대처라는 구조적인 문제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수의 고립은 물리적인 갇힘을 넘어,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회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더욱 심화된다. 그는 끊임없이 외부와의 연결을 시도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무능한 관료들의 형식적인 쇼,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 그리고 무책임한 시스템의 냉담함뿐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야 말로 가장 큰 재난
“사람들은 통계보다 희망을 믿고 싶어 합니다.” 영화 속 한 대사의 씁쓸한 울림처럼, 재난 앞에서 우리는 때로는 비이성적인 희망에 매달리기도 한다. 영화 <터널은 극한 상황에 고립된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섬세하게 그려낸 ‘재난극’의 범주 안에 놓인다.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설정은, 좁은 관 속에 갇힌 채 사투를 벌이는 <베리드, 예기치 않은 사고 속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생존을 모색하는 <127시간, 무인도에 고립되어 배구공을 친구 삼아 버텨내는 <캐스트 어웨이, 그리고 터널 안에서의 생존과 구조를 그린 <데이 라이트와 같은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외부와의 ‘고립’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절망하고, 또 어떻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립’이란 타인과 분리되어 홀로 남겨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크게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자발적 고립과, 타인에 의해 강제로 분리되는 비자발적 고립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스스로 선택한 상황이기에 개인에게 극단적인 재난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다르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갑작스럽게 세상과 단절되고 홀로 남겨진 상황은, 상상 이상의 공포와 절망감을 안겨준다. 밤길을 걷다 마주치는 낯선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역설적으로 아무도 곁에 없다는 극심한 고독감일지도 모른다. 영화 <터널은 바로 그 고립의 심연 속으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끌고 들어간다.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의 정수는, 붕괴된 터널 안에서 때로는 어리숙해 보일 정도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극한의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만약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그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정수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그의 불안한 몸짓과 절규에 결코 쉽사리 웃음을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절망적인 상황에 깊이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할 것이다.
개인의 경험은 다를 수 있지만, 세상과 완전히 고립된다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은 없을 것이다.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도 고통스럽겠지만, 간절히 바라던 희망이 결국 무너지거나 기약 없이 지연될 때 느끼는 낙담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약속된 시간만 견디면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눈을 마주보며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고된 현재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동력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어그러지고, 기약 없이 늘어나는 시간을 속절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감은 삶의 의미마저 앗아간다. 이것이 바로 고립된 사람의 가장 깊고 아픈 고통일 것이다.
누군가의 비리와 부조리로 인해 초래된 현재의 상황, 그리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사람들의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행태에 분노를 느낄 겨를조차 없다. 그저 이 숨 막히는 단절, 이 끔찍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러다 그 희망마저 헛된 기만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욱 깊은 절망과 고통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갇히고 묻힌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사람이 갇혀 있다고요. 사람이.” 영화 속 오달수의 절규는, 재난 상황 앞에서 인간의 생명보다 다른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회의 냉혹함을 날카롭게 찌른다. 우리는 수많은 재난을 경험해 왔다. 가까이는 ‘10.29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가 그러하며, 오래전 기억 속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아픈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 삼풍백화점 사고로 가장 사랑했던 대학 동기를 잃었던 개인적인 경험은, 재난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들의 고통과, 남겨진 사람들의 깊은 슬픔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모스크바로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날,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정리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백화점을 찾았던 그 친구는, 차가운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작은 가시 하나에도 아파했던 그녀가 겪었을 육체적인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곳에서 잠들기 힘들어 MT 때면 늘 내 품에 파고들어 잠들었던 그녀가 느꼈을 극심한 외로움과 공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해진다.
아마도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사랑하는 가족, 형제, 친구들을 잃은 사람들은, 사고의 원인에 대한 분노 이전에 그들이 느꼈을 극심한 고립감과 공포에 더욱 깊이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나 비리,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안전 불감증에 대한 비판과 조소는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사회 시스템의 문제에만 함몰된 나머지, 좁은 공간에 갇혀 극심한 고립감과 공포에 떨었던 이들의 진정한 고통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붕괴된 터널에 여전히 갇힌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회
세상과의 고립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다양한 형태로 카지노 게임 사이트 주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물리적인 재난으로 인한 고립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도태에서 비롯된 소외와 따돌림 또한 또 다른 형태의 고립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의 가장 큰 재난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붕괴가 아닌,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회 곳곳에 만연한 ‘고립’과 ‘고독’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터널은 아쉬운 지점을 남긴다. 대중의 호응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제작 환경 속에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와 개인의 고립된 공포를 엮어내려는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영화의 중심축이 다소 모호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좋은 영화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서울역이라는 애니메이션 프리퀄을 통해 카지노 게임 사이트 비판과 개인의 절망이라는 두 축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춘 것처럼, 김성훈 감독 또한 <터널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진짜 이야기를 다음 작품에서 보여주기를 기대해 본다. 그의 전작 <끝까지 간다의 제목처럼, 가능하다면 말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재난 이후의 사회를 “애도의 불능” 상태로 진단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과연 제대로 애도할 수 있었을까. 진상 규명은 지지부진하고, 책임자 처벌은 미흡했으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온전한 공간조차 마련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그날의 끔찍한 고립과 공포,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슬픔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붕괴된 터널처럼,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갇혀, 희미한 생환의 빛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4년 4월 16일,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던 그 배와 함께, 우리 사회의 안전 시스템과 공감 능력 또한 깊숙이 침몰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2025년의 서울 하늘 아래, 우리는 여전히 그 붕괴된 터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또 다른 형태의 ‘계엄’ 상태, 즉 무력감과 냉소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미한 라디오 주파수처럼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희망의 메시지마저, 곧 끊어질 듯 위태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