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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Feb 18. 2025

무기력의 무기

학원별곡


초등학교 5학년 무력이는 오늘도 교실 책상에 앉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엎드린다. 보통은 '수업 시작했어. 책 꺼내고 똑바로 앉자.' 라고 하지만마침 다른 아이들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오지 않아 교실에 나와 무력이 한명 뿐이었던 그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엎드려 있는 무력이를 가만히 바라 보았다. 선생님의 '일어나자' 소리가 나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무력이는 슬그머니 일어나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묻는다.


오늘 뭐해요?

무력아. 네가 말해볼래? 오늘 뭐해야 할 차례니?


어깨를 으쓱하며 몰라요. 하고 대답한 아이는여전히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빈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다.교실 앞에 설치된 커다란 TV 모니터에 지난 시간 숙제 알림장을 띄워주었다. 그제서야 주섬주섬 책을 꺼내 아무곳이나 피더니그러고 나서도 촛점없는 눈으로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있는 아이에게 숙제했니? 물었다.어차피 했을 거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게 아니었으므로, 답을 예상하긴 헸지만 역시 무력이의 그다음 대답은 '숙제가 있었어요?' 였고 나는 모니터를 가르키며 '저기 적혀있네? 지난 시간에 알려주었어' 라고 응답했다. 숙제를 '못했다'는 카지노 게임에게 왜 숙제를 '안했니?' 라고 물으니 너무 바빴단다.


숙제 못했어요.

왜 안했니?

수학숙제 하느라구요.

수학숙제 하느라 얼마나 걸렸는데?

2시간? 3시간?


80년 형을 선고받고, 책 한권 없는 독방에 갇힌 죄수의 눈속에서 저런 무기력과 권태가읽힐까.12살이라고 믿을 수 없게 카지노 게임의표정은 가뭄에 비틀어진 풀처럼 생기없이 지루하고눈동자는 오래 고인 우물처럼 뿌옇고 탁하다.


수학숙제가 어려웠나보네. 수학은 뭘 배워?

몰라요.

숙제하느라 3시간 걸렸다면서. 근데 뭘 배우는지 몰라?

기억이 안나요.

중학교거 배우고 있어?

그럴걸요.


중학교 선행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카지노 게임의 표정에 잠시 자랑스러운 표정이 살짝 스쳤다. 이제 6학년에 올라가는데 중학교 2학년 진도를 나가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냐고 물으니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중학교 2학년 문제인데 어렵지 않냐고 물으니 '아니요.쉬워요'라고 대답하더니 그만 물으라는 듯 귀찮은 표정으로 다시 '나 오늘 뭐해요?' 묻는 아이에게 "너 진짜 하기 싫겠다 그지?" 라고 말하니,의외의 답변이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너 진짜 하기 싫겠다. 수학 숙제를 3시간씩이나 했는데 다른게 뭔들 하고 싶겠니. 선생님이라도 다른 숙제는 안할 것 같아."

카지노 게임는 나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다소 경계하는 눈빛이 되어 웅크린 강아지같은 자세로 나를 보고 있다.

<못한 숙제를지금 하라고 하고 잠시 시간을 주었다. 무력이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연필심에서 최대한 멀게 잡고 손가락에 힘을 주지 않은 채로 글씨를 쓰기 때문에 색도 흐리고 알아볼 수 없어서 숙제 검사를 하거나 수업시간에 글씨를 쓸 때마다 주의를 주고 연습을 시켰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5분도 안되서 괴발세발 휘갈겨 쓴 숙제 페이지를 내밀길래 일단 확인을 하고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샘은 알고 있거든? 니가 이거보단 좀 더 글씨를 잘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거? 여기 5개 문장중에 제일 짧은거 두개만 능력 발휘해서 써볼래?"

이렇게만 말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적어도 아주 '잠깐동안'은 변한다. 예상대로 무력이는 '매우 단정한 글씨체'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알아볼 수 있고 띄어쓰기도 비교적 정확해진문장을 내밀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니가 글씨를 잘 쓰는 능력이 없는 카지노 게임는 아니었어." 칭찬 도장을 찍어주니 무력이는 여전히 지루한 표정을 한 채였지만, 은근슬쩍,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의자를 살짝 당겨 앉았다.


"너 지금 내가 내준 숙제 다 했거든? 몇분 정도 걸린 것 같아?"

"몰라요."

"내가 시간 보고 있었는데.. 한 4분? 걸렸나?"

"우리 그저께 헤어지고 다시 만났는데 이틀 동안 수학 숙제하느라고 진짜 시간이 4분도없었을까?"

가만히 나를 보는 카지노 게임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숙제를 못한게 시간이 없어서 일까? 마음이 없어서일까?"

"...마음이요."

"맞아. 근데. 나 너 이해해. 마음이 생길리가 없었을 것 같애. 그런데, 나는 앞으로도 너한테 숙제를 내줄건데.너는 계속 수학 숙제를 해야 할 거고... 어떡하지? 내가 널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아이는 대체 이사람이 왜 이러나 혼란스러운 표정이면서도 굴 안의 새끼 토끼처럼날이 바짝 서있던 눈동자의 경계심이 아주 조금은 풀린 것이 보인다.

"니가 내 아들이면 수학 숙제를 줄이거나 빼주겠지만나는 너희 엄마가 아니잖아? 그러니 그건 너랑 엄마랑 해결해야하는데... 엄마한테 한번 얘기를 해보는게 어때? 수학 숙제가 너무 많다고?"

"... 엄마가 이제 그 정도 공부는 해야 한데요."


무력이는 아마 이미 온 몸으로 엄마에게 여러본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았을 거다.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는 것을. 사방이 막힌거대한 벽앞에 선 아이는 더 이상 움직일 생각도, 벽을 넘어볼 생각도,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삽을 들고 벽 아래를 파서, 혹은 사다리를 구해 기어올라 기어이 벽 너머를 보려는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의지를 거세당한 아이는 벽에 아무렇게나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적어도 뭔가 그리고 쓰고 있다는 행위를 보여줄 수 있으며,그게 출구 없이 영원하게 느껴지는 주어진 시간동안 어떻게든 시키는 것을'하는 척'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아이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무기력' 과 '권태로움' 으로 온 몸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하고 빨리 수업이나 하라는 표정으로 돌아온 무력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독해 하지 말고, 지난 시간에 읽은 식충식물에 대한 비디오나 하나 볼까?"

"아니요."

"왜? 진도 빨리 안나가도 되는데? 너 보여줄라고 재미있는거 찾아.놨어."

"그냥 진도 나갈래요.빨리 끝내버리고 싶어요."

"진짜? 그래 알았어 그럼.. 진도 나가자."


수업을 마치고 숙제를 내주며, '니 마음이 그대로라면 다음번에 또 안해 올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럼내가 널 어떻게 도와줄까? 다시 물으니, "마음을 먹어볼게요." 한다. 아주 조금. 표정이 순해졌다. 아마 그리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도 어쩌면 역시 예의 그 권태로운 표정과 짜증섞인 말투로 교실에 들어올 확률이 꽤 높을 것이다.얼마나 반복해야 날선 카지노 게임의 표정이 둥글어지고 순해질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건,

"너 진짜 하기 싫겠다."

"어떻게 도와줄까?"

이 두마디만 해도, 비록 잠간 일지언정, 아이는 시선을 돌려 나의 눈을 바라본다는 것이다.이제까지 이 두 문장이 통하지 않은 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카지노 게임의 엄마가 아니고, 일주일에 2,3번 잠시 아이들을 만나는 학원 강사에 불과하니.. 나의 그 두 문장이 봄날의 햇살이 되어잔뜩 움켜진 외투깃을 느슨하게 하기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다가 다른 학원으로 옮겨버기리가도 하면 그나마 지속 가능하지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너를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우린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너를 위해'의 '너'는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나, 즉 부모들이다. 카지노 게임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며, 카지노 게임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잘못된 줄긋기를 하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진짜 성공이 뭔지, 진짜 행복이 뭔지에 대한 줄긋기도 온통 다 오답인 줄도 모르고,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달려가니 뒤쳐질새라, 내 카지노 게임의 손을 놓칠새라 움켜쥐고 달려가는 형국이다.



"왜 의사가 되고 싶어요?"

"하방 일억오천이라서요."


부조리극 대사 같은 이 대화는 얼마전 EBS 다큐에서 본 한 장면이다.'초등 의대반' 이라는 학원 교실에서 인터뷰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한아이의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 아래로,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캡션이 보인다. 국가공영방송 EBS의 공정성이 무너지고,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정의가 무색해져도 좋으니,차라리 저 다큐가 조작이길바랬다. 조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음날, 나 역시 나의 교실에서 같은 대답을 들었으니까. 의사가 되고싶다던 그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이었다. 쩝.




이렇게 입바른 소리하지만 ,나는정말카지노 게임에게 그들과 다른 엄마일까.가끔 카지노 게임의 표정에서도 읽히는 그권태로움과 짜증은 그저 사춘기의 그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아직 갈길이 멀지만, 적어도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내달리지는 말자고 다짐해본다. 어제 엄마가 또 버럭해서 미안하다. 장초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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